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의 배신 - 긍정적 사고는 어떻게 우리의 발등을 찍는가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 / 부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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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초반으로 시간여행을 가보면, 긍정이라는 단어에 전염되어 있지 않던 여행자에게 교회를 열심히 나가던 누님은 「적극적 사고방식」이라는 노만 빈센트 필의 책을 선물해준 적이 있었다. 단학이나 실바마인드컨트롤의 그것처럼 언뜻 도파민을 퍼올리는 재주를 갖고 있었고, 사고의 전환만으로도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낭만 충천한 주제의 책이었다. 하지만 목회자 생활을 지겨울만큼 한 저자의 주장들은 그 실타래풀이를 결국 하늘 위에 있는 어떤 분에게로 한정시키는 일반적인 누를 범해 납화살을 맞고 말았으니, 생각의 늪을 염탐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책꽂이 한켠으로 유배되어 촉수엄금할 먼지무덤으로 자리잡았다.

 

저자는 유방암에 걸려 병원을 들락거리면서 지나치리만큼의 긍정편의주의적인 발상들이 넘쳐남에 치를 떨게 된다. 부정적인 태도가 암의 원인이며 한 발 더 나아가 이를 선물로 받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긍정 몰입적 슬로건을 마주하기 때문이다. 

 

긍정이 암묵적 강제성을 가질 때 자신의 긍정적 생각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태가 호전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롯이 긍정성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자들의 책임과 고통이 되고 만다. 하지만 이것이 단순한 긍정성에 그치지 않고 산업이 되고 종교가 되어버린 시점의 우리사회는 이유있는 비판과 부정의 균형 잡힌 시각마저도 배척하는 도구로 역할한다는 점이다.  

 

자기계발서, 인간관계론, 기업혁신을 위한 동기유발프로그램, 대형교회의 복음설교, 긍정심리학 등은 긍정산업, 긍정종교, 긍정이데올로기라는 마치 프리메이슨이나 빌더버그의 아우라를 갖춘 거구의 체제가 되었다. 신학과 논리의 정략결혼을 희망했던 토마스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잠에서 깨어냈듯이 긍정도 그것의 망양을 심리학의 논문 등에 기대어 효과를 실증하고자 한다. 물론 그 논문은 관변 연구소의 용역보고서처럼 긍정으로 득을 따지는 이익집단들이 스폰서가 될 것임은 자명하다. 

  

자본주의 산업의 기반은 이익을 목적으로 하고 그것은 계속해서 확대되어야만 한다. 그것을 이루지 못하는 기업은 다른 기업과의 경쟁에서 도태되어야 한다. 부수고 다시 만든다는 어떤 광고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가장 짧고 적확하게 묘사한다. 그것은 마치 전쟁이 주기적으로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산업이 비대해지기 위해서는 소비가 따라주어야 하고, 소비의 증대에는 소득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 구매제품으로 인한 만족감 제고가 기저에 깔려있어야 한다. 그것의 최면, 부추김에 바로 전쟁발발과 같은 공황을 무시하는 긍정산업이 버티고 있다.  교회는 기업화되고 기업은 교회와 유사해졌다. 기업의 사장은 카리스마를 갖추고 교주처럼 받들여지고, 교회의 목사들은 십일조의 차트와 순위를 매겨 경쟁을 유도하고, 부흥은 진정 중소기업의 코스닥상장 같은 유의미를 갖는다. 우리 사회의 이익과 정신을 독점하는 그들은 이미 오래전 두 손을 맞잡고, 부정을 부정하며, 가을비 없는 석달 산에 불을 지른듯이 긍정을 연호했던 것이다.  

   

"일자리에서 밀려나 빈곤을 향해 추락하고 있는 실업자들은 자기가 처한 상황을 기회로 받아들이라는 말을 듣는다. 긍정적 사고 또는 긍정적 태도가 치유책으로 제시되지 않는 분야는 거의 없을 정도다. 긍정적 사고 기법에는 불편한 소식에 귀를 닫아버리는 격퇴 능력이 있다. 긍정적 사고의 세력권은 미국에 국한되지 않고 세계로 뻗어나가 영어권은 물론 중국, 한국, 인도와 같은 성장국가로 확산됐다." 

 

킬러컨텐츠, 긍정이데올로기의 가장 큰 폐해는 시장경제의 잔인함, 폭력성을 감추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이고, 그것의 가장 큰 횡포는 불행의 모든 책임을 긍정적이라는 모호한 기준을 내세워 개인에게 전가한다는 것이다. 똥개가 낯선 사람에게 더욱 크게 짖는 것은 불안의 증대 때문이듯이 긍정의 본질도 대척점에서 튀어오른 공마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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