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테스크
기리노 나쓰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화자인 '나'는 스위스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로, 못생긴 외모를 가진 '악의'에 찬 인물이다. 반면 동생 유리코는 어떤 남자라도 단번에 반하게 만들만한 가공할 '미모'의 소유자였다.

동급생 미쓰루는 뛰어난 '지능'의 소유자였지만 어머니가 물장사를 했기 때문에 급우들이 쑥덕거렸고, 또 다른 동급생 가즈에는 외모나 지능이 최고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노력'으로 그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다소 순진한 학생이었다.


이야기는 '나'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 스위스로 돌아가면서 시작된다. '나'는 일본에 남기로 결정하는데, 어머니와 아버지는 외모가 아름다운 유리코를 싸고 돌았고 '나'는 주워온 아이처럼 취급했기 때문이었다. 외할아버지 집에 들어가 갖은 노력을 다해 일류사립학교에 입학한 '나'는 지긋지긋한 가족들과 떨어져 독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기뻐하지만, 그런 해방감은 오래가지 않는다. 스위스에서 어머니가 자살하자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재혼하고, 이로써 오갈데 없어진 유리코가 일본으로 돌아온 것이다.

유리코는 뛰어난 외모 덕에 외국인 가정에 입양되고, 역시 외국인 전형으로 '내'가 다니는 일류사립학교에 손쉽게 편입한다. 

그녀의 '괴물'과 같은 미모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다. 남자들은 그녀에게 돈을 주고 몸을 사기 위해 안달이 났고, 여자들은 그녀와 비슷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가즈에는 노력만 있으면 뭐든 이룰 수 있다고 믿어왔지만, 그녀의 외모가 해낼 수 있는 일들 앞에 금새 무릎 꿇고 만다. '나'는 유리코 때문에 평온한 삶에 균열이 가고 있다고 느꼈고, 이에 그녀의 매춘 행위를 폭로하는 투서를 학교에 보낸다. 유리코는 퇴학을 당한다. 자매의 인연은 이로써 끊기는 듯 했다.


고등학교를 마친 뒤 그저그런 대학을 졸업한 '나'는 구청에 무기계약직 일자리를 얻어 한가롭게 살아간다. 그러다 유리코와 가즈에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둘 다 매춘을 하다가 죽었다고 했다. 피해자 가족이므로 재판에서 증언을 했고, 법원을 나서다가 미쓰루를 만난다. 

미쓰루는 학창시절 뛰어난 머리로 매번 1등을 놓치지 않던 수재였다. 도쿄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어 출세가도를 달릴 것 같았던 그녀는 지금 출소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어머니, 남편과 함께 수상쩍은 사이비 종교에 빠져 대량살상에 관여한 혐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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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3월 도쿄의 번화가 한 아파트에서 미모의 여성이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된다. 경찰 조사 결과 이 여성은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 동경전력에서 간부로 근무 중이던 39세의 여성으로 밝혀진다.

기이한 점은 번듯한 직장을 가진 그녀가 퇴근 후에는 번화가 뒷골목에서 지나가는 남성을 상대로 매춘 행위를 했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부랑자와 외국인 노동자도 가리지 않았고, 돈이 없다고 하면 푼돈에도 몸을 팔았다. "있는 대로 주면 된다.", "얼마든 상관 없다.", "아무데서나 해도 된다.". 그녀가 손님들에게 했던 말들이라고 한다.

얼마 뒤 유력한 용의자로 불법 체류중인 네팔인 마이나리가 경찰에 체포되어 10개월 동안의 재판을 거쳐 1심 무죄, 2심 무기징역, 그리고 6년 뒤 2003년 10월 대법원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이것이 바로 <동경전력 여사원 매춘부 살인사건>이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왜 좋은 학력과 번듯한 직장을 가진 여성이 매춘을 일삼았을까?" 였다. 기리노 나쓰오는 이 궁금증에서 시작하여 긴 장편을 구상했고, 유리코라는 압도적인 미모의 여성을 창조해낸다.

소설에서 미쓰루와 가즈에는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어떤 식으로든 자리 잡기 위해 노력한다. 미쓰루는 '지능'을 무기로 전문직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가즈에는 일정 수준의 '미모'와 '학력'을 '노력'을 통해 갖추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이런 노력들이 유리코의 압도적인 미모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미모를 활용해서 '남성'의 힘을 요구하기만 하면 됐던 것이다. 이런 부조리 때문에 가즈에와 미쓰루의 삶은 기형적으로 변해버린다.

그리고 그런 부조리를 어릴 적부터 경험했던 '나'는 '악의' 와 '위악'을 무기로 남자들과 일절 관여하지 않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게임 자체를 거부해버린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질문을 바꿔보면 어떨까? '왜 그녀는 매춘을 했을까?' 가 아니라 '왜 그녀는 푼돈에도 몸을 팔았을까?'로. 그녀는 수많은 남자와 잤지만, 단 한번도 연애는 하지 못했다. 돈을 주고 받지 않고 성을 주고 받는 상황. 사실 그것이 연애 아닌가. 돈을 받으면 받을수록 공허해지는 관계가 싫었기 때문에 되는대로, 아무데서라도, 라는 절망적인 말이 그녀의 입에서 나왔던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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