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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랭 레몽 지음, 김화영 옮김 / 비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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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떠올리면 부모에 이어 형제가 떠오른다. 지금은 혼자 사는 사람들도 많지만 원래 집은 가족이 함께 사는 곳이었다. 낯선 세상에서 가족은 최초의 내 편이다. 가족이라도 함께 사는 일은 쉽지 않다. 즐거운 날도 많지만 전쟁의 날도 숱하다. 함께 즐겁게 사는 것이 불가능한 건 가족이라도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집은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가족이 동상이몽 하며 지지고 볶으며 사는 곳이라고.

 

알랭 레몽의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에는 두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책 제목과 같은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과 「한 젊은이가 지나갔다」가 그것이다. 두 소설은 작가인 알랭 레몽의 자전적 소설이다. 소설의 화자이기도 한 알랭 레몽은 오십 년이 흐른 후 가족과 함께했던, 때로 가족과 분리되어 혼자였던 그 시절을 떠올린다. 두 편의 소설은 정치·사회적 변화의 물결 속에 그와 가족이 살고 머물렀던 집과 꿈을 찾아 방황했던 스무 살 무렵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지난 이야기들은 기억의 왜곡과 상실 덕에 대부분 과장되기 마련이다. 지독하게 불행하거나 그리울 만큼 아름답거나. 그의 소설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모두에겐 지나간 시절이 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고 이젠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살았던 시절이지만 오늘의 나를 만든 시간이다.         

 

그 집으로 이사 갔을 때 나는 여섯 살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스물다섯 살이었고, 그렇게 따져보니 한 이십 년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이십오 년도 넘었다. 그렇대도 그 집은 우리 집이라고밖에 달리 말할 수가 없다. 그러니 불청객들은 나가라, 감히 어디라고! 꺼지란 말야! 그 집은 당신네 집이 아니야. 우리 집이란 말야. 그 집에 살면서 겪은 일들이 너무 많고 너무 지독하고 너무 찐해. 거기서 우린 너무나 행복했어. 그리고 때로는 여지없이 절망에 빠지기도 했지. 열 명이나 되는 우리 형제들 전부. 그리고 부모님들도. 지금 나는 트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다. 오래전부터. 집에서 먼 곳에. 그 모든 것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그러나 가끔 브르타뉴로 다시 돌아가 트랑을 지나기도 하고 거기서 걸음을 멈추는 때도 있다. 떨리는 가슴으로 그 집을 지나는 때도 있다. 모르는 체하며 슬며시 창문 저쪽으로 눈길을 던져 그 안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보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창 쪽으로 가까이 가려고 하면 꼭 화상이라도 입을 것만 같다. 쳐다볼 수가 없다. 정말이지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18-19쪽)

 

옛집에 간 적이 있다. 그 집은 새로 지어져 있었다. 태어난 집은 아니지만 여덟 살 여름부터 스무 살 봄까지 그 집에서 살았다. 여러 집에서 살았지만 ‘집’이란 단어에 떠오르는 집은 그 집뿐이다. 당시에는 그 집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에선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더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는 이야기가 나온다. 옛집에서의 내 부모님 역시 그랬다. 그것은 나에게 슬픔을 넘어 절망이었다. 잊었던 건 아니지만 그리움 앞에 절망은 무뎌졌다. 안 좋았던 기억들은 다른 집에서도 계속됐지만 특별한 기억은 그 집에서만 유일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집은 작았지만 있을 것이 다 있는 집이었다. 훗날 넓은 친구 집에 놀러 가기 전까지는 그 집이 작은지도 몰랐다. 그 집에는 마당과 옥상과 지하실과 다락방이 있었다. 그 집은 숨바꼭질하기 좋았고 보물찾기하기 좋았고 틀어박혀 책읽기 좋았다. 함께 했던 가족과 이웃들이 살지 않는 그 골목은 낯설었다. 다행이랄까. 그 골목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많은 골목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그 골목 역시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마지막 남은 내 기억의 조각도 사라질 것이다.

 

골목이 사라지는 건 차라리 낫다. 맘에 들진 않지만 다른 집들이 세워지니까.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의 ‘나’는 샤토브리앙의 《무덤 저 너머의 회상》에서 ‘나의 모든 하루하루는 작별의 나날이었다.’라는 글을 읽었다고 했다. 살아오면서 많은 이들과 이별을 했다. 어떤 이별은 언젠가 만날 거라는 기대를 품거나 잘살고 있겠지 여기며 살았지만, 어떤 이별은 영원한 이별이었다.

 

조금씩 잊혀져 간다 /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 또 하루 멀어져 간다 /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김광석의 노래 <서른 즈음에>의 일부다. 산다는 건은 결국 이별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지나온 시간과. ‘나’의 부모님은 세상을 떠나셨다. 나의 부모님도 언젠가 세상을 떠나실 것이다. 노년의 아버지는 건강이 좋지 않지만 재작년 가을 무렵부터 작년 봄까지는 아주 나빴다. 게다가 어머니의 건강 역시 안 좋았다. 아버지를 보며 돌아가실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자식으로 제대로 해드린 것이 없다는 죄송함과 ‘내 속에서 나를 무섭게 하는, 나를 부끄럽게 하는 어떤 존재’(93쪽)가 있어 마음이 복잡했다.

 

한파가 계속되고 있다. 이렇게 추웠던 적이 있었나 싶다.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지독한 현실 앞에 기억은 때로 길은 잃는다. 추운 날들이 이어지는 것을 제외하면 고요하다.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의 ‘나’는 ‘산 사람들, 그리고 죽은 사람들, 그들 모두와 평화롭게 지내고 싶다.’(148쪽)고 했다. 지금의 나는 이 평화가 지속하길 바란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길 바란다. 산다는 건 결국 이별하는 것인데 이별은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녜스, 자크, 마들렌, 베르나르, 그리고 나. 커버리고 나면 아이들은 더는 놀이를 하지 않는다. 아녜스는 어느 날 놀이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자크도. 어느 날 문득 놀이를 할 줄 모르게 되는 것이다. 비밀을 잊어버린다.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그걸 어떻게 하는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온갖 삶들을 마음속으로 지어내고 그것을 굳게 믿는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게 끝나버린다. 그냥 그렇게 갑자기 딱 멈춰버린 것이다. 놀이의 상실, 놀이의 망각, 나는 그게 바로 일생 중 최악의 날이 아닌가 싶다. 누구나 그런 날을 거치게 마련이다. 어느 날 내 차례가 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마지막까지, 마지막 날까지, 마지막 순간까지 남김없이 즐겼다. 내가 기록을 세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가장 오랫동안 즐긴 것이다. 하늘이 내린 선물이다. 생생하게 기억난다. 어느 날 내 또래의 친구 하나가 나를 찾아서 마당으로 왔다가 내가 마들렌, 베르나르와 함께 놀고 있는 것을 보고는 쏘아붙였다. 아니 그 나이에 아직도 이런 놀이를 하는 거야? 그렇다. 아직도 그런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나는 그런 놀이를 할 줄 모르게 된 그를 동정했다. 나중에, 그 울타리를, 그 경계를 넘어와버리면 끝이다. 다시 뒤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결코.(「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40-41쪽)

 

파티는 끝났다. 내 몸이 겪는 고통의 여름. 그리고 나 자신으로부터의 부재. 목숨을 부지하고 견디는 일이 남았다. 세상이 무너져 내린다. 깊이 생각하고 결정을 내린다는 것이다. 이 사고가 나를 전혀 다른 세상으로 던져놓은 것이다. 이것이 눈앞의 현실이다. 몽유병자나 자동인형같이 된 나는 이미 정상이 아니다. 나는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이다. 삶이 딱 소리를 내며 부러져버렸다. 사고가 나기 전의 삶과 후의 삶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생트 크롸, 나의 소명, 이런 것은 이제 다 지워져버렸다. 죽은 것이다. 끝난 것이다. 그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이 기적이다. 나를 지탱해주는 유일한 것은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한 발, 다시 한 발, 하루가 지나가고 다시 또 하루. 내 나이 스물두 살. 삶은 전진한다.(「한 젊은이가 지나갔다」, 255쪽)

 

그 시절은, 우리가 트랑에 살던 그 시절은 끝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집이 팔렸다. 나 역시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넘어간다. 나는 이제 트랑에 살지 않고 생트 크롸에 머물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물렝 베르를 떠난다. 물렝 베르에 살던 사람들 각자는 저마다의 시절을, 저마다의 시간을 마감하고 결국은 떠나버린다. 자신의 내면에서 작업이 끝났다. 다른 더 바쁜 일들이 생겼고 다른 욕구가 생겼다. 이제 나는 내 삶을 만들어가야 한다. 내가 사랑하는 안느, 나를 사랑하는 안느와 함께. 이렇게 행복을 꿈꾸었던 한 젊은이가 지나갔다. 생생하고 살아 있고 싶어 했던 한 젊은이가 살아서. 그러니 이젠 어서, 어서. 삶이 전진한다.(「한 젊은이가 지나갔다」, 295쪽)

 

우리가 밭에 도착하는 바로 그 순간, 숲에서 암사슴 두 마리가 불쑥 나타나더니 바로 집이 있던 그 자리에 잠시 멈추어 선다. 정확하게 집이 있었던 바로 그 자리다. 그놈들이 바르르 떨면서 우리를 쳐다본다. 그러고는 빗속으로 저만큼 달아나버린다. 달려라, 달려라, 삶이 전진한다.(「한 젊은이가 지나갔다」, 304쪽)

 

내가 살아왔던 시간과 ‘나’가 살아왔던 시간은 다르다. 내가 살고 머물렀던 곳과 ‘나’가 살고 머물렀던 곳 역시 다르다. 그럼에도 읽으면서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나’도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을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작별의 나날 혹은 잠재된 작별의 나날을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알랭 레몽은 말한다.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고 사라진 것들은 다시 소생하지 않지만 삶은 여전히 기적이라고.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린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야한다. 기나긴 여정의 끝에 있는 것이 작별일지라도. 파티는 끝났다. 그러나 다른 파티가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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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6-01-20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찜해둔 책이라 빨간바나나님의 좋은 리뷰 더 관심있게 잘 보았습니다^^

빨간바나나 2016-01-20 11:36   좋아요 1 | URL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독서에 도움에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새벽의 인문학 - 하루를 가장 풍요롭게 시작하는 방법
다이앤 애커먼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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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덕분에 어둠의 공포는 사라졌다. 밤은 더 이상 잠의 시간이 아니다. 낮엔 자고 밤에 일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렇다고 해도 밤은 낮이 될 수 없다. 자연의 법칙이 그러하다. 인위적인 빛은 자연의 빛의 주는 감동을 따라오지 못한다. 우울증 환자가 아니라도 따뜻한 햇볕과 산들바람은 기분을 밝게 한다.

 

새벽은 낮과 밤의 경계에 존재하는 시간이다. 어둠을 뚫고 해가 나오는 시간이다. 다이앤 애커먼의 『새벽의 인문학』은 ‘하루를 가장 풍요롭게 시작하는 방법’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시간상 하루의 시작은 자정 12시지만 실제 하루의 시작은 새로운 빛이 떠오르는 새벽이다. 기다림 끝에 빛이 떠오르던 모습을 봤었다. 하나의 단어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장관이었다. 좀 오래전 얘기다.

 

대부분의 새벽은 잠에 취해 있는 시간이다. 나의 새벽은 다이앤 애커먼처럼 자연을 만나는 시간이 아니다. 이 책을 새벽에 읽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길든 몸은 새벽에 깨어 있기를 거부했다.

 

새벽은 자기 시간대, 자기 기후로 세상을 덧칠하는, 석화된 숲과 잠자는 미녀들의 세상이다. 얼어붙은 이슬로 단단해진 마른 잎은 유령의 손이 되고, 사슴은 숲에서 머리를 수그리고 돌아다니며 먹이가 녹기를 기다린다. 우리 삶의 거대한 괄호의 일부인 새벽은 삶과 물질세계의 깊숙한 회랑이 손짓할 때 살아서 죽음에 저항하는 세상으로 우리를 부른다. 그러고 나서, 어두운 방 안에 불을 켠 것처럼, 자연이 또렷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 자신의 모습, 유령 같은 손, 지나온 세월의 고운 앙금까지도.(13쪽)

 

자연이 계절마다 다르듯 새벽도 그렇다. 다이앤 애커먼은 사계절의 새벽을, 새벽의 자연들을 관찰했다. 그 속에서 만난 것은 인간, 그리고 인간의 삶이었다. 비둘기들의 ‘창발적 행동’을 보고 ‘정신은 오로지 부분과 전체의 관계에서 생겨남’을 생각했다. 내리는 비를 보고도 우리의 모습을 보았다. 조용한 듯 보여도 실은 ‘나노초 단위로 변화하는 작은 움직임, 상호작용, 관계의 도가니’라는 걸. 마음의 요동을 감추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살아가지 않던가. 인간은 자연 일부이니 당연하다고 볼 수 있지만, 관찰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비는 그저 자연 현상일 뿐이다.

 

잃어버린 두루미들이 내 마음속에 저절로 생겨난 목록에 이름을 올린다. 무수히 많은 상실들이 쌓인 곳이다. 한때 여기에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진 것, 사라지고 있는 것, 변해버린 것, 아직 남아 있기는 하나 알아볼 수가 없는 것, 존재한 적이 없는 신화적인 것, 죽은 사람이나 짐승, 삶의 지나간 나날들…… 모든 번민을 일으키지만, 상실감과 망각 덕에 내 삶이 하나로 묶인다. 많은 것들이 오랜 부목(浮木)처럼 서서히 썩어갈 때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나를 놀라게 하는 것들도 마찬가지 역할을 한다. 30년이 흐른 뒤에 다시 이어져 타오르는 대학 시절의 우정 같은 것.(51-52쪽)

 

새벽, 그리고 자연을 만나는 일은 지나온 삶, 현재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그 과정을 통해 나란 존재는 어느 날 갑자기 툭 튀어나온 존재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삶의 지속성을 생각하게 된다.

 

도심에서의 새벽은 한정되어 있다. 드문드문 다니는 버스, 청소하는 환경미화원들, 일터로 가기 위해 첫차를 타는 사람들 등. 다이앤 애커먼처럼 새벽을 만나는 일은 어렵다고 말하려다 그것이 핑계임을 깨닫는다. 다이앤 애커먼의 새벽은 곧 자연이었다. 자연을 만나는 일은 눈과 귀와 손이 향하는 것들, TV, 컴퓨터, 휴대폰을 잠시 외면하면 되는 것이었다. 이들에게서 멀어지면 불안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별다른 일은 생기지 않는다. 편리를 위해 만들어놓곤 노예가 되어 버렸다.

 

삶의 정글 안에 있는 이들에게 7월은 뜨거운 계절이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에게 말이다. 또 시간이 얼마나 많이 흘렀나를 일깨워주는 때이기도 하다. 전에 나를 놀라게 하고 기쁘게 했던 것들에 대해 이제는 충격을 받는다. 벌들은 더 서둘러 꿀을 모으고, 여름이 되어 무성해진 관상용 풀이 이제는 1.5미터 높이로 날카로운 창처럼 자라났고, 벌새들은 이동하기 전에 최대한 몸을 불리려고 먹이통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제 두 달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물론 여름이 빗물로 물든 목련의 녹갈색 나무껍질에 있는 것은 아니다. 봉제선이 있는 스타킹을 신은 통통한 여자의 종아리 같은, 인도쪽풀의 부푼 씨방에 있는 것도 아니다. 여름은 보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을 뿐이다. 장대하게 뻗은 나뭇가지, 꿀을 모으는 벌들을 보면서 우리는 이 7월이라는 계절, 헤아릴 때에만 숫자를 갖는 이 나날에 여름을 부여한다.(192쪽) 

 

여름, 7월에 태어났다. 오랫동안 여름에 태어난 걸 좋아하지 않았다. 날은 더웠고, 방학으로 친구들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시골에서 여름방학을 보낼 상황도 아니었다. 책 덕분에 내가 태어난 달이 조금은 좋아졌다. 그러니까 나는 7월을 자세히 보지 않았고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이앤 애커먼은 고대 문화, 신화, 미술, 언어, 시, 꿀벌을 비롯한 다양한 생물 등 다방면의 지식을 통해 새벽의 특별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낯선 존재들, 같이 살아가는 동물들’의 삶을 우리 삶의 이야기로 확장시켰다. 동물처럼 인간 역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새벽의 인문학』은 이해와 소통, 그리고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생명의 소중함과 삶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개구리가 놀라서 깨어난다는 경칩이 지났다. 주말에 집 근처 작은 식물원에 갔다. 꽃은 없었다. 그곳은 여전히 겨울이었지만, 얼음이 녹고 있는 연못 사이로 개구리들이 있었다. 그리고 개구리 알이 있었다. 겨울의 끝자락, 그렇게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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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안 해파랑길 - 걷는 자의 행복
이영철 지음 / 예담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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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저녁으로 아주 선선해졌다. 긴 소매 옷과 긴 바지가 좋을 만큼. 덕분에 코감기에 걸리긴 했지만 말이다. 여행 가기 좋은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여행 가기 좋다는 건 다른 일을 하기에도 좋다는 뜻이기도 할 텐데 여행이란 단어가 자꾸 머릿속을 맴돈다.

 

해파랑의 의미는 ‘해’라는 글자는 ‘뜨는 해’ 또는 ‘바다 해(海)’를 연상시키고, ‘파’는 ‘파란 바다’ 또는 ‘파도’를, ‘랑’은 누구누구 ‘랑’을 의미하는 작명이다. 동래의 떠오는 해와 푸른 바다를 길동무 삼아 함께 걷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15쪽)

 

‘걷는 자의 행복’이란 부제를 단 『동해안 해파랑길』을 읽었다. 해파랑길! 길 이름이 참 예쁘다. 해파랑길은 ‘동해와 남해의 분기점인 부산 오륙도 해맞이 공원에서 고성군 통일전망대까지 이어지는 770km의 길’이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782km)과 거리가 비슷하다.

 

저자 김영철은 대학 졸업 후 30년간 다닌 직장을 퇴직한 후 본격적으로 여행을 시작했고, 해파랑길은 산티아고로 가기 위한 전지훈련으로 걸었다고 한다. 이후 산티아고를 다녀와 다시 걸었는데 오랜 역사와 문화의 숨결을 느끼면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게 됐다면 그것만으로도 여행의 가치는 충분하다.

 

해파랑길은 ‘영남과 강원 지역의 부산, 울산, 경주, 포항, 영덕, 울진, 삼척-동해, 강릉, 양양-속초, 고성의 10개 구간에 총 50개 코스로 구성’되어 있다. 구간별 간략한 소개를 읽었을 땐 경주, 울진, 강릉, 고성 구간에 관심이 갔다. 내겐 ‘비밀’이란 단어를 품고 있는 공간이었다. 그곳에는 역사와 자연, 삶의 비밀이 있었다.

 

20개 단기 추천 코스와 1박 2일, 2박 3일, 3박 4일, 일주일의 다양한 코스 여행을 소개한다. 자신에게 맞는 코스를 선택하면 좋을 것이다. 50개 코스별 지도와 정보(길 찾기, 포인트, 맛집, 숙박, 교통편)가 실려 있다. 처음 떠난 낯선 여행지에서 의지할 수 있는 건 상세하고 정확한 설명이 가득한 여행서적이다. 이 책에는 여행지에 대한 설명과 음식과 숙소, 교통의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정보들이 실려 있다.

 

보름달 밤에 경포대에 오르면 모두 다섯 개의 달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밤하늘 달과 함께 멀리 동해 바다에 비친 달, 경포호수에 비친 달, 술잔에 비친 달, 그리고 앞에 앉은 연인의 눈동자에 비친 달…(290쪽)

 

부산 2코스는 저자가 소개하는 20개 코스 중 한 곳으로 개인적으로 관심이 갔다. 달(moon)이 들어가는 길 이름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강릉 구간 39코스도 궁금하다. 예전에 간 적 있는데 그땐 '다섯 개의 달'을 몰랐다. 다섯 개의 달을 보려면 두 가지 조건이 충족해야 한다. 보름달이 떠야 하고 연인이 있어야 하고.

 

2코스에서 만나는 일출암은 ‘파도와 마주한 국내 사찰 중 가장 먼저 해돋이를 볼 수 있는 위치’라고 한다. 지리산 천왕봉과 제주도 성산 일출봉, 경주 감포, 정동진 등에서 일출을 본 적이 있다. 일출암에서 만나게 될 일출은 어떤 장관일까. 만나고 싶다. 못 이룬 소원 한 가지쯤 빌어보는 것도 좋으리라.

 

동해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곳, ‘한반도 동쪽 땅끝마을’은 호미곶인 줄 알았는데 따로 있었다. 그곳은 625번 국도를 따라 걷다 보면 만나게 되는 ‘석병리’라는 마을이었다. 좋은 길, ‘블루로드’로 유명한 영덕 구간은 7번 국도에 있다. 새 책 그대로 책장에 잠자고 있는 김연수의 소설『7번 국도』가 궁금해졌다. 동해안 해파랑길을 걷다 잠시 쉴 때마다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파도 소리를 듣고 커피 향을 맡으며.

 

영덕 구간 중 하나인 19코스엔 <그대 그리고 나> 촬영지 안내판이 보인다고 한다. 지난봄 <강구 이야기>라는 2부작 드라마를 본 적이 있다. 세계 최소 3D 드라마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달았던 드라마였다. 강구항을 배경으로 강구라는 아이를 키우고 사는, 거기다 불치병까지 걸린 싱글맘과 친구의 유언으로 그의 누이인 그녀를 지키다 그녀를 사랑하게 된 깡패 신분의 남자가 등장하는 이야기였다. 내용만 보면 신파로 보이긴 하는데 강구항을 배경으로 한 때문인지 꽤 서정적으로 다가왔던 드라마였다. 지난봄에 방영되었지만 쓸쓸함이 물들어가는 이 계절에도 잘 어울리는 드라마라는 생각이다. 지금은 이 드라마의 촬영지로도 소개되어 있을지 궁금하다.

 

영덕 구간 중 관심이 가는 또 다른 코스는 20코스(강구항→영덕 해맞이 공원) ‘빛과 바람의 길’이다. 가고 싶은 건 길 이름이 근사한 이유가 절반이다. 이 책에도 소개하고 있는데 『젊은 날의 초상』을 읽은 사람은 이 문장을 기억할 것이다. “돌아가자, 이제 이 심각한 유희는 끝나도 좋을 때다. 절망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그 진정한 출발이다.” 주인공이 도착한 그곳은 대진해변이었다. 대진해변에서 고래불해변까지의 백사장은 해안 절경이 아름답다고 한다.

 

영화<내가 고백을 하면>을 보면서 강릉에 가서 커피를 마셔야지, 하곤 잊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는 동안 다시 마시고 싶어졌다.      

 

사람들은 이렇게 길에다 의미를 부여하고 길 위에서 의미를 찾고 싶어한다. 삶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안간힘일 것이다.(296쪽)

 

책 뒤표지를 보면 ‘바다를 바라보며 느릿느릿 걷기 좋은 낭만적인 트레킹 코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이 책에 실린 가장 짧은 코스는 3시간 20분의 시간이 소요되는 36코스(강릉구간, 정동진역→안인해변)고 가장 긴 코스는 7시간 30분이 소요되는 25코스(울진 구간, 기성버스터미널→수산교)이다. 보통은 5~6시간이 소요되는 코스다. 해파랑길이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게스트하우스 혹은 저렴한 도미토리룸이 많이 부족하다. 아쉬운 점이다. 여행자가 많아지면 나아지겠지, 생각한다. 많이 걸어야 하고 숙박시설도 많지 않아 혼자보단 둘이, 혹은 셋이 떠나면 좋을 것 같다. <꽃보다 청춘-라오스 편>을 보고 친구 셋이 떠나는 여행이 부러웠던 것도 한 이유다.

 

어느 시절 부산, 경주, 인제, 정동진을 함께 했던 이들이 떠오른다. 이번 가을, 그들 중 누군가와 여행을 떠날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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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경고 - 현대인들의 부영양화된 삶을 꼬집어주는 책
엘리자베스 파렐리 지음, 박여진 옮김 / 베이직북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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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니?”

얼굴을 볼 때마다 “안녕!”이라든가 “잘 지냈니?”가 아닌 “행복하니?”라고 물었던 선배가 있었다. “행복해요.”라는 말보단 “불행해요.” 혹은 “우울해요.”라고 말한 날이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스무 살의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수십 통의 이력서를 내고 여러 번의 면접 끝에 취업하고 돈을 벌었지만, 역시 행복하지 않았다. 노력보다 받는 돈이 적다고 생각했다. 일이 많은 내가 일이 적은 그들과 같은 월급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니 월급도 오르고 시간도 많아졌다. 원하는 대로 되었으니 행복해야 하는데 행복하지 않았다. 이상했다.

 

사람은 앞으로 나가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마음에 간직하고만 있었던 그것 때문인지 집과 회사를 반복해서 오가는 쳇바퀴 생활은 지루했다. 답답했던 나는 탈출 혹은 모험을 계획했다. 꿈으로만 간직했던 일에 첫걸음을 내디뎠다. 그 세계는 그야말로 신천지였다. 이런 게 사는 거지, 하고 생각했다. 시간이 길어지자 또다시 행복하지 않았다. 삶이 돈으로 이어지지 않자 나는 다시 흔들렸다. 잘못 길을 들어선 것은 아닐까, 불안했다. 뒤늦은 출발이니 앞만 보고 가기도 바쁜데 자꾸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행복해지고 싶다는 건 지금은 불행하다는 뜻이다. 불행한 이유는 원하는 것은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을 가지려면 일정 시간을 기다려야 하지만 그럴 시간이 없다. 조급함으로 얻은 것들은 불완전해서 금방 망가진다. 나를 탓하기보단 타인을 탓하기 바쁘다.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해 불행하다면 많은 것을 가진 이들은 행복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해 삶과 죽음을 맞바꾸는 이들이 있지만 원하는 것을 가질 만큼 많은 돈을 가진 사람 중에도 삶과 죽음을 맞바꾸는 이들이 있다. 돈이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에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이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하는 건 여전히 부족한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류의 조상이 낙원에서 쫓겨났기 때문인지 인간에겐 낙원 증후군이 있는 것 같다. 『행복의 경고』에 실린 글을 인용하면 낙원 증후군은 ‘모든 것을 가짐으로써 생기는 심한 우울증’이라고 한다. 인간은 갖지 못해 우울하고 가져서 우울하다. 저자인 엘리자베스 파렐리는, 인간은 자신을 쾌락의 쳇바퀴 속으로 밀어 넣는다고 말한다. 신을 기만한 시시포스는 돌을 반복해서 굴려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형벌을 받았다. 신은 끊임없이 인간을 구원하지만, 인간은 어리석게도 스스로 형벌을 받고 있는 셈이다. 신이 되려는 욕망, 완전해지려는 욕망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의 원제는 ‘blubberland’이다. blubber는 ‘물질적 풍요와 부의 상징으로 여기던 고래 기름’을 뜻한다. ‘사용하지 않는 에너지, 여분의 지방’을 뜻하기도 한다. 저자가 말하는 블러버랜드는 모든 것이 있는 곳을 뜻한다. 현대는 돈만으로는 살 수 없지만, 돈이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이다. 블러버랜드는 현대를 뜻하는 곳으로 보인다.

 

사람을 매혹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 진정성에 달려 있다.(130쪽)

 

블러버를 좋다, 나쁘다로 이분화할 수 없는 것처럼 욕망하는 것을 좋다, 나쁘다로 말할 수 없다. 타인의 욕망이 아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뜻밖에 소소한 경우가 많다. ‘잘못된 욕망’, ‘습관이나 적응력과 결합해 늘 불만인 상태를 유지’해 우울해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마다 행복의 정의가 다르다는 것이 욕망을 포기하고 살라는 뜻은 아니다. 타인의 행복에 나를 맞출 필요는 없다는 걸 의미한다. 저자는 ‘아름다움을 원하는 이유는 아름다움에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아름다움에 권력이 있는 이유는 아름다움이 갈망의 대상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렇게 삶은 욕망과 연결되어 있다. 저자가 빌린 포스터의 글을 다시 빌리자면, 포스터는 글과 열정을 연결하면 ‘글과 열정 모두 고귀해지는 것이며 인간의 사랑은 절정에 이를 것’이라며 연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욕망이 열정과 연결되면 인간의 행복은 절정에 이를지도 모른다. 여기서 열정은 진정성을 기반으로 한 열정을 뜻한다.

 

동화 『파랑새』를 알 것이다. 행복을 찾아 길을 떠났지만 정작 행복은 집에 있었다는 그 얘기 말이다. 어렸을 적엔 ‘허황한 미래를 꿈꾸기보단 현실의 삶에 충실하라’는 얘기로 읽었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이야기로 다가왔다. 치르치르와 미치르가 길을 떠나는 용기를 내지 않았다면 행복은 현실이 아닌 이루지 못한 꿈으로 남았을 것이다.      

 

나는 이 글의 서두에서 나의 불행했던 청춘의 시간을 말했다. 사실 그 시절이 그렇게 불행했던 건 아니다. 지금과 비교하면 단연코 그때가 더 행복했다. 지난 것은 모두 아득한 법. 언젠가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다시 말하면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애썼다. 두려움에 떠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행복의 경고등이 켜졌다면 걸음을 멈추고 원인을 찾으면 되는 것이다.

 

저자는 내게 계속해서 물었다. 행복하냐고? 명확한 답을 내릴 수가 없다. 원하는 것을 아직 갖지 못했기에. 그렇지만 지금의 내가 불행했던 청춘의 시간을 행복하게 기억하듯 먼 훗날엔 오늘도 행복하다고 기억할 거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행복하려면 수시로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선배에게 “행복하니?”라는 질문을 반복해서 받으면서 나는 수시로 행복이란 뭘까 고민했었다. 비록 지금은 불행하지만, 앞으론 행복하게 살아야지, 생각했었다. 행복은 행복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고민하며 재미있게 사는 법을 연구하면서 얻을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당신에게 묻는다. “오늘을 사는 당신, 행복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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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코츠키의 경우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7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지음, 이수연.이득재 옮김 / 들녘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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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으로 가족이 되기도 하지만, 가족은 보통 ‘혼인’과 ‘혈연’으로 맺어진다. 가족의 중심엔 아버지(父)가 있다. 오랫동안 결혼한 여자들에겐 아들을 낳아 대를 이어야 할 과제가 있었다. 여자들의 운명은 남편을 중심으로 한 가족의 운명과 궤를 같이했다.

 

류드밀라 울리츠카야의 『쿠코츠키의 경우』는 2차 대전 전후와 1960년대 소비에트 시대를 배경으로 쿠코츠키 가족에게 벌어진 사건들을 다룬 소설이다. 조상 대대로 의사인 집안에 태어난 쿠코츠키는 집안 환경의 영향으로 살아있는 생명체 구조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자연스럽게 의사가 되었다. 얼마 전 오르한 파묵의 『제프데트 씨와 아들들』을 읽은 영향과 소설이 박경리 문학상을 탔다는 이유로 쿠코츠키와 아들들의 이야기일 것으로 추측했다. 『쿠코츠키의 경우』의 가족은 우리가 생각하는 가족, 아버지의 피로 이어진 가족이 아니었다.

 

쿠코츠키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자신의 집안보단 신분이 낮은 남자와 재혼한 어머니와 인연을 끊었지만 그는 세 여자와 한집에서 살았다. 산부인과 의사였던 쿠코츠키에겐 ‘내면투시 능력’이 있었다. 그런데 여자들과 관계를 맺으면 그 능력은 사라졌다. 엘레나는 ‘자신의 놀라운 능력을 지켜준 유일한 여자’였다. 그녀가 다시는 아이를 낳지 못할 거라는 사실은 그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쿠코츠키는 엘레나와 엘레나의 딸 타나, 엘레나의 집안일을 돌봤던 바실리사와 함께 살았다.

 

소설의 시대는 아니지만 출산을 장려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국가는 출산을 장려하지만 국민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출산을 꺼린다. 아기의 탄생이 항상 가족의 탄생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에는 어머니의 목숨을 건 사투가 필요하다. 전쟁을 치른 국가들은 출산으로 인구를 채워야 하고, 신을 믿는 자들에게 낙태는 용서받지 못할 죄지만, 가난과 지저분한 환경, 불확실한 미래 앞에 어머니의 선택은 단 하나뿐이다. 쿠코츠키는 낙태를 지지했지만, 엘레나와 바실리사는 쿠코츠키에게 실망했다. 쿠코츠키에겐 한 생명을 지키는 일이었지만 엘레나와 바실리사에겐 한 생명을 죽이는 일이었다.

 

제도사였던 엘레나는 ‘사물의 있는 모습 그 자체를 완벽하게 그릴 수 있다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 엘레나가 타나의 아버지 안톤을 버리고 쿠코츠키를 선택한 것은 완벽한 삶을 그릴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는데 쿠코츠키의 행동은 그녀에게 실망을 주고 ‘당신은 여자가 아니야’라고 말하며 상처를 입혔다. 엘레나에게 낙태를 반대하는 사회구조에서 불법 시술 후유증으로 어머니가 죽은 토마는 가족의 균열을 가져온, 몸과 마음의 불협화음을 만든 대상이었다. 엘레나는 수시로 망각의 순간에 빠졌고 급기에 기억을 잃었다. 이 부분은 판타지로 그려지는데 세상에 나오지 못한 채 사라진 아이들을 위한 작가의 애도로 읽혔다. 엘레나의 기억을 위한 분투로 읽혔다.

 

20년간의 수도원 생활을 통해 그녀가 터득한 것은 인간은 누구에게나 부족한 점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부족함은 육체적인 것일 수도, 지능과 관련된 것일 수도, 또는 양심과 도덕의 부재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부족한 사람이 태반인 안타까운 현실, 과장에서 말하자면 그 현실이 우주의 법칙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는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오히려 그 우주법칙에서 벗어나 비정상일 수 있었다.(134쪽) 

 

시간이 흐르면 잊힌다. 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기억을 잃은 사람들은 같은 불안을 반복해야 한다. 때때로 기억의 재생이 필요한 이유다. 쿠코츠키와 엘레나는 서로의 생각에 동의하진 않더라도 소통하려는 노력이 필요했다. 우린 완벽한 신이 아닌 부족한 인간이기에. 그렇게 부족한 면을 채웠어야 했다.

 

가족에게 쿠코츠키의 피는 흐르지 않았다. 엘레나의 피는 타나로, 타나의 피는 줴나로, 줴나의 피는 줴나의 아들에게로 흘렀다. 소설의 남편(아버지)들은 전통적인 가족에서 인정하지 않았던 아내(딸)들의 삶을 인정했다. 그 결과 생명이 태어나고 삶이 이어질 수 있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사고는 전형적이지 않다. 그들은 아내의 아이를 친자식과 다름없이 사랑하고, 내 아이를 낳고 아내가 될 뻔했던 여자의 애인에게 그 흔한 주먹질도 하지 않았다. 형제가 한 여자와 이중 결혼을 계획하기도 하고 남편과 그 애인에게 아파트를 내주는 여자도 있다. 그들은 질투 본능보다 절제된 감정이 소유자였다.

 

그들은 비현실적인 인물들이었지만 불편한 인물들은 아니었다. 아마도 제대로 된 이성으로는 살 수 없는 시대였지만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끌림에 충실한 삶, 자신의 이성을 지키는 삶을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토마는 자신의 파벨의 후계자라 믿었고 가족 평등을 실천해 이상적인 가족을 만들려고 애썼다. 그녀의 믿음은 착각이었지만, 그녀가 무너지지 않고 자리를 찾은 건 파벨 혹은 파벨 가족 때문이었다. 훗날 그녀의 꿈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쿠코츠키의 경우』는 ‘생의 단절’ 혹은 죽음이 아닌 ‘이어지는 생’을 이야기하는 소설이었다. 가족은 여전히 삶의 뿌리지만 가족이라고 해서 반드시 피로 이어질 필요는 없다. 가족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상적 가족은 일방적인 희생과 존재를 부정하고 싶은 원망이 아닌 각자의 삶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렇게 실천할 수 있다면 이상적 가족은 꿈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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