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상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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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에서 움베르토 에코 최후의 걸작이라고 설레발친 것에 무한 불꽃싸다구를 선사하고 싶다. 에코의 명성에 기대어 출판레이싱을 벌리고, 그것 앞에서 비키니를 입고 미소를 짓고 있는 출판사들은 레이싱걸을 닮았다. 레이싱을 보러 간 관객에게 레이싱걸은 무시할 수 없는 촛점이다. 결국 그녀들의 볼륨과 라인에 현혹되어 본말이 물구나무를 서고 만다. 성인남자에게는 자동차와 섹스, 여자에게는 보석과 옷, 아이에게는 과자와 장남감이 원초적 코드로 통하듯이 유명인의 이름값은 책을 구매하는 자들에게 원초적인 구매력 기호로 명령하는 것이다.

 『장미의 이름』이나 『바우돌리노』에서의 편안한 분위기는 『푸코의 진자』나 『전날의 섬』에서는 험악해지고 만다. 이윤기님의 번역이 에코의 난잡함을 더 난해한 방향으로 드높이고 있다면,  이세욱님의 해석과 풀이는 존경스럽기까지 하다는 생각을 우선 해본다. 물론 원서를 가까이 해본적도 없는 사람으로 그것을 비교해가며 들먹이는 것은 더더욱 아니며 단지 문맥의 매끄러움을 찾는 독자의 욕심에서 이윤기님의 분발을 바랄뿐이다. 

만약 이 책을 움베르트 에코의 어린시절의 전기쯤으로 이해한다면 에코의 감성은 일천의 나락으로 추락하고 말 것이다. 목마른 추측 정도가 되겠지만 에코의 능력은 그저 박식함에다 짜집기 능력만이 우수함을 보여주는 글이기 때문이다. 텁텁하고 지리한 문장 사막은 라임오렌지 나무가 살기엔 너무나 척박하고 건조하다. 마치 영화 「헐리우드키드의 생애」가 생각날 정도로 많은 글들의 출전에 혀를 내두를 것이지만, 에코 그 이상의 것은 있지도 않고 앞으로도 또한 그럴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 많은 책들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떤 책보다 나은 책이 되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누구는 에코선생의 책(여자)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깊이에 감탄하여 백주몽을 꾼다. 존경심이라는 추진체에 책으로 된 날개를 가진 에코가 하늘 높이 치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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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의 탄생 (반양장) - 대학 2.0 시대, 내 젊음 업그레이드 프로젝트
이어령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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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고수 아래 무릎을 꿇고 ["존명尊命~!!"] 을 굵고 우렁차게 외쳤다. 하지만 불편부당不偏不黨을 없애고자 가슴 속에 숨겨 두었던 비수를 꺼내어 그를 향해 힘껏 던졌다.
 메타포를 메타포로 설명說明하는 부분部分이나, 역설力說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하는 아전인수我田引水식의 이야기는 억지가 섞인 두찬杜撰 같기도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미 말씀하시고 싶은 이야기의 감(말)의 고삐를 잡고 있는 독자讀者에게 생뚱한 이야기 버전2.0을 다시 들어보라고 하는 것은 해도해도 너무 저렴低廉한 처사處事였다. 
 ["비빔밥은 각각의 반찬飯饌들이 골고루 들어가야 제맛인 것이다."  말씀하시고 싶었던 것은 정녕 이것이 아니었습니까?]
 [비빔밥은 여러가지 맛이 잘 어우러져 있지만, 정갈하지 못한 단점短點이 있습니다. 지나친 인용引用이 박고博高하나 정빈精貧한 느낌을 만들어내는 것을 진실眞實로 몰랐단 말씀이십니까?]
무협고수(武俠高手)가 말했다. [훗~ 크하하하, 형편(形便)없군, 비빔밥이 아닐세. 퓨전!! 퓨전이네!!, 크하하하하~ ]
그 사이 엄지는 검지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강强하게 억압抑壓하고 있었다.  그러나 힘에 부친 엄지가 갑자기 의식意識을 잃자 검지는 급急하게 뛰쳐나가 비수匕首를 축살蹴殺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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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서 일주일을 - 히드로 다이어리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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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껏 규정해본 적이 없는 삭막한 사물事物을 성인에게 쥐어준다면 어떤 것이 머리속에 반짝하고 스위치를 전위前爲하게 될까? 짭짤한지 아닌지의 간을 본 뒤 일반적으로 쓰레기통이겠지만 시야에서 최대한 멀어진 곳으로 이동될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딱히 감흥도 있을 것 같지 않은 공항을 소재로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섬세하고도 간결한 감상과 남다른 시각을 선사한다. 사색의 깊이를 가진 우물에 밀어넣는다든지 감정의 폭풍우에서 피난처를 뺏어버린다든지 하는 고전적인 방법은 아예 글쓰기사전에서 지워버린 것 같다. 가벼운 마음으로 공항으로 들어선 독자는 입장료가 아까울 듯한 불안감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기우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공항에서 7성급 호텔 느낌의 서비스를 받는 것은 더더욱 아닌 것이다. 그는 절제있고 세련된 사색으로 현대와 자본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의 생각들을 어느 한쪽 구석으로 몰아 넣지 않고 교묘하고 절묘한 중간, 이른바 쿨한 느낌에까지 이르게 한다. 그것은 그가 관조자 역할에만 충실함으로써 그것을 보는 것으로 즐기되, 개입하였을 때의 참여와 선택, 책임 등에 따르는 피로를 염두해두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공항의 구조물에 대한 찬사, 동떨어진 발터 벤야민의 정서에 대한 언급, 콩코드룸에 대한 부러움, 영국항공대표 월시의 만남에서의 호의와 또다른 소재에 대한 욕구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과거 신사의 신중함과는 거리가 멀다. 이것은 진정할 수도 없고, 진정하지 않을 수도 없는 포스트 진정성 시대의 아포리아를 넘어선 고급 속물※에 닿지 않을까 측심연測深鉛을 조심스레 던져보게 된다.
※ 김홍중, 2009, 마음의사회학, P.45

지상에 발을 붙이고 살던 인간이 이륙이라는 이벤트를 통해 분리불안을 겪으면서 죽음을 생각하게 되고, 그 가운데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만, 결국 일상으로 돌아오면 그 생각이라는 것도 일상으로 돌아가버린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 다시 여행을 결심하게 되지만, 본질은 여행의 목적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어찌보면 몽타주라기 보다는 콜라주에 가까운 책의 산만은 아담한 사이즈와 일상적인 사진의 입체화, 단순히 공간을 같이하는 인간들의 얕은 내면을 들여다보는 수준의 이야기가 어우러져 출근시간 또는 퇴근시간에도 카이로스적인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음을 환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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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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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렇지만 목요일에는 아들을 위한 이마트 문화센터 수업이 있는 날이다. 아내와 아들을 문화센터 복도로 떠나보내고 남은 시간은 살리기 위해 있는지 죽이기 위해 있는지 모르겠지만 마트 내의 어딘가에서 포지션을 잡아야 한다. 물건을 사러 간 것도, 구경을 하러 간 것도 아니어서 몰입된 시선을 기다리는 진열대의 물품과의 교감도 마뜩하지 않다. 부메랑처럼 다시 나타날 그들은 타원을 그리며 공중을 선회하지 않으므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코너와 코너 사이 충돌의 부재를 목적하며 운전당하는 카트에게도, 소비를 가장한 배회자에게도 가장 소일하기 좋은 장소는 마트 내의 간이서점이다. 단순히 표시를 넘어서는 종이의 집합체는 마트 내의 어떤 코너보다 카트의 긴 휴게시간을, 배회자에게는 시선처리의 정당성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일반서적 코너와 육아서적, 교육서적 코너 중앙에 위치한 나무의자는 등받이를 소유하지 않고서도 오직 소비만을 위해 마련된 장소에 화장실, 수유실, 놀이방과 더불어 그 밖의 어떤 것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기에 충분하다.

정의에 관해서라면 『존롤스의 정의론』은 언제나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1971년에 출간된 이 책은 정의 문제의 종결을 짓지 못했고, 여전히 정의의 문제는 사회, 정치, 철학, 경제학자들을 괴롭히는 난제로서 책으로 포장되고 있다.

이 책의 저자 마이클 샌델 또한 사례 등를 통해 정의의 기준을 설명하고 있지만, 정작 자신의 논리는 책의 마지막 몇 페이지에만 할애하고 있다는 점은 섭섭하기 이를데 없다. 이성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던 고대나 중세에는 신의 말씀 하나로 정보와 문자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었지만, 현대의 문제들은 그림액자 속의 주인공이 그 액자를 들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 합리적 해결도 원만한 해결도 기대하기 어렵다.

사회란 인간이라는 종족의 집단방어체제로서 기능한다는 사실을 반추해보면 일부 또는 개인 희생의 의미는 끝없이 퇴색해버린다. 개개의 인간이 모여 이룬 집단이 사회와 국가이지만, 그것은 개인의 목적과는 배치되게도 별개의 목적으로 활동한다. 실체가 없는 유령처럼 (법인격을 부여했다고는 하지만) 구체적 대상물로서 신뢰하고 감각할 수 없는 대상은 어떤 식의 권력과 강제로서 어떤 식의 희생을 정당화한다.

정의가 때에 따라서 국민과 역사를 업고 텔레비젼에 출연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국민이 심판해야 합니다.", "역사가 심판할 것입니다." 는 서로가 여론이라고 하지만, 언제나 상대방도 똑같은 말들을 한다는 것이다.


저자와 같이 도덕, 신앙, 공동선과 같은 추상에 매달린다는 것은 그것의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복잡다단한 문제들을 해결하는데에는 복잡다단한 기준이 필요한 것이고, 그것을 이론화하는 것은 생각만을 어지럽힐 뿐이다. 또 다른 사례에 대해서 또다른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동안 그 사건은 어떤식의 비정의나 정의로 마무리 될 것이고, 그것을 회상하는 것은 죽은 자들에게 명복을 비는 것만큼 쓸데없는 짓이 될 것이다.

이성과 지식의 한계에 부딪히는 이론가들의 정의는 없다. 정의가 없다는 표현보다는 그들이 말하는 정의가 없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그것은 합리적 기준의 문제라기 보다는 위정자의 도덕적 윤리적 소치에 더 비중이 있다고 보는 것이 편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개인주의와 전체주의, 자유와 평등, 여당과 야당, 자본가와 노동자, 교수(교사)와 학생, 좌익과 우익 정통와 이단 등등 이 모든 대립되는 것에 형평과 정의, 분배를 문제 삼지만,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만큼 온건할 수는 없다.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던가, 이긴 자가 강한 것이던가" 의 질문을 바꿔서 해보자. "열심히 공부한 자가 합격한 것인가. 합격한 자가 열심히 공부한 것인가?"  정작 이런 표현들이 중요한가? 말이다. 타이레놀만 필요할 뿐이다.

정의는 이제 뚜렷한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정의를 기준하는 것 보다 정의의 이름을 오용하는 자들을 탐색할 촉수가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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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돌리노 - 상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현경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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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상의 힘에 대해서 말하기를 상상이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 한다. 현실에서 상상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상상을 통해 현실을 창조해내기를 기대한다고 한다. 상업광고에서, 경영학에서, 자기계발서에서 이러한 상상의 몫에 대한 예찬은 그들이 우리였다면 입에서 단내가 났을 것이다. 진정 상상은 다시 현실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일까. 현실이 되지 못하는 상상들은 승자의 웃음 뒤에서 사라져간 패전병일 따름이던가, 무명의 잡초로서 생명의 시종을 스스로 그려낼 뿐이던가. 거대한 제국의 역사, 그 작은 틈새에 자신을 끼워넣고자 안달하며 자신의 연대기를 쓰고 있는 그는 중세의 뒤안길에 매몰될까 두려워 몸부림 쳤던 것이던가.  바우돌리노는 비잔틴의 역사학자 니케타스의 인정과 기록을 통해서 역사 속에 살아남으려 의욕했지만, 그것은 백주에 꾸는 꿈처럼 허망하게 되고 만다.

그렇다면 현실에 닻을 내리지 않은 것들은 언제나 불안한 얼굴로 세상을 마주봐야 하는 것이던가. 최소한 현실에 발을 묻고 사는 자만이 현실에서 죽을 수 있던 것이던가. 상상을 디딤땅 삼는 자의 발 모가지는 기어코 절단되어야 하던 것인가.  

지구둘레 : 약4만Km, 지구면적 : 약5.1억km²(154,275,000평), 빛의 속도 : 약30만km/s 

상상의 둘레 : 무한, 상상의 면적 : 무한, 상상의 속도 : 무한

현실을 버리라고는 말하는 사람이 없다.  현실을 잊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을 매트릭스가 오인했다고 일갈했던 장보드리야르는 현실은 없다고 말한다.  거짓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진실의 존재는 거짓을 등에 업어야만 하고, 거짓의 존재는 진실을 등에 업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결국 진실과 거짓은 태생부터 서로를 나누어 지고 있는 기적奇跡둥이와 같다고 볼 수 있다. 현실의 니케타스를 만나기 위해 애걸복걸할 필요가 없다. 하나 하나는 하나 하나의 연대기를 만들어야 될만큼 대단하고 위대한 존재들이 아니던가. 우리의 의식이 사라진 후에도 위대한 존재가 있을런지 대답해줄 사람이 있었던가. 하찮은 이의 인식 속에서 위대함을 갖추는 것이라면 그것보다 재미있는 코미디도 따로 없을 것이 아니겠는가. 양피지에 적힌 사제 요한의 왕국에서 요한을 긁어내고, 우리들의 이름을 바우돌리노처럼 써 넣어도 좋을 것이다. 60세 중후반의 바우돌리노가 요한 왕국으로 다시금 떠난다고 하니 우리도 얼른 보따리를 준비하자. 

                                                                               - 요약 -

이탈리아 프리스케타 지방에 사는 갈리아우도의 아들 바우돌리노는 어느날 숲속에서 프리드리히를 조우한다. 탁월한 화술을 가진 바우돌리노에게 반한 프리드리히는 그를 양자로 맞아들이고 오토 주교의 수하에서 가르침을 받도록 허락하는데, 오토 주교의 평생의 바람이었던 사제 요한의 왕국의 발견과 신성로마제국의 견연을 이끌어내기 위해 그의 일생을 바친다는 내용이다.

상징과 알레고리의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일찍부터 꿰고 있던 바우돌리노는 성인의 발현이나 성물의 발견 등을 통해 어려움에 봉착한 프리드리히를 수차례 구해낸다. 실제 12세기 말부터 13세기까지 교황권은 최고조2)에 달했던 터라 교황과 알력이 심했고, 프리드리히의 삼촌인 오토 주교는 교황을 넘어서는 신권의 근원(王權神授)을 얻기 위해 모든 방법들을 획책한다. 그 중의 하나로 예루살렘을 넘어, 동방의 이교도로 둘러쌓인 곳에서도 빛나는 신의 왕국인, 요한 사제의 왕국과 관계를 맺는다면 그 어떠한 신의 권한을 부여받은 자(교황)보다 우위에 서는 권원으로서의 연결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이를 바우돌리노의 희망속에 심어준다. 수십년의 시간이 흐른 뒤, 바우돌리노의 간청에 수긍한 프리드리히는 1189년 5월 제3차 십자군3) 출병을 하게 된다. 그런데 그는 1190년 6월 10일 아르메니아 왕국에서 원인 모를 이유로 사망하고 만다. 그럼에도 바우돌리노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친구들인 시인, 보롱, 키오트, 보이디 등 12명으로 구성된 탐사단을 이끌고 요한왕국을 찾아 떠난다. 그러하여 부제의 나라에 이르지만, 훈족의 침입으로 요한 왕국으로 가는 걸음을 접고 비잔틴으로 돌아오게 된다.


http://blog.naver.com/reador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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