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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일인자 1~3 세트 - 전3권 (본책 3권 + 가이드북) - 1부 ㅣ 마스터스 오브 로마 1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7월
평점 :
보통 일인자라고 하면 특정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을 뜻한다. 『로마의 일인자』는 『가시나무새』의 콜린 매컬로가 20년 동안 집필한 <마스터 오브 로마> 시리즈 제1부로 여섯 번이나 집정관 자리에 올랐던, 실질적 로마의 일인자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좋은 집안 출신임에도 암울한 과거를 지닌 미스터리한 술라 중심으로 정치가들의 욕망, 그들과 얽힌 여자들의 사랑, 그리고 어떻게든 생을 지켜내려는 하층민들의 분투를 그리고 있다.
우리는 늘 뭔가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왔다. ‘지배’라는 단어는 ‘속박’이라는 단어와 연결되어 떠오르는 까닭에 좋게 다가오진 않는다. 과거엔 신분, 현재는 돈이지만 둘은 늘 상호 협력해 왔다. 과거나 현재 모두 돈과 혈통 한가지만으로 힘을 유지하기 힘들다. 권력자들이 재력가들을 손을 잡는 이유다.
파트리키 귀족 출신 술라는 태생만으론 집정관 자리에 오를 수 있었지만 돈이 없었다. 가난한 그는 어둡고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술라에게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돈이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재력가였지만 고귀하지 않은 혈통이 약점이었다. 신이 한 사람에게 모두를 주지 않은 건 공평하게 싸우라는 뜻일까. 아니면 서로 합심하라는 뜻일까. 유서 깊은 집안으로 막강한 정치력을 가졌으나 돈이 없는 율리시스 카이사르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에게 큰 딸 율리아와의 정략결혼 제안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로선 이미 결혼했고 율리아보다 서른 살이나 많았다 하더라도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율리아는 25년이나 결혼 생활을 하는 동안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던 본부인 그라니아와 달리 모든 면에서 만족스러웠다. 결혼 생활 내내 남편에게 최선을 다했음에도 버려진 그라니아에게 연민이 든다. 어쩌겠는가. 상인의 딸로 태어난 것을 원망할 수밖에.
율리시스 카이사르의 둘째 딸 율릴라는 슐라를 사랑했다. 그녀는 풀잎관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풀잎관을 만들어 그의 머리에 씌어주었다. 풀잎관은 ‘흔한 풀잎으로 만든 소박한 관이지만, 말 그대로 개인의 용맹함과 결단력으로 군단이나 군대 전체를 구한 사람에게 주는 것(2권, 105쪽)’이다. 수많은 훈장을 받은 가이우스 마리우스 역시 풀잎관은 받지 못했다. <마스터스 오브 로마> 제2부의 제목은 『풀잎관』이다. 아마도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시대가 끝나고 슐라의 시대가 시작될 것이다. 언니 율리아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에게 이상적인 배우자였지만 율릴라는 슐라에게 이상적인 배우자가 아니었다. 너무 뜨거운 사랑은 자신이 먼저 데인다. 율릴라처럼.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7번이나 로마의 집정관이 된다는 예언을 들었고 『로마의 일인자』에선 6번 집정관이 된 것까지 나온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이뤘다. 예언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당신은 뭔가 될 거라는 누군가의 말이 그 사람을 그 자리에 올려놓은 것을 보며 말의 위대함을 생각한다. 물론 그 반대는...... 생각조차 두렵다.
결혼에 자신의 의지가 반영된 율리아, 율릴라와 달리 리비아는 오빠 드루시스의 강압으로 죽은 아버지가 남편감으로 원했던 퀸투스 세르빌리우스와 결혼했다. 드루시스는 리비아의 행복이 자신의 기쁨이라고 했지만, 물론 사실이었겠지만 그에게 동생보다 가문의 명예와 지위가 중요했다. 가문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남매가 엇갈려 결혼하는 걸 보며 무언가를 지키려면 다른 것은 포기해야 한다는 말을 떠올린다.
의지와 상관없이 어떤 상황에 부닥쳤을 때 그 상황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삶을 고립시켜선 안 된다. 어떤 경우 자유를 갖는 일은 생각만큼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리비아는 남편 퀸투스에게 돈이 없어 절대 집 밖으로 못 나간다고 하자, 그는 돈을 줄 테니 언제든 나가고 싶을 때 나가고 사고 싶을 때 사라고 했다. 아버지의 권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는 오빠의 권위 아래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살았던 리비아는 지배받는 삶에 익숙해지면 ‘시도’라는 단어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녀의 삶을 지배했던 건 그녀의 가족이 아닌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리비아가 더 빨리 남편에게 말했더라면, 아니 더 늦지 않는 것이 다행이다.
리비아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한 결혼이었지만 오빠의 선택은 옳았다. 그녀는 4년 동안 그리워했던 남자의 진실, 천한 혈통에 노예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원망했다. 바깥세상을 몰랐던 그녀는 책을 통해 판타지 속 남자를 만들고 이상형이라 착각했다. 우리는 일정 부분 순수하고 일정 부분 속물이다. 그녀처럼. 나의 의지든 타인의 강압이든 제대로 보지 않고 듣지 않는 것, 틀에 갇혀 제멋대로 상상하는 일은 위험하다.
로마의 일인자는 분명 가이우스 마리우스다. 천한 출신이었으나 그는 6번의 집정관 자리에 올랐다. 그중 세 번은 로마에 없는 상황에서 부재중 선거로 뽑힌 것이다. 그에겐 운명과 돈, 야망이 있었다. 그리고 전쟁 내내 함께 하고 전쟁의 승리를 위해 게르만족인 척하며 위험을 감수한 술라를 비롯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목숨을 잃을 것을 알면서도 명령 때문에 전쟁에 나갈 수밖에 없는 하층민들의 삶을 외면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가 로마의 일인자가 된 진짜 이유가 아닐까.
자신이 살아왔던 우아한 삶과는 다른 삶을 선택한, 수부라 지구의 거친 인간들을 상대하며 사는 아우렐리아를 보며 처음엔 좀 멋있다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니다. 그녀의 시아버지는 로마에서 막강한 정치력을 가진 가이우스 율리우스였으니까. 예전에 힘을 갖는 일이 중요한지 몰랐다. 거대한 힘 앞에 쓰러지는 사람들을 봤지만 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갈수록 느낀다. 힘과 싸우려면 더 큰 힘을 가져야 한다고.
“노력만큼 가치 있는 일은 원래 없어요! 그런 경우는 절대 없죠! 우리 중 누구도 상 때문에 노력하지는 않아요. 우리가 마구를 차고 경기장 일곱 바퀴를 돌려고 나설 때 경쟁 상대는 우리 자신입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 같은 사람에게 달리 어떤 도전자가 있겠습니까? 그는 경기장에서 가장 뛰어난 말인데요. 그래서 그는 자신과 싸우며 달리는 겁니다. 나 역시 마찬가집니다. 나는 할 수 있고, 해내고 말 거라는 생각으로 달리지요! 하지만 그것은 오직 나에게만 진정으로 의미가 있어요.” - (『로마의 일인자3』, 451쪽)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이 말을 들었다면 좋아했을 것이다. 술라에게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로마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술라를 만난 것에 대해 행운이라고 생각했는데 술라가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만난 것 역시 행운이었다. 물론 이들이 영원한 동반자가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건 역사에서, 그리고 현재의 정치판에서 많이 봐오지 않았던가.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이다. 로마의 민중들은 전쟁과 기근으로 인한 식량 부족으로 죽음을 맞지만, 권력자들은 자신의 재산을 늘리고 자리를 지키는 것만이 중요했다. 그들에게 민중은 자신들의 재산을 늘려주고 지켜주기 위해 존재하는 대상일 뿐이다. 우리의 현실 역시 이들과 다르지 않다.
한 계절이 끝나가고 있다. 추위가 풀리니 마음도 느슨해진다. 마음이 편해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제 TV프로 <꽃보다 청춘-아프리카>엔 혼자 차를 렌트해 아프리카를 여행하는 외국인 여자가 나왔다. 출연자인 류준열이 그녀를 보고 멋지다고 하자 그녀는 'yolo : You only live once)라고 적어 주었다. 숱한 삶의 배반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술라의 말처럼 오직 자신을 믿고 달리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 끝에 뭐가 있든 간에. 인생은 한 번뿐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