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의 밥도둑
황석영 지음 / 교유서가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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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지, 간장에 담근 무장아찌와 깻잎, 김이 차지했던 식탁은 봄 내음을 간직한 봄동 겉절이와 달래무침, 바다향이 가득한 톳무침, 감태무침, 파래무침 등속이 번갈아 오른다. 덕분에 잃었던 미각이 톡톡 돌아왔다.

 

『황석영의 밥도둑』은 『노티를 꼭 한 점만 먹고 싶구나』(디자인하우스, 2001)의 개정판이다. “노티를 꼭 한 점만 먹고 싶구나.”(90쪽)는 황석영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하신 말이다. 황석영에 의하면 노티는 ‘약과 비슷한 것도 같고 모양은 지짐이(녹두 빈대떡)와 비슷’(95쪽)한 음식이다.

 

요즈음은 그때처럼 구수한 기장쌀을 구하기 힘들 테지만 어쨌거나 찰기장을 빻아다 시루에 찐다. 엿기름가루에 물을 내려 우려낸다. 익은 기장쌀가루와 엿기름가루를 섞고는 우려낸 엿기름물을 붓고, 소금 간을 하고 참기름 넣어서 반죽을 한다. 반죽을 아랫목에 한두 시간 덮어두어 삭힌 다음에 손바닥만한 크기로 만들어 약한 불에 지져낸다. 이것을 식혀서 꿀에 잰 것을 항아리에 차곡차곡 넣어 장독대에 내다 놓고 먹는다.(97~98쪽)

 

노티는 정성이 많이 들어간 음식으로 보인다. 먹고 싶어도 만들어 달라고 말하기 미안하고 만들어주고 싶어도 선뜻 만들겠다고 나서기 어려워 보인다. 노티는 황석영의 어머니가 어린 시절 고향에서 형제들과 함께 먹은 음식이자 황석영도 명절 때 외가댁 식구들과 먹은 음식이었다. 황석영 어머니가 말한 “노티를 꼭 한 점만 먹고 싶구나.”는 이제는 돌아갈 수 그 시절, 가족이 함께 모여 음식을 나누어 먹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의 표현이다.

 

“왜 아버지 같은 사람과 결혼했어요?”

그녀의 어머니가 답한다. 그이가 누구라는 건 동네에서 다들 알구 있었다. 시내로 나가는 버스를 타고 가는데 앞자리에 그이가 앉아있었어. 검은 물 들인 군복 작업복을 입고 있었는데 목덜미 아래로 비듬이 하얗게 떨어져 있더구나. 나는 그 비듬을 털어주고 싶었어.“

그것은 살가루이기도 하고 뼛가루 또는 눈이었는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말한다.(77쪽)

 

삶이 고통이면 타인의 아픔을 들여다보기 힘들다. ‘함께’ 보다는 ‘일단 나부터 살고’라는 사고가 앞선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다 같이 가난했던 시절, 내 아픔만큼 타인의 아픔도 고통이었던 시절 말이다. 그때 우리는 함께 고통을 견뎠다.

 

돼지껍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몇 점 먹는 정도다. 어느 날, 외출하신 아버지는 돼지껍데기를 들고 오셨다. 정육점을 운영하는 아들을 둔 아버지 친구분이 주셨다고 하면서. 어머니가 난감해하셔서 인터넷에서 손질법을 찾아 다듬었다. 마늘, 생강, 소주, 월계수 잎을 넣고 삶은 후 건져보니 처음 봤을 때보다 상태가 더 나빴다. 솟은 털과 두툼한 기름이 가득했다. 면도칼로 털을 깎고 기름을 제거하고 씻어내길 반복했다. 손질하는 내내 생각했다. 차라리 사 먹는 게 낫겠다고.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고춧가루 팍팍 넣어 매콤하게 볶았다. 아버지와 어머니, 나는 소주와 곁들여 돼지껍데기를 먹었다. 아버지는 맛있다고 하시면서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돼지껍데기라고 하셨다. 처음 알았다.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돼지껍데기라는 걸. 평생을 건설 현장에서 일했던 아버지는 돼지껍데기에 소주 한 잔으로 하루의 피곤을 푸셨을 것이다. 연로한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는 일은 서글프다. 돼지껍데기는 언젠가 그리움의 음식이 될 것이다. 먹먹함이 밀려온다.

 

전라도 광주에 사는 친구가 있다. 결혼을 하고 몇 번의 이사 끝에 광주에 정착했다. 내가 사는 지역과 거리가 멀어 만나기 쉽지 않다. 다행히 친정집이 내가 사는 곳과 같아 친정집에 오는 날이면 시간을 내어 만난다. 그녀를 만나 맥주에 치킨을 먹었다. ‘장에 갔던 가장이 어스름한 달밤에 막걸리 한잔으로 거나해져서 타령 한소리 읊조리며 영을 넘어올 제 새끼줄로 꿰어 들고 오던 것이 간고등어 한 손이다.(126쪽)’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내 아버지가 술 한 잔 걸치고 들고 오신 건 치킨, 아니 통닭이다. 많은 치킨을 먹었지만 어린 시절 먹었던 통닭과 맛이 같다고 느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시간이 흐르니 정말 그 맛이었을까 싶다. 친구와의 시간이 즐거워 내가 맛을 착각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의 맛은 언제 누구와 먹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던가. 

 

어느 먼 산골이나 바닷가 어촌에서 두 사람이 먹던 음식의 맛은, 지금 아무데서나 다시 찾아 먹을 수 있는 흔한 먹을거리라라 할지라도 다시는 되살려낼 수가 없다. 또한 그녀가 가끔씩 콧노래를 부르며 아침을 준비하던 달그락거리는 그릇 부딪히는 소리와, 식탁 맞은편에서 따뜻한 눈빛으로 이편을 건너다보면 날의 맛을 어디서 되살려낼 것인가.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는 물처럼 지나간 시간은 자취도 없지만 그 감각만은 생생하다.(48-49쪽)

 

『황석영의 밥도둑』을 읽으며 우리 음식의 다양함을 봤다. 유럽의 음식을 보며 세상에는 안 먹어 본 음식이 참 많구나 생각했다. 입안에서 침이 고였다. 같은 재료로 같은 사람이 만들어도 같은 맛이 나지 않는다. 맛은 그리움이다. 음식의 맛은 즐겁던 또는 슬펐던 함께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 나누어 먹던 음식을 시간이 지나 떠올렸을 때 가장 맛있다.

 

운 좋게(?) 아직 어머니의 밥을 먹는다. 각자의 가정이 있는 언니나 동생들은 엄마가 만든 만두나 간장게장, 감자탕이 그 어떤 식당에서 먹는 것보다 맛있다는데, 난 잘 모르겠다. 아마도 그리움이 아닌 일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훗날 덜 그리워하려면 열심히, 감사하게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더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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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 스님의 행복 - 행복해지고 싶지만 길을 몰라 헤매는 당신에게
법륜 지음, 최승미 그림 / 나무의마음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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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니?”

그것은 선배의 인사말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안녕!”이나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했을 때 선배는 “행복하니?”라고 인사했었다. 언제 봐도 평온한 얼굴인 선배를 보며 전직이 신부님이 아닐까 싶었다. 훗날, 선배가 어둠의 세계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쪽 다리를 저는 건 그곳을 나오면서 두들겨 맞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때 알았다. 다른 사람에겐 시시한 삶이 누군가에게 죽음을 각오해야 가질 수 있는 삶이라는 걸. 그것은 내가 스무 살에 만난 삶의 비밀이었다. 잊고 있었다. 행복하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그 용기는 내 마음에서 나온다는 걸.

 

삶이 만만했던 시간이 지나고 지금은 ‘일말의 가능성’과 ‘회복 불가능성’ 사이에 발 하나씩 올려놓은 채 어제는 왼쪽, 오늘은 오른쪽으로 흔들리며 살고 있다. 법륜스님은 말씀하셨다. 마음의 습관을 고치고 주어진 조건 안에서 최선을 다하라고. 무심결에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누가 그걸 모르나”였다. 최선을 다했으면 결과는 상관없다고 위로하지만 허무한 결과는 삶의 의욕을 떨어뜨린다.

 

횡단보도에서 파란 불이 조금 남으면 뛰어 건너지 않고 다음 파란 불을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어느 날, 파란 불이 조금 남아 평소처럼 건너지 않고 다시 파란 불이 켜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빨간 불 그대로였다. 서둘러 가야 하는 길이 아님에도 조바심이 일었다. 실제 빨간 불의 시간은 내 생각만큼 길지 않았을 것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살아갈 시간이 살아온 시간보다 짧다는 것이다. 조급했던 청춘엔 나이를 먹으면 삶의 여유가 있을 줄 알았다. 막상 어른이 되니 청춘의 조급함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 세상 모든 존재는 부족한 것도 아니고 넘치는 것도 아니에요. 존재는 다만 존재일 뿐이에요.

자신을 너무 위대하게 생각하니까 자기 자신이 초라하게 보여 위축되는 거예요. 사람이나 동물이나 풀이나 그냥 한 존재일 뿐입니다. 인간도 산에 사는 다람쥐나 토기와 별반 다르지 않은 하나의 동물입니다. 동물 중에서 의식 작용이 조금 낫다 하는 정도예요.

산에 사는 다람쥐나 토끼도 괴로워하지 않는데, 사람이 사는 게 힘들다고 괴로워하는 건 분명 잘못된 겁니다. 사람이 얼마나 속박을 받고 살고 있으면 날아가는 새를 부러워하겠어요.

우리는 모두 풀 같고 개미 같은 존재입니다. 미미하지만 사실은 소중한 존재입니다. 이것을 탁 깨달아버리면 남이 나를 어떻게 보든 신경 안 쓰고 편안히 살 수 있으며, 남의 인생에도 간섭하지 않게 됩니다.(35쪽)

 

산에 사는 다람쥐나 토끼도 괴로워하지 않는데, 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도 삶의 고단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괴롭지 않다는 건 인간의 시선일 뿐이다. 인간이 새를 부러워하는 건 일시적인 기분이지 지속적인 마음이 아니다. '이 세상 모든 존재는 부족한 것도 아니고 넘치는 것도 아니에요. 존재는 다만 존재일 뿐이에요.'라는 말은 부족한 능력으로 위축된 나를 위로해주었다. 삶이 고통스러운 건 나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법륜 스님은 욕심과 원은 다르다고 하셨다.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괴로운 마음에 시달리면 그것은 욕심’이라고 하셨다.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태평하기는 어렵다. 괴로움이란 녀석은 내 머릿속에 터를 잡고 나갈 내색을 하지 않는다. 내 마음은 너무 약해 그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이다.

 

마음을 바꿔도 불행한 상황이 확 달라지진 않는다. 영화에는 주인공 외에 또 다른 주인공과 조연, 엑스트라가 있다. 그들의 부딪힘은 한 편의 영화를 완성한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의 삶은 자신과 타인의 부딪힘으로 만들어진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법륜 스님의 말씀처럼 마음을 내려놓은 일은 필요하다. 뉴스를 보면 세상엔 나쁜 사람들만 있는 것 같지만, 실제는 선한 사람이 훨씬 많다. 나부터 마음을 내려놓다 보면 불행한 상황은 나아질 것이다.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어떤 일을 이루려면 온 힘과 정성을 다해야 한다. 중요한 건 누군가의 눈물을 발판으로 이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1월은 새해가 시작하는 달이지만 3월은 새로운 일상이 시작하는 달이다. 『법륜 스님의 행복』은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흔들리는 마음을 잡고 다시 꿈을 꾸기에 적당한 책이 아닐까 싶다. ‘일말의 가능성’과 ‘회복 불가능성’ 사이에서 전자에 몸의 무게를 옮긴다.

 

“행복하니?”

이제 선배는 묻지 않지만, 답한다. “조금은요. 내일은 더 행복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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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일인자 1~3 세트 - 전3권 (본책 3권 + 가이드북) - 1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1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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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일인자라고 하면 특정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을 뜻한다. 『로마의 일인자』는 『가시나무새』의 콜린 매컬로가 20년 동안 집필한 <마스터 오브 로마> 시리즈 제1부로 여섯 번이나 집정관 자리에 올랐던, 실질적 로마의 일인자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좋은 집안 출신임에도 암울한 과거를 지닌 미스터리한 술라 중심으로 정치가들의 욕망, 그들과 얽힌 여자들의 사랑, 그리고 어떻게든 생을 지켜내려는 하층민들의 분투를 그리고 있다.

 

우리는 늘 뭔가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왔다. ‘지배’라는 단어는 ‘속박’이라는 단어와 연결되어 떠오르는 까닭에 좋게 다가오진 않는다. 과거엔 신분, 현재는 돈이지만 둘은 늘 상호 협력해 왔다. 과거나 현재 모두 돈과 혈통 한가지만으로 힘을 유지하기 힘들다. 권력자들이 재력가들을 손을 잡는 이유다.

 

파트리키 귀족 출신 술라는 태생만으론 집정관 자리에 오를 수 있었지만 돈이 없었다. 가난한 그는 어둡고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술라에게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돈이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재력가였지만 고귀하지 않은 혈통이 약점이었다. 신이 한 사람에게 모두를 주지 않은 건 공평하게 싸우라는 뜻일까. 아니면 서로 합심하라는 뜻일까. 유서 깊은 집안으로 막강한 정치력을 가졌으나 돈이 없는 율리시스 카이사르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에게 큰 딸 율리아와의 정략결혼 제안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로선 이미 결혼했고 율리아보다 서른 살이나 많았다 하더라도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율리아는 25년이나 결혼 생활을 하는 동안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던 본부인 그라니아와 달리 모든 면에서 만족스러웠다. 결혼 생활 내내 남편에게 최선을 다했음에도 버려진 그라니아에게 연민이 든다. 어쩌겠는가. 상인의 딸로 태어난 것을 원망할 수밖에.

 

율리시스 카이사르의 둘째 딸 율릴라는 슐라를 사랑했다. 그녀는 풀잎관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풀잎관을 만들어 그의 머리에 씌어주었다. 풀잎관은 ‘흔한 풀잎으로 만든 소박한 관이지만, 말 그대로 개인의 용맹함과 결단력으로 군단이나 군대 전체를 구한 사람에게 주는 것(2권, 105쪽)’이다. 수많은 훈장을 받은 가이우스 마리우스 역시 풀잎관은 받지 못했다. <마스터스 오브 로마> 제2부의 제목은 『풀잎관』이다. 아마도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시대가 끝나고 슐라의 시대가 시작될 것이다. 언니 율리아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에게 이상적인 배우자였지만 율릴라는 슐라에게 이상적인 배우자가 아니었다. 너무 뜨거운 사랑은 자신이 먼저 데인다. 율릴라처럼.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7번이나 로마의 집정관이 된다는 예언을 들었고 『로마의 일인자』에선 6번 집정관이 된 것까지 나온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이뤘다. 예언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당신은 뭔가 될 거라는 누군가의 말이 그 사람을 그 자리에 올려놓은 것을 보며 말의 위대함을 생각한다. 물론 그 반대는...... 생각조차 두렵다.

 

결혼에 자신의 의지가 반영된 율리아, 율릴라와 달리 리비아는 오빠 드루시스의 강압으로 죽은 아버지가 남편감으로 원했던 퀸투스 세르빌리우스와 결혼했다. 드루시스는 리비아의 행복이 자신의 기쁨이라고 했지만, 물론 사실이었겠지만 그에게 동생보다 가문의 명예와 지위가 중요했다. 가문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남매가 엇갈려 결혼하는 걸 보며 무언가를 지키려면 다른 것은 포기해야 한다는 말을 떠올린다.

 

의지와 상관없이 어떤 상황에 부닥쳤을 때 그 상황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삶을 고립시켜선 안 된다. 어떤 경우 자유를 갖는 일은 생각만큼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리비아는 남편 퀸투스에게 돈이 없어 절대 집 밖으로 못 나간다고 하자, 그는 돈을 줄 테니 언제든 나가고 싶을 때 나가고 사고 싶을 때 사라고 했다. 아버지의 권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는 오빠의 권위 아래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살았던 리비아는 지배받는 삶에 익숙해지면 ‘시도’라는 단어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녀의 삶을 지배했던 건 그녀의 가족이 아닌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리비아가 더 빨리 남편에게 말했더라면, 아니 더 늦지 않는 것이 다행이다.

 

리비아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한 결혼이었지만 오빠의 선택은 옳았다. 그녀는 4년 동안 그리워했던 남자의 진실, 천한 혈통에 노예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원망했다. 바깥세상을 몰랐던 그녀는 책을 통해 판타지 속 남자를 만들고 이상형이라 착각했다. 우리는 일정 부분 순수하고 일정 부분 속물이다. 그녀처럼. 나의 의지든 타인의 강압이든 제대로 보지 않고 듣지 않는 것, 틀에 갇혀 제멋대로 상상하는 일은 위험하다.

 

로마의 일인자는 분명 가이우스 마리우스다. 천한 출신이었으나 그는 6번의 집정관 자리에 올랐다. 그중 세 번은 로마에 없는 상황에서 부재중 선거로 뽑힌 것이다. 그에겐 운명과 돈, 야망이 있었다. 그리고 전쟁 내내 함께 하고 전쟁의 승리를 위해 게르만족인 척하며 위험을 감수한 술라를 비롯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목숨을 잃을 것을 알면서도 명령 때문에 전쟁에 나갈 수밖에 없는 하층민들의 삶을 외면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가 로마의 일인자가 된 진짜 이유가 아닐까.

 

자신이 살아왔던 우아한 삶과는 다른 삶을 선택한, 수부라 지구의 거친 인간들을 상대하며 사는 아우렐리아를 보며 처음엔 좀 멋있다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니다. 그녀의 시아버지는 로마에서 막강한 정치력을 가진 가이우스 율리우스였으니까. 예전에 힘을 갖는 일이 중요한지 몰랐다. 거대한 힘 앞에 쓰러지는 사람들을 봤지만 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갈수록 느낀다. 힘과 싸우려면 더 큰 힘을 가져야 한다고.

 

“노력만큼 가치 있는 일은 원래 없어요! 그런 경우는 절대 없죠! 우리 중 누구도 상 때문에 노력하지는 않아요. 우리가 마구를 차고 경기장 일곱 바퀴를 돌려고 나설 때 경쟁 상대는 우리 자신입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 같은 사람에게 달리 어떤 도전자가 있겠습니까? 그는 경기장에서 가장 뛰어난 말인데요. 그래서 그는 자신과 싸우며 달리는 겁니다. 나 역시 마찬가집니다. 나는 할 수 있고, 해내고 말 거라는 생각으로 달리지요! 하지만 그것은 오직 나에게만 진정으로 의미가 있어요.” - (『로마의 일인자3』, 451쪽)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이 말을 들었다면 좋아했을 것이다. 술라에게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로마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술라를 만난 것에 대해 행운이라고 생각했는데 술라가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만난 것 역시 행운이었다. 물론 이들이 영원한 동반자가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건 역사에서, 그리고 현재의 정치판에서 많이 봐오지 않았던가.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이다. 로마의 민중들은 전쟁과 기근으로 인한 식량 부족으로 죽음을 맞지만, 권력자들은 자신의 재산을 늘리고 자리를 지키는 것만이 중요했다. 그들에게 민중은 자신들의 재산을 늘려주고 지켜주기 위해 존재하는 대상일 뿐이다. 우리의 현실 역시 이들과 다르지 않다.

 

한 계절이 끝나가고 있다. 추위가 풀리니 마음도 느슨해진다. 마음이 편해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제 TV프로 <꽃보다 청춘-아프리카>엔 혼자 차를 렌트해 아프리카를 여행하는 외국인 여자가 나왔다. 출연자인 류준열이 그녀를 보고 멋지다고 하자 그녀는 'yolo : You only live once)라고 적어 주었다. 숱한 삶의 배반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술라의 말처럼 오직 자신을 믿고 달리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 끝에 뭐가 있든 간에. 인생은 한 번뿐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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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생각과의 대화 - 내 영혼에 조용한 기쁨을 선사해준
이하준 지음 / 책읽는수요일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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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는 것들은 생성과 소멸을 겪는다. 책도 마찬가지다. 어떤 책은 소멸의 시간을 아주 오래 연장한다.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 책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책은 직사각형 모양의 종이로 만든 책이 아닌 글로 표현된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작가의 생각이다.

 

고전은 오랜 시간 독자들이 찾아 읽는 책이다. 변화가 많은 세상에서 오랜 시간 살아남았다는 건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뭉클한 무언가가 있었다는 뜻이다. 사실 고전 읽기는 어렵다. 작가가 살았던 시대와 삶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충실한 번역도 중요하다. 같은 책이라도 번역자에 따라 어떤 책은 쉽게, 어떤 책은 난해하게 읽힌다. 그나마 쉽게 고전을 접하는 방법으론 인문학자들이 고전을 읽고 해석한 책들을 읽는 방법이 있다. 이하준 교수의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도 그런 책 중 하나다.   

 

저자는 고전 읽기는 ‘언제나 내게 멈춤과 긴 호흡, 그리고 다시 보기라는 훌륭한 처방책을 내려주었다(7쪽, 프롤로그)’라고 했다. 내게도 다르지 않다. 계획을 잘 짜도 실행까지는 시간이 걸려 힘이 드는데 예상 못 한 삶의 간계들이 툭툭 튀어나와 괴롭힌다. 그럴 때 다 던져 버리고 도망가고 싶다. 고전을 읽는다고 삶의 정답을 찾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이하준은 고전 읽기에 대해 ‘오래된 생각과 나의 생각 사이의 대화’(12쪽, 프롤로그)라고 했다. 고전 읽기는 생각을 확장해 해답을 찾아가도록 이끌어준다 러셀은 ‘자신의 상태와 상황을 즐기면서 해야 할 일을 하라’(198쪽)고 했다. 어차피 겪어야 할 삶의 간계들이라면 마음을 편히 먹고 겪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타인은 불편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삶의 중심은 나이지 그들이 아니라는 말한다. 좀 미안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번 보고 말 사람이면 내 의견을 분명히 피력하겠지만 가까운 사이인 경우엔 쉽지 않다. 곧장 서운하다는 말이 돌아올 테니까. 침묵의 시간이 길어진다. 어둠에 숨는 시간이 길어진다. 나는 자율적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책에 실린 타인 지향형 인간의 심리적 특성 설문(178~179쪽)을 표시해 보니 나는 타인 지향형 삶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나는 자율적 인간이고 싶은(어처면 자율적 인간인 척 하는)타인 지향형 인간이었다. 쇼펜하우어의 고독은 외로움이 아니다. 인간은 관계를 통해 살아가는 존재지만 가끔은 관계를 정지하고 자신만의 시간으로 들어가 오롯한 자신을 만나야 한다. 외로움이 시간이 아니라 고독의 시간이 필요하다.

 

어른은 과거를 사랑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멈춘 사람이며, 형이상학적 이념과 기독교적 세계관에 지배받고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위버멘쉬의 관점에서는 자신이 가르치고자 하는 자들은 잠들어 있는 어른 전체, 그러니까 인류 전체를 의미한다. 즉 ‘사람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개별적 인간 전체이다. 결국 초인은 기존의 모든 가치를 전복시킴으로써 잠에서 깨어난 사람, 자기 자신을 극복한 사람, 자기 삶을 신이나 종교 이념의 도움 없이 오직 스스로 새롭게 창조한 사람인 셈이다. 니체는 누구나 그렇게 되어야 하며, 그렇게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나와 당신도 초인이 될 수 있으며, 그 과정은 삶의 연속적인 과정처럼 ‘과정의 연속’이다.(34-35쪽)

 

20대의 나는 새로운 일에 시도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지금의 나는 그때만큼 용기가 없다. 하기도 전부터 실패를 생각하기도 한다. 직접 겪은 경험, 옆에서 본 타인의 경험은 시도하지 않고 미리 실패를 재단하는, 시간 낭비라고 판단하는 안 좋은 능력을 주었다. 니체는 니체의 ‘초인’을 꿈꿨던 나는 ‘최후의 인간’이 되어 있었다. 니체의 초인을 만나며 다시는 정체된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옆길에 샜던 걸음을 돌려 다시 걸을 준비를 한다. 여전히 앞은 안개로 뒤덮여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걸어보리라 다짐한다. 걸으면서 필요한 것은 데카르트가 말한 방법론적 의심일 것이다.

 

한때 나는 먹고사는 것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먹고사는 일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철없을 때 얘기다. 생존은 어떤 문제들보다 우선한다. 그렇지만 삶을 고민하지 않는다면, 행동하지 않는다면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 삶에 대한 고민은 인간의 특권이다. 이하준은 프로이트가 우리에게 던진 말은 “당신 생이 끝나는 날까지 당신 자신의 행복을 위해 분투해야 한다.”(269쪽)는 것이라고 했다. 세상엔 공짜는 없다. 행운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 뚝 떨어지지 않는다. 행복도 행복해지고 싶고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만 돌아온다.

 

관계를 맺으며 사는 일은 피곤하지만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삶에 관계 유지는 중요하지만 때론 고독(孤獨)의 시간이 필요하다. 웃는 얼굴이라는 가면에 가려진, 두꺼운 화장에 가려진 진정한 나를 만나기 위해선 그렇다. 또한 고독(孤讀), 홀로 책 읽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일은 미혹되는 삶에 균형을 잡아준다.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를 읽는 동안 책에 대한 생각 말고는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아서 좋았다. 다른 고전들도 좋지만 니체의 책들은 제대로 읽어보고 싶다. 오래된 생각과 대화할 시간을 늘여가고 싶다. 그것은 결국 좀 더 성숙한 내가 되는 길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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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없이 걸었다 - 뮌스터 걸어본다 5
허수경 지음 / 난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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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스터는 독일의 오래된 도시 이름이다. 난다의 ‘걸어본다’ 시리즈 5번째는 허수경 시인의 뮌스터 이야기, 『너 없이 걸었다』이다. 뮌스터(Münster)는 독일어로 ‘대성당’이라는 뜻이지만 겨울을 살고 있기 때문인지, 한 해의 마지막 달을 살고 있기 때문인지 ‘겨울(winter)’과 ‘괴물(monster)’이 떠올랐다.

 

시인의 안내를 받아 눈으로 걷고 입으로 걸었다. 느릿느릿. 쉬엄쉬엄. 여행자에게 낯선 도시는 펑펑 내리는 첫눈과 같다. 설렘과 동시에 두려움이 느껴진다. 뮌스터는 처음 알게 된 도시인데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도시 같았다. 아마도 그건 뮌스터가 아픈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 도시이기 때문일 것이다. 위압감이 드는 고층건물들이 즐비한 도시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익숙하게 느낀 또 하나는 뮌스터에 대한 시인의 깊은 애정이 전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이 들려준 뮌스터는 깊은 슬픔과 투박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도시였다.

 

사는 게 너무 추하다, 서럽다 싶을 때 트라클을 읽으면서 걸어보는 게 어떨는지. 그의 영혼을 우리가 위로하지 않는다면 누가 위로할까. 그는, 혹은 그의 시들은 우리를 참 많이도 챙겨주었다. 우리가 사는 도시를 우리가 위로하지 않는다면 누가 위로할까. 그는, 혹은 그의 시들은 우리를 참 많이도 챙겨주었다. 우리가 사는 도시를 우리가 위로하지 않는다면 누가 위로할까. 미우나 고우나 우리의 도시들은 우리를 안아주지 않았던가. 뮌스터는 그대 없이 존재하지 않는 도시였다. 이 도시를 그대 없이 참 오랫동안 걸어왔다. 모든 평범한 이 세계의 도시, 혹은 저 하늘의 별들이 걷는 것처럼.(33쪽)

 

지금 사는 도시에서 삶의 대부분을 보냈다. 도시는 나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했다. 이곳에선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어느 곳을 걸어도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는 사실은 안도가 된다. 도시는 처음과 많이 달라졌지만, 사는 동네는 처음과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많이 달라졌다. 하천은 사라졌고 전철역이 생겼다. 개발을 갈망하는 목소리에 누군가는 떠났고 어떤 것들은 사라졌다. 언젠가 이 도시는 나에게 기억을 의심하게 할 것이다. 추억은 땅 아래로 묻힐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우울해진다. 사라지는 것은 언제나 슬프다. 그 자리에 누군가의 기쁨이 터를 잡을지라도.

 

좋은 일을 기억하는 것은 따뜻하지만 나쁜 것을 기억하는 것은 새록새록 아프다. 그 아픔을 견뎌내어야만 하는 것도 기억의 일이다. 기억하지 않고 묻어버린 공동체의 과거는 언젠가는 그 공동체에게 비수를 들이댄다.(86쪽)

 

뮌스터는 어느 시절 독일 전체가 그랬던 것처럼 나치 정권의 지배를 받았다. 괴물의 시대였다. 건물은 파괴되고 사람들은 사라졌다. 남겨진 사람들은 자신을 잃고 살았다. 폐허의 시간을 살았다. 뮌스터는 그 시절을, 그들을 잊지 않았다. 이름과 태어난 해, 사망한 해, 끌려간 장소를 기록한 거리 바닥에 박힌 ‘걸림돌’이 그 증거다. 독일어로 뎅크말과 만말은 각각 긍정적인 의미로 무언가를 기리는 기념물과 부정적인 사건을 경고하는 기념물을 뜻한다고 한다. 긍정적인 과거도, 부정적인 과거도 역사다. 역사는 삶의 흔적들이 쌓여 이어지는 것이지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희생된 이들에게 잊히는 것은 무자비한 일이다. 잊음을 독촉하는 사회가 비인간적인 것은 이 때문이다. 누군가의 억울한 일을 잊어버리면서 인간은 짐승이 되어간다. 그 짐승은 인간을 다시 억울한 구석으로 몰고 가면서도 자신이 어떤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고 관찰하려고 한다. 잊음에 저항하는 것은 인간성을 지키려는 최소한의 몸짓이다.(92쪽)

 

허수경 시인 덕에 독일의 작가들을 알게 됐다. 27년이라는 짧은 생을 살다 간 시인 트라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끌려가 아우슈비츠에서 죽음을 맞은 콜마르, 열여덟 나이에 나치에게 죽임을 당한 루마니아 출신의 독일계 소녀 젤마 메르바움 아이징어 등이 그들이다. 인간이 인간성을 지키고 사는 일은 너무도 당연한 일인데 어느 시절 그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는? 그들의 시대보단 양호한데 크게 위안이 되진 않는다.

 

허수경이 안내한 뮌스터는 시시한 내 일상에 고요한 파문을 일으켰다. 시인이 들려준 뮌스터 이야기는 바쁘다는 이유로, 삶이 지친다는 이유로 잊고 있던 것들, 외면했던 것들을 생각하게 했다. 뮌스터를 통해 폐허의 시간을 견디면, 잊지 않으면 아름다운 시간이 온다는 걸 알았다.

 

뮌스터는 내가 사는 도시에서 가려면 15~16시간이 걸린다.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들이 길어지면서 떠나고 싶은 마음을 접었다. 책 표지를 펼치면 뮌스터 산책 코스가 그려진 지도를 만날 수 있다. 이 지도를 들고 뮌스터를 느릿느릿 걷고 싶어졌다. 같이 걸을 ‘너’가 있다면 좋겠지만 혼자 걸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뮌스터라면. 일단은 내가 사는 도시를, 동네를 걸어볼 일이다. 걷는 것은 이 도시를 잊지 않는, 기억하는 한 방법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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