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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풍 - 염상섭 선집 2
염상섭 지음 / 실천문학사 / 1998년 3월
평점 :
품절
읽기 전의 예상과는 달리, 책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은 지루함과 기대감 모두에서 비껴나 있다. 연애담이 대부분의 지면을 차지하고 있고 내용 또한 단순하여 매우 수월하게 읽을 수 있었지만, 역사와 인간에 대한 작가의 내면적인 통찰은 그다지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 눈에 우선 들어오는 것은 비현실적인 연애 묘사였다. 상당수의 주요 등장인물들을 움직이게 하는 동인(動因)이 애정(이성애)에 기반하고 있다. 이러한 인물의 동인은 단지 박병직과 김혜란이 선남선녀(善男善女)이기 때문이라고 설명된다. 통속적인 발상, 하이틴 로맨스 소설 같은 구도가 아닌가.
또한 거듭되는 김혜란의 외모 묘사는 젊은 여성의 육체를 관음증적인 시선으로 훑어보는 것으로 또한 상당히 상투적이다. 미국인 베커의 눈에 비친 혜란의 육체를 동양적인 정취라고 표현한 점에서, 서양인의 눈에 비친 동양의 이미지를 또다시 받아들이는 염상섭의 역(逆)오리엔탈리즘을 읽을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상당히 많은 인물들이 나온다. 영어선생이기도 했던 장만춘은 학교를 그만두고 해방바람에 여기 저기 쫓아다니다가 결국 통역 일을 하면서 고물상 거간꾼이나 형사끄나풀, 객원, 잡다한 일에 대한 고문 같은 일을 하게 된 인물이다. 이진석은 미국에서 살다가 조선으로 들어와서 미국과의 교역을 통해 한몫 잡겠다는 생각을 하는 남한 천민 자본주의의 대부같은 인물이다. 가네코는 본래 일본인이나 한국인 남편과 결혼해서 일제 시대에는 내지인으로 편히 살고 해방 후에는 조선인으로 행세하며 적산을 받아서 또한 편하게 사는 인물이다.
베커는 교양있고 조선과 김혜란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있는 젊은 미국인으로 나오는데, 작가는 그에 대해서 너그러운 시선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수집되는 조선의 문화재는, 실은 그 문화재가 전통적으로 생산되고 보존되던 지역에서 폭력적으로 약탈당하는 것 아닌가? 아무리 베커가 적절한 가격에 합법적인 방법으로 이를 구입한다 해도 말이다.
박병직의 아버지 박종렬은 양조회사 사장으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하여 정치력도 손에 넣으려는 인물이다. 수하에 김혜란의 오빠인 김태환을 수뇌로 하는 우익 청년단을 두고 있다. 한 집안 안에서 이처럼 분열되는 것은 이후의 피비린내 나는 한국전쟁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소설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박병직이라고 생각되는데, 그 이유는 주요 인물인 박병직, 김혜란, 최화순 중에서 자의식을 가지고 세계와의 대립을 인식하는 대자(對自)는 박병직 뿐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읽었을 때 내 머리 속에는 '무정', '광장', '에코토피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같은 소설들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모두 선형-형식-영채, 은혜-명준-은애, 마리사-윌리엄-프랜신 등으로 두 세계 사이에서 고뇌하고 방황하는 남성 지식인의 움직임과 그 두 세계를 각각 상징하는 여성들과의 연애가 등치되는 구도를 가지고 있다.
한편, 박병직과 김혜란은 며칠 형무소에서 고생하다 나온 것을 엄청난 시련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 한데, 열흘 갇혀 있다가 풀려난 이후에 빨갱이라고 찍혀서 먹고 살 걱정이 막막해진 것도 아니고, 인간관계가 파탄난 것도 아니며, 월북한 동료들과 떨어졌다는 자괴감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것도 아니다. 너무나 평온하고 순조롭게 방황하던 지식인은 안전한 구조 속으로 귀환한다. 그런 그들이 공부를 계속한다고 해서 계급문제를 넘어선, 통일의 밑거름이 되는 이론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소설의 구성상, '효풍'은 '완결'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우유부단하던 박병직이 선뜻 결혼을 결심하고 당장이라도 유학을 갈 것 같던 김혜란은 청혼에 응한다. 또한 박병직에게 누가 왜 테러를 가했는지 제대로 설명되지도 않고 어영부영 넘어가 버렸다. 그리고 왜 제목이 '효풍'인지도 전혀 알 수가 없는데, 여기에도 연재가 서둘러 끝난 것이 원인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