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나비들은 보지 못했다 - 테레진 수용소 아이들이 남긴 시와 그림, 1942~1944
프란타 바스 지음, 이혜리 옮김 / 다빈치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사람들이 느끼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 죽음이 막상 닥치기 전에 더 크게 느껴진다. 죽음은 정해진 일이라 생각하며 옆에서 누가 죽어가고, 그다음쯤에 내가 죽어야 한다면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저항, 순응, 정신적 장애, 그리고 신에 대한 갈구 등을 흔히 생각할 수 있다. 이 책 『더 이상 나비들은 보지 못했다』에 담긴 내용은 위에 열거한 그 무엇도 아니다. 아이들의 그림은 게토가 아닌 공간에서, 그리고 아우슈비츠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망각한다면 아이들다운 그림으로 주변의 일상을 아이들의 솜씨로 그려낸 듯이 느껴진다. 시는 냉정한 관찰을 보여주기도 하고, 살고 싶은 욕망, 그리고 변해하는 자신을 날카롭지만 한껏 꺽어서 표현해내고 있다. 지옥 같은 절망보다는 섬세하고 관조적으로 표현한다. 아이들의 처했던 상황을 생각하며 예상했던 내용들과는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아이들의 그림은 왜 그랬을까? 아이들의 시는 왜 그럴까? 검열이라는 죽음의 조건 앞에서 숨죽여 표현해야 했을 아이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로베르토 베니니가 열연한 아빠의 모습처럼 아이들에게 사실을 연극처럼 꾸며서라도 희망을 버리지 않게 하고 싶었던 지도 선생님, 프리에들 디커-브란데이스의 바램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하기에 그녀는 아우슈비츠로 가면서도 아이들의 작품을 남기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아니면, 아이들은 이미 죽어가는 모습들 속에서, 부모와의 이별속에서, 비인간적인 생존의 조건 속에서 오직 할 수 있는 일은 희망을 향해 ‘나비’를 보고 싶은 마음으로 시와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게토에 속한 사람들이 처한 상황이란 죽음과 목숨을 건 탈출, 그리고 나찌의 멸망으로 해방되는 것이지만 어느 것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순간에 공포는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 탈출! 탈출한 아이들이 음식을 훔쳐 간신히 생명을 부지하다가, 어느 친절한 농가에 들어가서 헛간에서 잠을 청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착한 농부들도 언제 캐쉬타포에 의해 자신들까지 죽음을 당할지 모르는 공포에, 아이들은 언제 고발당할지 모르는 공포에 떨며, 결국 탈출은 공포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공포의 연장에 불과하다. 탈출에 성공한다면? 스웨덴으로 탈출한 유대인 소녀의 소설에는 간신히 탈출한 두 남매가 테레진(체코에 속한 게토의 이름)에서 티브진으로 죽은 엄마의 소식을 듣고 함께 있지 못한 괴로움으로 고통 받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탈출하는 것은 쉬운 선택은 아니다. 죽음의 공포는 죽임이 일어난 곳이든, 그곳에서 약간 벗어난 곳이든, 멀리 떨어져 가족의 죽음을 두손 놓고 바라봐야 하는 곳이든 항상 존재한다.


그 공포에서 최선의 선택은 그림과 시를 통해 희망을 생각하고, 인간다움을 느껴보고, 사랑을 가지는 것은 아닐까?  결국, 가슴 가득 생각할 만한 여백이 가득한 이 책은 아무생각도 나지 않게 하거나, 많은 생각을 하게 하거나 한다. 유태인의 절박한 죽음을 느껴볼 장치들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있다면 언제 태어나 어느 곳에서 갇혀 살다가 언제 죽었다는 소개 글이 전부다. 감정을 이끌기 위해 이러저러한 사설을 늘어놓지 않아 책을 읽는 동안 친절하지 않은 기획자를 욕하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책을 덮고 난 후에 느끼는 긴 여운이 오히려 그 덕분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든다.


지금도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수많은 아이들이 존재한다. 그 아이들이 처한 죽음의 순간에 누가 책임을 지고, 누가 대신할 수 있을까? 그 아이들이 토해내는 언어와 시와 그림들은 무엇을 담고 있을까? 그 작품들을 보며 어떤 것들을 느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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