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가 된 엘레나
양유정 지음 / 현대문학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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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리>

 

첸은 펑펑 내리는 눈을 뚫고 이틀을 꼬박 걸었다. 비처럼 쏟아지던 네이팜탄과 새카맣게 타버린 동료의 시체 더미만 간간히 기억날 뿐, 정신은 멍한 상태다.

첸은 38선을 넘기 전 미군에게서 노획한 M-20을 떠맡았고, 그 무기가 이유가 되어 자살특공대에 차출 된다. 랴오, 유엔, 뤄, 그리고 첸, 네 명이었다. 

상관은 포로 한 명과 박격포를 건네주며 미군을 지체시키라고 했다. 훈장과 영웅칭호를 약속하며.

넷은 머리를 짜내 미군 포로를 길 한 가운에 묶어두고 전차부대의 선두가 속도를 줄이면 공격할 계획을 세운다. 

첸은 수십 대의 탱크를 파괴시키고 살아남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 계획은 자살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미군 전차부대가 나타나자 넷은 M-20과 박격포로 공격을 퍼붓는다. 정신없는 포성과 총성이 오간 뒤, 랴오가 미친듯이 탱크로 돌격한다. 

첸은 살기위해 도망친다. 눈이 이렇게 많이 내리는 것을 첸은 지금껏 본 적이 없었다. 


<9월, 시에라리온>

 

나, 마르셀 라시튀드는 <세계>라는 프랑스 일간지 기자다. 나는 1988년 9월 갑작스런 연락을 받고 내전의 나라 시에라리온으로 이동한다. 그곳의 특파원 피에르가 아파서 더 이상 임무를 수행할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현지에서 마중나온 미셸 그리에는 파충류를 연구하는 동물학자로 캄비아 도마뱀을 연구한다고 했다. 미셸은 캄비아 도마뱀과 관련한 흥미로운 목격담을 들려주는데, 어느 날 도마뱀 오백 마리가 대열을 지은 뒤 패를 갈라 싸우더니 백마리 정도로 줄어들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뿔뿔이 흩어졌다는 내용이었다. 먹이도 풍부했고 구역 싸움도 아니었다. 미셸은 도마뱀의 싸움이 마치 시에라리온의 정부군과 반군의 싸움 같았다고 했다.

미셸은 또 말했다. 피에르가 펜뎀부의 대량 학살 사건을 목숨 목숨 걸고 취재했지만, 단 여섯 줄 짜리 일 단 기사밖에 나오지 않았다고. 사람들은 백 미터 달리기에서 누가 금메달을 따느냐에 더 관심이 많을 거라고 했다.

지사에 가보니 피에르는 건강해 보였다. 피에르 역시 올림픽엔 스물 다섯 명의 기자가 파견되지만, 이곳에서는 기자 하나 달랑 보냈다며 투덜댔다. 기자가 사망해야 오히려 특종이 될 것이라면서.

사실 피에르는 장 폴렝이라는 부사장 아들 때문에 시에라리온으로 오게 된 것이었고, 이질을 핑계로 퇴사하고 싶어했다. 

며칠 뒤 내전이 격화되어 본사가 폭격 당하고, 피에르와 미셸이 사망한다. 나는 '본사 기자 피에르 드 수삐흐, 내전의 와중에서 순직'이라는 이름의 기사를 작성한다. 사람들은 하루 동안 올림픽 대신 아프리카의 이상한 나라에서 프랑스제 무기에 의해 죽임을 당한 동포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 줄 것이다. 하지만 다음 날에는 언제나 그랬듯 까맣게 잊어버릴 것이다.


<팔미도 등대>

 

사람들은 백씨의 아버지가 일제 앞잡이라고 했다. 쌀과 광물을 실은 배가 인천항엣에서 무사히 일본으로 갈 수 있도록 길을 비추어주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아들 백씨도 등대지기였다.

어느 날 백씨 집으로 두 명의 삼십 대 남자가 찾아와 성조기를 꺼내 보이며 자신들이 미국 이십사 군단 켈로부대 소속 정보장교라고 말한다. 그들은 결연한 표정으로 백씨에게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등대를 비춰달라고 부탁한다.

백씨는 종민을 설득해 거사를 하려 하지만 정작 종민은 거부한다. 

'난 형님 아버지처럼 일본 배배를 비추지도 안않을 거고, 형님처럼 미국 배를 비추지도 않을 겁니다.' 라는 말을 하는 종민에게 백씨는 비난을 퍼붓는다. 하지만 종민은 '난 우리나라 사람이에요. 남쪽도 북쪽도 아닙니다' 라는 무뚝뚝한 말을 남긴 채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2003년 5월 31일. 대한민국 정보통신부는 180만 장의 '등대 설치 100주년 기념' 우표를 발행한다. 우표에 그려진 등대는 인천 앞바다 팔미도 섬의 등대이다.

  

<Djibouti>

 

Jun은 아프리카 동부의 지부티Djibouti의 이름을 네 번 들었다. 첫번째 들은 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 때 남자마라톤 동메달 아메드 살라 라는 선수의 출신국가를 들었을 때였다. 두번째는 앙드레 말로의 장편소설 <왕도>에서였고, 세번째는 영국 BBC에서 만든 <인류의 기원>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였다.

마지막은 일주일 전, 친구 J가 보낸 편지에서였다. J는 50만 달러가 필요하니 지부티의 쉐라톤 호텔로 전화하라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편지에 썼다. J는 살인 용의자로 도주 중이었다.

나는 잘 나가는 회사 때려치고 지부티 행 비행기에 오른다. 하지만 비행기 엔진이 폭발하고 예멘에 불시착한다. 선착장에서 배를 얻어 타고 지부티로 간 뒤 닛산 자동차를 구입해 호텔로 간 나는 J를 살해한다. 아무도 Jun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고, 신경도 쓰지 않았다. 살해 뒤 Jun은 장애물이 없는 도로를 뜻 대로 달렸다. 누구도 간섭할 자는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발굴>

 

불도저 기사가 터 파기를 하다 군인으로 보이는 유골을 발견한다. 대구시청 무문화재워원회, 건축과장, 국방부 정훈기획관실, 문화재청, 기자 등이 몰려온다. 발견된 시체가 중공군인지, 북한군인지, 아니면 일본군인지 의견이 분분했다. 부장은 나에게 보고서 작성 임무를 시달한 뒤 소장과 술을 푸러 가버린다. 군복에서 나온 사진을 토대로 그들의 신분을 추정하고, 도서관에서 관련 도서를 뒤져 보고서를 작성하려 애쓴다. 그 와중에 일본 후지TV 기자들이 냄새를 맡아 사건은 요령부득이 되고 만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일 저녁은 딸 지희와 무슨 일이 있어도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한다.


<1월 1일>

 

4천 년 전 북서쪽 바다에 오십명 가량의 민초가 사는 마을이 있었다. 그 곳에서는 100년에 한 번 용이 나타났는데, 무명씨가 용의 먹이가 되고 만다. 무명씨의 아내도 슬픔을 못 이겨 바다로 걸어들어가 목숨을 던지고 만다. 


오슬로발 비행기에서 소영씨는 <1월 1일>이라는 이름의 단편소설을 읽고 있다. 스물아홉이고, 2천년에 서른이 된다. 2년 전 결혼 했지만 최근 권태를 느껴 훌쩍 여행을 떠난 것이다. 

그때 비행기에 소동이 일어난다. 에어 프랑스 스튜어디스의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털보의 손에 끌려 나왔다. 털보는 자신이 제이미라고 소개한 뒤 수류탄을 보여주며 비행기를 잭슨 폴록과 같은 예술작품으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잠시 감상에 빠져 이틀 전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에서. 압생트라는 그림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동양여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여자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었다고 털보는 말하더니, 이내 그런 여자가 왜 자기 따위와 말이나 섞겠냐고 조소한다. 소영씨는 그 여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지만, 털보가 폭발 버튼을 누른다. 


다시 북서쪽 바다 마을로 돌아가서 곽씨라는 사람의 제안으로 마을 사람들은 무명 씨 아내 몸을 잘라 먹은 뒤 애도하며 액막음을 했다고 생각한다. 

 

<지평리 가는 길>


크롬베즈 대령이 출발을 명령한 뒤 전차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L중대의 베렛 대위는 부원들에게 탱크에 올라타라고 지시한다. 탱크 위에 올라 탄 자신의 병사들은 중공군의 표적이 될 것이다. 그들의 희생으로 전차부대는 저지선을 돌파할 것이다.

얼마 뒤 중공군의 총탄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부대원들이 하나 둘 총에 맞아 전차에서 떨어진다. 베렛 대위도 총에 맞아 전차 위에 눕는다. 한참을 하늘을 보고 있으니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수많은 눈송이들과 함께 흐린 하늘 속을 이리저리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희생양>

 

1. 라카엘랑라와 네그로스의 축제

 

사람을 가축처럼 키우는 원시부족민이 있었다. 추장이 소녀와 성행위를 해서 희생양 낳으면 사육했다. 그들은 희생양의 사지를 절단해 제사를 지냈다. 그들은 단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악을 제거함으로써 부족을 구성하는 모든 이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네그로스 섬 원주민들은 일 년에 단 한 명의 희생양을 낸다. 그에 반해 유럽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희생양이 필요하다.


2. 존의 희망과 절망

 

모파상 같은 위대한 작가가 되는게 꿈이던 존이 참전한다. 그러다 아군끼리 총질을 해서 많은 수의 병사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다섯 명의 희생양을 고르는데 존이 거기에 끼게 된다. 존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인간으로서의 나 자신뿐이다. 조국이 무엇이고 애국이 다 무어란 말이냐' 라고 수기에 적는다.


3. 마녀가 된 엘레나

 

동생 미구엘이 절벽에 오르다 떨어져 엘레나와 부딪힌다.  이 사고로 엘레나의 이마에 상처가 생기는데, 이 사건 뒤로 그녀의 외모가 추하게 변해버린다. 엘레나는 시집가는 것도 포기하고 세상을 저주하며 홀로 살아간다. 산티아고의 대지진이 나자 사람들은 엘레나를 마녀로 몰아 화형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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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유정은 1971년 대구 출생으로 계명대 경제학과 졸업 후 199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하였다. <마녀가 된 엘레나>는 작가의 첫 창작집인데, 신인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소재를 다루는 기법이 가볍지 않고, 이야기 전체를 끌고 나가는 힘도 상당하다.


작가는 국가(또는 전체)의 욕망과 개인의 욕망이 일치하지 못하는 지점을 포착하여 소설의 실마리를 풀어 나간다.

개인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은 뭐니뭐니 해도 목숨이다. 그런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극한의 능동성을 요구한다. 욕망, 가치관, 명분, 도덕 등이 모두 합치 된다 해도 일말의 주저함 없이 목숨을 내놓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우연이나 상황논리가 내 목숨을 요구할 때 개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저항해야 한다. 우물쭈물 하거나 그럴싸한 말들에 휘둘릴 때가 아니다.

하지만 전쟁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은 종종 개인의 목숨을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그리고 목숨값으로 영웅 칭호니, 진실이니, 희생이니 하는 따위의 공허한 말들을 내놓는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1437418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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