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 괴수전
이지월 지음 / 민음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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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프로필에 씌여 있는 말들에 혹해서 집어든 책. "마지막 LP 세대, 혹은 첫 번째 CD 세대" 그렇다면 나와 연배가 비슷하다. 게다가 '해적판 만화책과 대본소용 무협지' 대목에 이르러서는 호감마저 든다.

 

작품의 시작은 조세희의 단편 <기계도시>에서 따온 문장으로 시작된다. 이 또한 반갑다.

 

은강은 크고 그 안은 복잡하다. 은강 사람들이 자기네 도시를 두고 이야기할 때 얼른 이해할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갑갑하다>는 말이다. 은강은 서울에서 멀지 않은 서해 반도부에 위치해 있어 삼면이 바다이다.

 

은강이 곧 인천이 아닌가! 게다가 인천에서 다만 얼마간이라도 살았다면 주인공이 활약하는 무대가 제물포역 인근이고, 그가 다니는 학교가 선인재단의 선인고등학교라는 사실을 눈치채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낯익은 것들은 계속 등장한다. 신포시장의 닭강정 가게, 이름은 밝히지 않았지만 <심지>임에 분명한 음악감상실, 그리고 3M(Metallica, Megadeth, Metal Church)으로 일컬어지던 쓰레쉬 메탈 밴드들까지... 하지만 소설에 대한 호감과 설렘은 딱 여기까지이다. 작품은 지극히 개인적인 끄적임 수준에서 그치고 만다.

 

정확하진 않지만 영화 <장미빛 인생>에서 무협지 작가가 경찰에게 쫓기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가 쓴 무협지 내용이 너무나 현실 정치와 비슷해서였던 걸로 기억한다. 정권은 무협지 형식을 빌어 현실정치를 까댄 그 작가를 용서할 수 없었고, 남영동 쯤으로 끌고가 매운 맛을 보여주려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무협지 작가는 아무 생각 없이 썼던 글이었고, 억울하기 짝이 없어했던 것이 기억난다.

2010년에 씌여진 이 소설은 이와는 정반대 상황이다. 인천으로 대표되는 변두리에서, 선인재단으로 대표되는 거지 같은 사학재단에 맞서 주인공이 한바탕 활극을 벌이는 내용이 무협지 형식을 빌어 씌여졌다. 

내용은 상당히 아스트랄하다. 절대 무공을 자랑하는 스승, 절대 미모를 자랑하는 소피와 더불어 주인공은 선인재단 비리에 맞서 학생들을 규합하여 한 바탕 혈전을 벌인다. 하지만 절대적 힘의 차이로 굴욕적인 패배를 시인한 뒤 스승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소피 역시 해직 교사와 프랑스로 편도행 티켓을 끊어 날아가버린다. 일상생활로 돌아와 그동안 이쁜줄 몰랐던 미술학도 아가씨(파랑새?)가 사실은 귀여웠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다음 이어지는 내용은 그냥 마무리를 위한 중언부언인데 딱히 이렇다할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다.

 

소설은 다 읽고 나면 뭔가 '하다 만 느낌', '찜찜함' 등을 강하게 느끼게 되는데,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주인공 스스로가 한 발 빼고 있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공권력과 재단에 맞서 한바탕 혈전을 치르면서도 일면 방관자처럼 군다. 해직 교사와 소피 등을 통칭 '간첩단'으로 부르며 그들의 행태에 대해서 미심쩍은 상황을 나열하고, 학교 측에 붙어 '구사대' 노릇을 하는 '애교심' 넘치는 자들에 대해서는 '희화화'라는 기법을 통해 그 악랄함과 잔인함에 면죄부를 준다. (결국 주인공은 담배 한 대에 그들과 화해하고 만다)

왜 그런가? 작가 스스로가 그러했기 때문이 아닌가 조심스레 짐작해 본다. 그러다 보니 '무협지적인 화법' 이 가능한 것이다. '무협지적인 화법'을 일상 생활에 적용했을 때는 그 과장됨 덕분에 현실을 얼마든지 희화화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는 양날의 검이 된다. 정말로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할 때는 이 '희화화' 때문에 모든 것이 우스꽝스러워질 수가 있다. 진정 끝까지 가본 자, 경험해본 자는 희화화를 남발할 수가 없다. 하지만 작가에게는 그러한 경험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재기발랄한 '무협지적인 화법'이 주는 신선함과 '인천' 이라는 추억은 금새 사라져버리고, 알맹이 없는 '말투'만 남은 소설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http://blog.naver.com/rainsky94/220560520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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