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만의 생각을 읽자 - 만화로 읽는 21세기 인문학 교과서 인문학의 생각읽기 3
윤순식 지음, 박지훈 그림, 손영운 / 김영사on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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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만(1875~1955)는 1929년, 그의 나이 54살에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로 노벨문학상을 받는데 작가 자신은 심사위원들이 <마의 산>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 데 불만이었다고 한다.

그는 80년의 생애 동안 장편 소설 8편을 비롯 단편 소설, 희곡, 일기 등 수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자신의 서간문과 일기는 사후 25년 뒤 공개하라고 유언을 남긴다. 1980년에 봉인된 서고를 공개한 결과 동성애 관련 글이 많이 발견되어 그의 문학이 새로운 각도에서 활발하게 조명된다.


처녀작은 <타락>으로 1894년에 발표되었는데 한 순진한 젊은이가 어느 여배우에게 반하여 그녀와 첫사랑을 나누지만 그녀에게 애인 겸 후원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어 파멸한다는 내용이다. 3년 뒤인 1897년에 <키 작은 프리데만 씨>가 발표된다. 두 작품은 19세기 말 데카당스 느낌의 분위기를 잘 나타낸다.

그의 첫 장편은 1901년에 발표된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이다. 부제는 '한 가문의 몰락' 이었는데, 뤼베크 시민의 가정을 모델로 4대에 걸친 한 시민 계급 가문의 몰락 과정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부덴브로크 가문 사람들은 1, 2대(代)때 성실과 신뢰를 바탕으로 부를 축적하고, 3대 때에는 시정 장관이 될 정도로 성공하지만 4대인 '하노'에 이르러 상인 기질이 섬세하고 유약한 예술가 기질로 변하고 만다. '하노'는 어린 나이에 죽고, 이로써 부덴브로크 가문은 몰락하고 만다.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은 부르주아 계급의 필연적 몰락을 나타내는 리얼리즘 작품의 본보기로 사회주의 비평가들에게 극찬을 받았고, 후기 시민 계급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킨 작품이었다. 이런 이유로 1901년 이후 작품은 500만부 이상이 팔렸다.

작품은 토마스 만의 삶이 녹아들어 있는데, 토마스 만이 17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가업으로 100년 이상 이어오던 곡물상회가 파산하자 가족이 모두 뤼베크를 떠나 독일 남부로 이사를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화재보험회사의 견습 사원으로 취직한 그는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글을 썼는데 이런 경험이 작품의 바탕이 되었다. 또 이러한 토마스 만의 경험이 독일 북부의 현실적인 성향을 극복하고 남부의 예술적인 성향으로 변신하는 과정이라고 분석되기도 한다. 

이러한 독일 북부와 남부의 서로 다른 모습이 심화되어 창작된 소설이 1903년 발표된 <토니오 크뢰거>이다. 건전하고 행복한 시민의 삶을 동경하면서도 그 속에 뛰어들 수 없는 예술가의 숙명적인 고독과 고뇌를 그린 이 작품의 모티프는 그 이후로도 토마스 만 작품에서 자주 차용된다. 그리고 이러한 서술방식을 '아이러니'라고 표현했는데, 사물의 상반되는 두 측면을 다룰 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음으로써 양면을 모두 볼 수 있게 해주는 서술 방식이다. 즉, 양극적 모순 속에서 깊은 고뇌를 통해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토마스 만의 산문 정신이자 소설 기법인 것이다.

1912년, 37세 때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을 발표한다. 소설은 탁월한 예술가인 '에센바하'가 베네치아에서 만난 미소년 '타치오'에게 반해 예술가적인 냉정함을 잃고 타치오와 인간적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무기력과 탈진상태에서 죽음에 이른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쇼펜하우어, 바그너, 니체의 영향을 받았는데 쇼펜하우어로부터는 염세주의를, 바그너로부터는 '음악에 대한 도취를 통한 죽음에의 동경'을, 니체로부터는 '삶의 이념'을 물려받는다.


한편, 토마스 만의 형 하인리히 만(1871~1950)은 독일 시민 계급의 봉건적 노예근성과 비민주적 사고 방식을 날카롭게 풍자하고 비판하였다. 그는 권위주의적 국가와 파시즘의 폭정에 반대했기 때문에 사회 참여적인 프랑스 문학에 가까왔다. 반면, 토마스 만은 초기에 정신적, 미학적 문제에만 집중했다.

1918년 토마스 만은 <한 비정치인의 고찰>이라는 책에서 보수주의적이고 국수주의적 면모를 보인다. 이러한 두 진영의 논쟁을 독일 문학사에서는 <형제 논쟁>이라 부른다. 

하지만 1924년, 토마스 만이 49세가 될 때 큰 변화가 일어나는 데 장편소설 <마의 산>을 발표하면서 부터였다. <마의 산>에서도 과거에 중요시 하던 '시민성과 예술성', '생과 죽음', '문명과 야만' 등 양극적인 문제를 놓고 고뇌하는 모습이 나오지만 과거의 많은 것들과의 결별이 드러난다. <마의 산>에서 주인공 한스 카스토르프의 입을 빌려 "인간은 선과 사랑을 위해 결코 죽음에 자기 사고의 지배권을 내주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게 함으로써 현실 참여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특히 1차 세계대전을 다룸으로써 사회와 시대를 분석하기 시작한다.

1930년, 55세가 되던 해 발표한 <마리오와 마술사>라는 단편소설에서는 나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그렸고, 나치 반대 강연에도 나선다. 그러던 중 1933년, 토마스 만이 스위스에 있을 때 나치가 집권하고 토마스 만은  귀국을 포기하게 된다. 1938년까지 스위스에서 지내던 그는 미국으로 망명한다. 형과 화해한 토마스 만은 1940년부터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이라는 방송에서 연설을 했다. 창작 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고, 망명해 온 작가들에게 생활비 지원 등 많은 도움을 준다. 그 중에는 브레히트도 있었다.

1943년, <요셉과 그 형제들>이 발표된다. 토마스 만은 나치의 폭정이 너무 가혹해서 직접 거기에 저항하는 묘사를 하는 것은 별 효과가 없다고 생각하였기에 유대 정신을 그려 나치의 반유대감정과 교묘히 대비시켜 그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하였다. 이와 비견되는 작품이 1939년에 발표된 <바이마르의 로테>라는 소설이다. 괴테가 바이마르 공화국의 재상이 되었을 무렵 로테가 그녀의 딸과 바이마르에 와서 괴테와 만나고 돌아가기까지의 이야기인데 여기서도 역시 나치의 박해를 직접적으로 다루진 않는다. 하지만 토마스 만은 이런 내용을 통해 나치의 야만성을 유럽 문화의 신화적 세계와 찬란한 독일 문화의 전성시대와 비교하고자 하였다.

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던 1943년 독일 망명 문학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는 <파우스트 박사>를 집필하고 1947년에 발표한다. 부제목은 '한 친구가 이야기하는 독일 작곡가 아드리안 레버퀸의 생애'였는데 이 소설에서도 나치의 박해와 야만성은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천재적 음악가 아드리안 레버퀸은 더 이상 새로운 창작을 할 수 없게 되자 악마와 계약하게 된다. 즉, 의식적으로 성병에 감염되는 것이다. 토마스 만은 독일인의 성정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은 음악이라 생각하였다.

1951년 <선택받은 사람들>을 발표한다. 근친상간이라는 죄를 지은 죄인이 속죄 후 신의 은총을 받고 교황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후로도 1953년 <기만당한 여인>등 몇 작품을 발표하지만 이 시기 그가 가장 아끼는 작품은 <파우스트 박사>였다. 이후로도 활발한 강연 활동을 벌이다가 1955년 8월 22일 혈전증으로 취리히 시립병원에서 생을 마감했고, 취리히 근교 소도시 교회 묘지에 안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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