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의 즐거움 - 개정판 매스터마인즈 1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지음, 이희재 옮김 / 해냄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1997년에 발표된 이 책은 2005년 국내에서 번역되어 초판 42쇄, 2013년 7월까지 개정판 30쇄의 저력을 보인 탓인지 두산백과에서도 줄거리가 실려있을 정도이다. 다음은 흡사한 반복과 재탕의 엔트로피적 결과물이 될 수도 있겠다. 

 

이 책 몰입의 즐거움은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시피 한줄요약하면 몰입이 즐거움을 가져온다는 내용이다. 보다 엄밀하게 즐거움이나 행복감은 몰입이 끝나고 그것을 회상할 때나 감상할 수 있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몰입의 깊이와 농도이며 행복감의 크기와 여운도 그것에 좌우되는 것으로 본다. 

그러면 몰입은 무엇일까? 몰입은 물아일체, 즉 일, 여가, 인간관계 등 대상과 자신이 하나가 되는 상황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이다. 그래서 몰입은 집중을 통해 능동적으로 그것과 함께 할 때 두드러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집중력과 능동성을 부여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인데, 이 부분에서 저자는 프로테스탄트사에서 나온 향수병을 책 위에 고의적으로 쏟아버린다. 향수의 이름은 짐작컨데 칼뱅이 심혈을 기울인 '소명' 같다. 머리말로 직업이나 일, 인간관계, 여가 같은 낱말을 붙여도 꽤 산뜻한 어감을 준다. 실제 소명은 신의 예정에서 비롯한다. 구원을 받을 자는 신이 이미 예정해놓았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버림받았다고 마냥 손 놓고만 있기에는 인간은 지나치게 부지런하거나 욕심이 많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아무리 미워도 죽으라 열심히 하다보면 신도 이쁘게 보아 구원해주리라는 간절한 희망사항이 대치하고 있는 것이다. 

몰입은 이러한 배경을 발판 삼아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아주 싫고 하찮은 것이라 생각되더라도 전 우주를 통틀어 자신만이 그것을 할 수 있고, 자신만이 그것을 완성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그것을 대할 때 집중력이 샘솟고 능동성이 살아난다는 것이다. 신을 바라보며 행하는 소명으로 생각할 때 그것은 나에게 가치를 얻고 몰입을 선사해주며, 행복감에 젖어든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경험들은 더 나은 몰입과 경험을 재축적하여 자신의 발전을 도모하고 세상의 무질서를 줄이는데 사용된다는 것이다.   

 

위는 종교와 마찬가지로 무엇에 심취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초능력 같은 능력을 조금이나마 설명할 수 있을 법도 하다. 시골에 계신 노모께서는 팔십 평생 농사일을 하셨다. 본격 농업을 접은 지 수십년이 지난 지금에도 손발이 노는 것을 허용치 못하는 성격이시다. 보다 젊은 시절, 팔다리가 쑤시도록 일하시고 밤이 되면 끙끙 앓다가도 해가 밝으면 또 다시 일터에 나가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시던 모습이 역력하다. 논밭의 작물들은 자식만큼 소중하고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었을런지 추측만 가능할 뿐이지, 어머님의 몰입 이유는 당신도 그것을 설명할 수 없기에 그것이 그곳에 있었던 것인지 알아낼 길은 없다.  

 

그렇다면 왜 몰입으로 인해 행복감이 오는 것일까? 아마 그것은 오랫동안 유전적으로 축적된 습성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른다. 열매를 채취하든, 동물을 사냥하든, 농사를 짓든, 공작물을 만들든 그 모든 것들이, 그 오랜 세월 동안 행위로서의 대가로서 물리적이고 직접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행위의 대가는 대부분 산술적이고 경제적이어서 노동의 원인과 결과를 수이 연결시킬 수 없다. 우리의 행복 불감은 여기에 근원하며, 그것을 채우기 위해 단순히 재물을 획득하는 것, 여가를 즐기는 것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그렇다고 노는 것, 가진 것이 마냥 행복을 유지시켜주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문명사회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은 상당히 창의적인 노력을 요구하는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털없는 원숭이 - 동물학적 인간론
데즈먼드 모리스 지음, 김석희 옮김 / 문예춘추(네모북)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어느 날, 원숭이들은 나무에서 내려왔다. 그것은 우연이었는지, 천상의 지령이었는지, 대책없는 자심감의 발로였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들이 상대적 약체들임을 깨달었던 것인지 여럿이 뭉칠 깜냥이 있었다. 들판에는 과일보다 뛰어난 맛과 영양을 선사하는 먹이가 즐비했고 굶주림을 해소하기 위해 그들도 죽어라 뛰어다녀야 했다. 하지만 몸에서 발산하는 열을 감당하기에 그들의 털옷은 너무 갑갑하고 두꺼웠다. 그들은 털옷을 훌러덩 벗어버렸다. 물론 그들에게는 추운 밤을 이겨낼 수 있는 움막과 의복, 불이 있었다. 사냥도구의 개발로 그들은 번성했고, 보다 많은 양의 양식을 구하기 위해 멀리까지 사냥 나갈 수도 있었다.  

재미있는 점은 생뚱맞게도 사냥은 오늘날의 도박이 상층과 하층계급에 몰래 성행하는 충분한 이유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중산층의 직업이 적당한 사냥 충동과 보상의 대용품 역할을 잘 해준다면 하층과 상층의 일들은 그들의 사냥 욕구를 보상해주기에는  턱 없이 부족하거나 싱겁게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냥 나간 후에 집에 남은 아내는 살림을 했고, 아이들이 더 뛰어난 브레인으로 자라나도록 보육해야 했다. 강한 육체를 갖지 못한 그들에게 그것만이 가장 강한 무기였으므로 아이들은 더디게 성장하며 두뇌의 학습량을 충분히 늘려갔다. 때문에 부모 곁에서 의지하는 시간도 다른 동물들에 비해서 대단히 길어질 수 밖에 없었다.   

 

한편, 사냥을 나온 서열 5위 원숭이는 집에 두고 온 아내가 걱정되었지만, 우두머리의 말을 굳게 믿었다. 바람이라도 나지 않을까, 겁탈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하고 조마조마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우두머리와 지도부는 '사냥 나가 있는 동안에도 어느 누구도 남의 마누라는 절대 건드리지 말라.'며 그것을 어길 시에는 그것을 잘라버리겠다고 과단성있는 조치를 발표 했었다. 이 선언은 위아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를 안심시켜 협동심을 고양시켰다. 우두머리와 지도부 입장에서도 높은 서열이나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부상을 입을 정도로 크게 다두는 것은 그들 자신에게도 유익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었던 것이었다. 이 선언은 우두머리와 지도부의 자리를 안정시키고 그들의 체제를 유지하는 연장선 위에 있었다. 그런데 몸에도 특별한 변화가 일어났다. 성기는 매우 굵고 길어졌으며, 원하면 어떤 때이든 성욕이 불타올라 아내와 잠자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쾌락의 시간도 늘어나 아내의 만족도도 높아졌다. 우리는 사랑을 대신할 수 있는 특이한 관계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축복을 부여받았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그였다. 옆집의 서열 4위의 아내는 너무 섹시하고 육감적이었다. 그가 근무 나간 날을 틈 타 멋진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며 꼬셔야봐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잘못 되는 날에는 자신이 이루어놓은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마침 새로 나온 일본av는 서열 4위의 마누라와 희한하게도 비슷하게 생겼다. 아내가 아이와 학원에 간 사이 그녀의 작품이나 감상하며 대리만족하기로 한다. 그나마 이런 행동을 지도부에서 검열하지 않았기에 망정이었다.  그 때 '똑똑똑'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 바지를 올리고서는  삐죽히 문을 열었다. 옆집 서열 4위였다. 서열 5위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엉덩이를 보이며 그에게 예의를 다했다. 서열 5위는 연장을 빌리러 온 것이었다.   

서열 4위 옆집으로 이사오기 전, 지난 번 참가했던 중견간부 육성회장이 떠올랐다. 참신한 논조의 2가지 발표가 있었다. 그들이 '기회주의자적인 비전문성'을 특화시켰기에 현재의 눈부신 성과를 거둔 종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우리는 과일이 부족하면 고기를 먹고, 고기조차도 부족하면 동물을 사육하고, 곡식을 길렀다. 우리는 어떤 환경을 맞이해서도 그것에 적응할 수 있을 만큼 유연했다. 다른 한가지는 아이들의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우리 사회를 역동적으로 만드는 기초였으며 그러한 시도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되면서 크다른 진보를 성취해 냈다는 것이었다. 반면 다른 강사들의 발표는들은 어디선가 들었던 내용의 반복이었고, 눈꺼풀에 추를 달만큼 지겨운 것이었다.  

 

서열4위의 그녀는 화사한 미소로 응답했다. 탄탄한 가슴을 먹기 위해 침을 흘리며 입을 크게 벌리는 순간, 서열 4위가 어깨를 툭 치며 옆자리의 가방 좀 치우라고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깊은 잠은 확 달아났다. 자율신경계의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이 신경전을 벌였다. 교감신경은 서열 4위 얼굴을 깨 뭉개버리라고 다그쳤다. 혈압이 고조되고 타액분비, 장운동이 중지되며 얼굴이 시뻘게졌다. 숨이 심하게 거칠어졌다. 겨드랑이의 진땀이 빠직 베어나왔다. 반면 부교감신경은 여기가 어딘데 감히 그런 말도 안되는 행동을 하려고 하는가 하며 주의를 주었다. 일순간의 공격성은 수면 아래로 달아났다. 머리를 긁적이는 轉移行動으로 갈등은 해소되었다. 그렇게 단 꿈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이성이 인간을 여기까지 오게 했으니까.   

 

  

영단어 'mongkey'와 'ape', 즉 원숭이와 類人猿은 꼬리의 유무를 통해 어느 쪽이 인간에 더 가까운 동물인지를 가름한다. 이런 분류법(기믹)은 지속적으로 이격을 크게 하여 인간 기준(관점)에서 인간과 동물이라는 대분법으로 성장했다. 무지나 무관심에서 자리잡은 지식은 일찍이 혹성탈출의 침팬지와 같은 초인간적인 요소의 반증 미출현으로 그것을 더욱 공고히 했고 마침내 교조적 인간론으로 부상하기에 이른다.  

이런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현재 인간을 동물로 보는 관점은 그다지 신선하지는 못하다. 다양한 관점의 파종은 인간에게 겸손을 가르치고 보다 낮은 자리에 앉기를 권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중에게 신의 품격을 이입한, 신을 교접시킨 쪽에서는 여전히 불쾌가 극에 달해 '斯聖亂敵'의 악명를 부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가 이 책을 썼던 60년대에는 'The Naked Ape'라는 제목이 크나큰 반향를 일으키리라는 것을 작가도 내심 작정하고 덤볐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이 책은 인간과 비슷한 점을 동물에게서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동물과 비슷한 점을 인간에게서 찾아낸다. 치장과 가식으로 동물과의 차별성을 강조하지만, 그것의 이면에 숨인 인간의 동물성을 켜켜이 밝혀내어 그 발전된 위험성이 지구를 어디로 구축하고 있는가를 가늠케 한다. 그리고는 늘어진 대안을 슬며시 끼워넣는다. 물론 50여년이 지난 시점에도 인간은 달라지지 않았다. 40억은 70억으로 늘어났다. 갑작스레 현명해질 수도 없고, 지혜로와지지도 않을 것이다. 막대한 지구 자원의 소비는 공급과의 균형을 상실했을 때 겨우 자원 탐욕의 폭주를 멈추게 할 것이다. 자원 경쟁은 인간과 자연을 격리시키고, 인간과 동물을 격리시키고, 더 나아가서는 인간과 인간을 격리시키고 배척하게 만든다. 인간의 옵션, 전두엽이 인간을 여기까지 이끌고왔다면 그것의 이기가 다시 인간을 바닥으로 내몰 것이 자명하다. 계급제와 텃세권을 바탕으로 하는 정글의 법칙은 여전히 다른 모양으로 변형되어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자본은 비축적의 여유를 나누지 않도록 인간의 탐욕을 거대하게 부풀려놓았다. 자본의 목줄에 매여 이리 저리 끌려다니는 체제는 인간에게 자유와 평등의 허상만 심어놓고 사라진지 오래되어서 토요일 오후 8시의 대박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늘어간다.   

 

희생을 강요하고 인정하게 하는 분위기가 아니라 보상하고 같이 아파하는 분위기의 사회는 요원하기만 하니 삶이 더더욱 퍽퍽해져 질긴 플라스틱을 씹는 것 같다. 환경과의 투쟁에서 사이코패스 같은 허세, 난폭함, 교활함이 생존에 기여를 했겠지만, 도와준다든지 하는 선의나 협력의 행동도 그와 상응하는 기여를 충실하게 했기에 또한 사회라는 구성이 가능했을 것이다. 자신은 도움을 받은 뒤 후에 도와주지 않는다면, 다음 번에는 그자(배신자)가 선택되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생물진화법칙의 일종인데, 우리의 민주주의와 선거는 왜 또 다시 다음세대에게 진화의 기쁨을 넘기려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인간의 기하급수적 증가는 끝 없이 증식을 요구받는, 사육되는 동물들 속에 인간을 포함시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과 세계 살림지식총서 85
강유원 지음 / 살림 / 200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이 지향하는 곳은 결국 대부분 의식주성衣食住性을 채우는 것에 있다. 남의 것을 빼앗거나 이로 인해 남을 죽이거나이다. 고상함을 깃들이는 것도 배가 부를 때나 하는 일이니까. 책은 그것을 기록(자랑)하거나 또는 그것으로 부터 도피된 환몽幻夢을 기록하거나이며, 이정도이거나 이정도 근처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긍정의 배신 - 긍정적 사고는 어떻게 우리의 발등을 찍는가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 / 부키 / 201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0년대 초반으로 시간여행을 가보면, 긍정이라는 단어에 전염되어 있지 않던 여행자에게 교회를 열심히 나가던 누님은 「적극적 사고방식」이라는 노만 빈센트 필의 책을 선물해준 적이 있었다. 단학이나 실바마인드컨트롤의 그것처럼 언뜻 도파민을 퍼올리는 재주를 갖고 있었고, 사고의 전환만으로도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낭만 충천한 주제의 책이었다. 하지만 목회자 생활을 지겨울만큼 한 저자의 주장들은 그 실타래풀이를 결국 하늘 위에 있는 어떤 분에게로 한정시키는 일반적인 누를 범해 납화살을 맞고 말았으니, 생각의 늪을 염탐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책꽂이 한켠으로 유배되어 촉수엄금할 먼지무덤으로 자리잡았다.

 

저자는 유방암에 걸려 병원을 들락거리면서 지나치리만큼의 긍정편의주의적인 발상들이 넘쳐남에 치를 떨게 된다. 부정적인 태도가 암의 원인이며 한 발 더 나아가 이를 선물로 받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긍정 몰입적 슬로건을 마주하기 때문이다. 

 

긍정이 암묵적 강제성을 가질 때 자신의 긍정적 생각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태가 호전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롯이 긍정성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자들의 책임과 고통이 되고 만다. 하지만 이것이 단순한 긍정성에 그치지 않고 산업이 되고 종교가 되어버린 시점의 우리사회는 이유있는 비판과 부정의 균형 잡힌 시각마저도 배척하는 도구로 역할한다는 점이다.  

 

자기계발서, 인간관계론, 기업혁신을 위한 동기유발프로그램, 대형교회의 복음설교, 긍정심리학 등은 긍정산업, 긍정종교, 긍정이데올로기라는 마치 프리메이슨이나 빌더버그의 아우라를 갖춘 거구의 체제가 되었다. 신학과 논리의 정략결혼을 희망했던 토마스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잠에서 깨어냈듯이 긍정도 그것의 망양을 심리학의 논문 등에 기대어 효과를 실증하고자 한다. 물론 그 논문은 관변 연구소의 용역보고서처럼 긍정으로 득을 따지는 이익집단들이 스폰서가 될 것임은 자명하다. 

  

자본주의 산업의 기반은 이익을 목적으로 하고 그것은 계속해서 확대되어야만 한다. 그것을 이루지 못하는 기업은 다른 기업과의 경쟁에서 도태되어야 한다. 부수고 다시 만든다는 어떤 광고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가장 짧고 적확하게 묘사한다. 그것은 마치 전쟁이 주기적으로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산업이 비대해지기 위해서는 소비가 따라주어야 하고, 소비의 증대에는 소득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 구매제품으로 인한 만족감 제고가 기저에 깔려있어야 한다. 그것의 최면, 부추김에 바로 전쟁발발과 같은 공황을 무시하는 긍정산업이 버티고 있다.  교회는 기업화되고 기업은 교회와 유사해졌다. 기업의 사장은 카리스마를 갖추고 교주처럼 받들여지고, 교회의 목사들은 십일조의 차트와 순위를 매겨 경쟁을 유도하고, 부흥은 진정 중소기업의 코스닥상장 같은 유의미를 갖는다. 우리 사회의 이익과 정신을 독점하는 그들은 이미 오래전 두 손을 맞잡고, 부정을 부정하며, 가을비 없는 석달 산에 불을 지른듯이 긍정을 연호했던 것이다.  

   

"일자리에서 밀려나 빈곤을 향해 추락하고 있는 실업자들은 자기가 처한 상황을 기회로 받아들이라는 말을 듣는다. 긍정적 사고 또는 긍정적 태도가 치유책으로 제시되지 않는 분야는 거의 없을 정도다. 긍정적 사고 기법에는 불편한 소식에 귀를 닫아버리는 격퇴 능력이 있다. 긍정적 사고의 세력권은 미국에 국한되지 않고 세계로 뻗어나가 영어권은 물론 중국, 한국, 인도와 같은 성장국가로 확산됐다." 

 

킬러컨텐츠, 긍정이데올로기의 가장 큰 폐해는 시장경제의 잔인함, 폭력성을 감추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이고, 그것의 가장 큰 횡포는 불행의 모든 책임을 긍정적이라는 모호한 기준을 내세워 개인에게 전가한다는 것이다. 똥개가 낯선 사람에게 더욱 크게 짖는 것은 불안의 증대 때문이듯이 긍정의 본질도 대척점에서 튀어오른 공마냥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달과 6펜스는 책 말미의 작품해설에서 자세히 나와 있듯이 프랑스 화가 폴 고갱의 삶을 추억하며 그의 삶을 환골탈태시킨 소설이다. 다행히 표지그림『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은 고갱의 실제모습과도 유사해 찰스 스트릭랜드의 이미지를 형상화하는데 도움을 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제목의 낭만은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추상적이어서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왜라는 질문을 왜를 찾아나섰던 자신에게 던지게 만든다. 주인공 스트릭랜드가 마흔이 넘어 미 창조에 대한 열정을 쫓아 가족과 직장을 버린다는 설정 때문인듯한데, 당연히 비현실성의 억지춘향 따귀 때리고도 남을 전설의 고향이다. 그래서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인간형이 고래불해수욕장 명사20리 간, 20년 전 동행했던 여친의 왼쪽귀걸이(보통 축과 크로스된 위치의 물건을 컨트롤할 때 손은 제어가 불량하다)를 되찾은 것처럼 초초극소수이다. 그러나 그것이 불씨가 되어 사소한 감정들에 이별의 의미들을 덧철하고 부풀려서 드디어 별리가 되어버렸다면, 그것이 사소해진 나이가 된다할지라도 살면서 한번쯤은 그곳을 꿈속에서 몽상속에서 가보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 인간이 가진 애틋한 마음, 자신에 이르는 측은한 마음이며 위로이다. 이 소설은 고전이어서 지금으로서는 구태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의 지점을 잘 포착하고 있어 앞으로도 고전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점이다.  회유에 의해 흔들리거나 방황하는 것이 아닌 목적의식이 뚜렷한 주인공이 타인 뿐 아니라 자신에게조차도 똑같이 냉정하게 대할 때 그의 현실외면에 대한 비난은 검은돈 받은 정치인의 손길처럼 우리의 의식속에서 사라진다. 더욱이 죽음을 대하는 고매한 태도는 감성예방접종을 하지 않은 독자들에게 '따끔한' 눈물샘을 선사할 수도 있다.

 

정작 기분 나쁜 것은 불혹을 넘어선 어떤 인간에게 그가 거울을 보며 부끄러워할만한  유사한 인간형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더크 스트로브의 오브랩. 애잔하지만 전혀 불쌍한 인식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외형, 누군가를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표현 앞에서 첫키스를 받은 소녀처럼 저멀리 있기나 한 건지, 들리기나 할 건지 의심스러운 교회 첨탑의 종소리가 울린다.   

 

더크 스트로브는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꼴은 우스꽝스러웠다. 좀 초췌하고 여위기라도 했더라면 동정을 살 수 있었으련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몸은 여전히 뚱뚱한 데다 불룩한 뺨은 잘 익은 사과처럼 불그스레했다.  -중략-   슬픔의 흔적이라고는 도무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p.163~164)  

 

더크 스트로브는 찰스 스트릭랜드가 몸져 눕자, 가지 않겠다고 역정을 내는 그를 굳이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아내와 함께 극진히 간호한다. 그런데 그만 그에게 부인을 빼앗기고 만다. 바람이 난 것이었다.  

 

슬픔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고, 동정도 얻을 수 없는, 상실감이 증폭되는 우스꽝스러운 몸매의 소유자는 야망을 빼앗기고 용기를 빼앗기고 자유를 잃어버렸다. 마지막으로 안타까운 것은 정의와 열정을 분실하였다. 벗겨지는 머리와 똥배가 흐르는 몸매 속에 언제 그런 것이 있기나 했는지 의심을 사고도 남을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