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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미소
줄리앙 아란다 지음, 이재형 옮김 / 무소의뿔 / 2017년 12월
평점 :

[달빛 미소] / 줄리앙 아란다 지음 / 이재형 옮김 / 무소의뿔 펴냄
‘나는 그 미소를 보았다. 달빛의 미소를...’ 폴 베르튄의 인생이 다가온다. 작은 조약돌인 라 륀(La Lune)의 은은한 미소에 위안을 받고 삶을 그려 나간다. 인생의 순간마다 자신의 의지로 삶을 이끌어가는 '폴 베르튄'의 인생이다. 삶의 양면성에서 자신이 일구어낸 사랑과 역경, 희열과 좌절, 분노와 안심의 여정이다.
새로 뜨는 달(Nouvelle Lune)로 시작되는 폴의 탄생과 유년기, 초승달(Croissant de Lune)의 청년기를 넘어, 반달(Quartier de Lune)의 중년의 삶과 보름달(Pleine Lune)에 이르러 인생의 이별과 평생 간직한 염원을 이루어내는 폴 베르튄의 인생 주기이다. 달의 주기에 따라 인생의 흐름을 들여다본다. 달을 따라, 그 미소가 주는 위안을 따라 찬찬히 들여다본다.
새 생명의 탄생은 관점의 차이에 따라 삶의 역설에 스며든다. 종교적 관습에 따라 탄생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 의학적 지식에 따라 탄생을 지켜보는 것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살아있는 것과 살아가는 것의 관계이다. 탄생과 생명의 관계를 '작은 병과 향수', '권태와 상상력'(본문 발췌)으로 표현한 저자의 생각에 동감이 되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활자에 취해 들여다보는 책은 매력적이다. 달이 지닌 미소인가, 달빛이 내뿜는 미소인가. 서늘한 눈빛으로 바라봐야 할지, 무심한 듯 처연하게 바라봐야 할지, 첫 장을 넘기는 손이 떨린다.
밀 밭에서 바라본 밤 하늘이, 잔잔한 바다 위 뱃머리를 홀연히 비추는 달의 미소가 '희망'으로 표현되기에 나 또한 달빛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차가운 현실은 육체를 실내로 잡아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따라가기에 실내의 공기가 조금은 답답하게 흩어지지만 아늑한 공간에 펼쳐진 인생을 볼 수 있는 것에 위안 받는 것도 어찌 보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삶의 역설이 아닐까.
'공간적 거리는 이따금 가장 내밀한 기억을 지워버린 다음 그것을 이상화시키거나 그것의 섬세한 세부를 생략하여 자기 식으로 만들어 버린다. 참 이상한 일이다.'(본문 발췌)
줄리앙 아란다의 첫 장편소설 [달빛 미소(Le SOURIRE du clair de LUNE)]는 출판사를 통하지 않고 전자책으로 발간되었다. 그의 담담한 문체 속에 피어난 폴 베르튄의 인생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되어 발간되었다. 한 사람의 탄생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 있다.
갇힌 마음에서 벗어나 꿈을 좇는다. 그 꿈은 되고자 했던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바람을 이뤄주고 싶은 약속이기도 하며, 사랑이 주는 위안일 수도 있다. 삶의 이상을 가둬 두기엔 인생은 길지 않다.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는 사실을, 시간이 곡식 낟알 떨어지듯 하나씩 떨어져 나간다는, 시간이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고 미친 듯이 질주한다는 사실을'(본문 발췌) 다시금 들여다본다.
뱃사람이 되고자 했던 폴, 사랑하는 마틸드와 영원히 함께 하고픈 폴, 독일 장교의 딸을 찾아 아버지의 마지막 말을 전하고자 했던 폴, 아들과 떨어져 성 착취로 갇힌 마리아를 구해낸 폴, 절친한 친우 마르탱과 태풍을 뚫고 살아남고자 했던 폴의 시간이다.
밀밭의 아버지가 보여준 삶에서 비롯된 자유 의지는 폴을 바다로 향하게 한다. '억압'과 '자유'로 대변되는 아버지와 자신의 삶에서 폴이 가진 다른 하나는 '미소'이다. 삶이라는 거대한 전기선에 갇혀(본문 발췌) 있으나 그 속에서 피어나 삶을 개척한 것은 '미소'이다. 고고히 밤 하늘을 비추고 때로 해와 공존하여 낮 하늘에 피어오른 달의 위안은 폴의 미소로 퍼진다.
뱃사람이 되었으나 태풍을 만나 폴은 깨닫는다. 간절한 바람을 달에게 빈다. 그 미소를 다시 볼 수 있기를.
진정 자신이 바란 것은 뱃사람의 진취가 아닌 가족에게 드리워질 향취이다. 따듯한 육체로 보듬어 안을 수 있는 온기다. 부모의 불통을 통해 자신의 부재가 가족에게 드리워진 그리움을 들여다보게 한다.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본문 발췌) 사랑을 위해, 꿈을 위해, 약속을 위해, 온정을 위해 시도한 덕분에 폴 베르튄은 삶을 쟁취했다. '좋은' 인생에서 함께 한 마틸드와의 이별이 남긴 공허함은 '온정'의 대상이었던 마리아의 아들 마누엘의 방문으로 천천히 채워진다. 젊은 시절 찾아 헤맨 독일 장교의 딸 카트린을 만나러 가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여정으로 삶의 태풍은 비로소 고요해졌다. 만월로 채워진 삶의 마지막에 이르러 완성된 조각은 모르비앙의 바다를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