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솝 우화 전집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32
이솝 지음, 아서 래컴 그림,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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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릴 적부터 이솝우화를 들으며 자란다. 주로 권선징악과 관련한 이야기들이다. 양치기 소년, 토끼와 거북이 경주, 곰을 마주친 두 친구, 비둘기에게 은혜를 갚은 개미... 같은 이야기들이 그러하다. 나그네의 외투를 벗긴 해님 이야기는, 거칠고 폭력적인 물리적 힘보다는 부드럽고 온화한 설득의 힘이 더 세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이솝우화 전편을 읽어보면 권선징악과 어긋나는 이야기들이 훨씬 많다. 


교통사고 블랙박스 영상을 분석하는 유튜브 채널 "한문철TV"는 이솝우화의 현대판 버전 같다. 중학생 자전거부대가 길을 횡단하는 것을 기다리는 운전자가 있다. 그는 한 무리가 다 지나간 후에도 출발하지 않고 잠시 기다린다. 그는 과거 경험상 '후발대가 꼭 있음!'을 직감하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뒤처진 자전거 한 대가 무리들을 따라잡으려고 쌩하고 지나간다. 


지금 보행자신호가 켜졌는데도 사이드미러를 보니 뒤에서 달려오는 차의 속도가 심상치 않다. 그런 줄도 모르고 횡단보도를 달려서 건너려는 꼬마 형제에게 크게 경적을 울린다. 꼬마들은 깜짝 놀라서 멈추고 옆차선 차는 신호를 무시한 채 횡단보도를 지나쳐 질주한다. 빗길에 이쪽 차선으로 계속 밀고 들어오는 트럭 때문에 브레이크를 밟아야 했고 짜증이 났다. 그런데 속도를 줄이고 보니 눈앞에 빗길 사고로 뒤집어진 차량이 나타났다. 높은 시야에서 더 멀리 보았던 트럭 운전자의 판단이었던 것이다.  


모두 훈훈한 모습들이다. 그렇지만 살벌한 도로 위에서 그런 아름다운 경우는 많지 않다. 도로에는 우리 상식을 뛰어넘는 별의별 상황이 다 펼쳐지고 온갖 빌런과 진상 운전자들이 출현한다. '레전드 경신' 영상은 계속 업데이트된다. 매너 더러운 진상 짓 정도면 양반이다. 보복 운전을 비롯해 목숨까지 위협하는 위험한 상황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야밤에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고속도로 역주행 트럭을 어떻게 피할 수 있으랴. 


그러면 운전을 다 관두어야 하는 것일까? 답이 안 보인다고 인생을 그만둘 수 없듯 운전도 물론 아니다. 이솝우화를 충실히 읽은 어른이라면 눈앞에 펼쳐질 수 있는 온갖 도로 위 악재들의 모든 경우의 수를 그때그때 신속히 파악하고 조심 또 조심하며 방어운전을 할 것이다. 터널에서, 진출입로에서, 지하주차장에서 골목에서 조심 또 조심... 그러고서도 막지 못하는 위험이 있다면 그건 운명이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조심할수록 위험도를 줄일 수 있다는 점이 이솝우화가 알려주는 교훈들의 거의 전부다. 사고의 주된 원인이 과속이듯, 과욕을 부리면 패가망신하기 십상이라는 점도 아울러 경고한다. 


개울에 떠내려가는 개미에게 나뭇잎을 띄워준 비둘기가 나중에 개미의 도움을 받아  사냥꾼에게서 목숨을 구하는 아주 드문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이솝우화 이야기 전편을 놓고 보면 선행에 대한 보상을 받는 이야기보다는 선행을 베풀었음에도 배신을 당하는 이야기가 훨씬 더 많다. 배은망덕한 경우는 너무 많고, 뒤통수까지 맞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솝우화에 가장 많이 나오는 구절이 "~인 줄도 모르고 ~하다니 내가 이런 일을 당해도 싸지!"라는 뒤늦은 후회라는 점을 기억하자. 


아는 게 힘이라는 말도 맞지만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맞다. 그 두 입장이 논리적으로는 모순될지라도 삶에서는 모두 다 통용되는 진실이다. 딸 둘을 키우던 부모가 첫째는 원예사에게 시집을 보내고 둘째는 도공에게 시집을 보냈다. 첫째 딸의 소원은 꽃이 잘 자라도록 비가 많이 내리는 것이고, 둘째 딸의 소원은 도자기가 잘 마르도록 해가 쨍쨍 나는 것이라는데, 그럼 부모는 어떤 날씨를 빌어야 하는 걸까. 이거야 뒤집어 생각해보면 날씨가 어떠하든 상관없다는 말도 되니까 큰 문제는 아닌데, 목숨이 달린 문제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꾀를 부려서 사자를 제압한 이야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분수를 모르고 잔꾀를 부리며 사자에게 덤볐다가 잡아먹힌 이야기가 이솝우화에는 훨씬 많다. 기지를 발휘하여 어떤 때는 자기가 새라고 말해서 살고 어떤 때는 쥐라고 말해서 사는 박쥐처럼 위기를 모면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왜 이랬다 저랬다 하냐며 잡아먹히는 이야기들도 같은 비중으로 등장한다. 이솝우화는 서로 모순되는 내용들이 잔뜩 혼재된 이야기들의 총체라서 어떤 상황에 대처하는 처세의 해답이 따로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이솝우화의 특정한 이야기 하나를 듣고 인생 지침으로 삼았다가는 큰 낭패를 겪게 될 것이다. 


이솝우화는 솔직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발길이 드문 곳에 아가씨 하나가 살고 있는데 이름이 '참말'이다. 왜 이렇게 외딴 곳에서 혼자 사냐고 묻자 동네 사람들이 자기를 멀리하고 '거짓말'하고만 어울려 사는 걸 좋아하다보니 그렇게 됐다고 대답한다. 이솝우화는 우리 사는 세상이 거짓 투성이라는 점을 각인시킨다.  


세상사는 너무나 복잡하고 미묘하다. 거짓이 판을 치고 불합리하며 부조리한 일들이 숱하게 일어난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늘도 정글 같은 세상에서, 위험도를 조금씩 낮추고 생존 확률을 조금씩 높이면서 인생을 묵묵히 살아간다. 더러는 꾸역꾸역  삶을 살아낸다. 그리고 좋든 나쁘든 돌발 상황이 일어날 때마다 새로운 것을 체득하고 배우며 그것을 후대에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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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오파기티카 - 언론자유의 경전, 전면개정판
존 밀턴 지음, 박상익 옮김 / 인간사랑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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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작품을 옮기는 훌륭한 번역자들의 노고 덕에 학술과 교양은 조금씩 풍요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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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역 설문해자 세트 - 전5권 - 2023년도 대한민국학술원 선정 우수학술도서 한국한자연구소 연구총서 12
허신 지음, 하영삼 역주 / 도서출판3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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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해 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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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겔스 평전 - 프록코트를 입은 공산주의자
트리스트럼 헌트 지음, 이광일 옮김 / 글항아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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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겔스에 대해 잘 알게 되었습니다. ‘미화‘하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좋은 책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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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병자들 - 1914년 유럽은 어떻게 전쟁에 이르게 되었는가
크리스토퍼 클라크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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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 좋은 번역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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