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여자친구의 장례식 - 개정판
이응준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Lemon Tree>


대학을 졸업하고 두해 정도 빈둥댈 때 사귀었던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녀와 '나'는 호신술 강좌에서 만났다. 그녀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내'가 그녀처럼 병들었다는 것을 간파했다. 그녀는 피터, 폴 앤 메리의 <Lemon Tree>를 들려주며 장래 꿈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사실 '나'는 그 노래를 들으면서 그녀와 어떤 식으로 헤어질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얼마 뒤, 동물원에 갔다가 '나'는 그녀의 사진기를 놓아두고 왔다며 화장실을 되짚어 간다. 그 길로 그녀에게 돌아가지 않을 셈이었다. 그녀는 얼마간 기다리다 '나'의 의도를 알아채고 동물원 출구로 걸어간다. 그녀와는 그렇게 헤어졌다. '나'는 며칠 뒤 사진기 속에 필름이 들어있지 않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그녀가 서른이 넘은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두돌이 지난 딸이 있고, 열두살 차이 나는 전도사 남편이 있다고 재잘댔다.

그 다음 만남에서 '나'는 그녀에게 최면을 걸어 그녀가 '나'를 찾은 진정한 이유를 묻는다. 뜻밖에도 그녀는 남편이나 아이에 관한 말은 모두 거짓말이라 했다. 그리고 '나'를 찾아온 이유에 대해서는 서른이 넘은 어느 날, 문득 과거에 사귀었던 '내'가 여전히 자신처럼 별수 없이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진정하고 싶고 해낼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았는지 궁금했노라 말한다. '나'는 돌려주려다 돌려주지 못한 카메라를 만지작 거리며 '아무것도 아닐 순 없다'고 생각한다.


<이교도의 풍경>


전도 유망했던 판화가이자 문화비평가 구문모가 작년 9월 29일 자신의 아파트에서 음독자살한다. 그는 80년대에는 운동권이었고, 소련이 패망한 뒤에는 <새로운 세계, 새로운 희망>이라는 책을 써 '후기자본주의적 증후군들을 빛나게 갈파했다'고 격찬받으며 변신에 성공한 인물이었다.

어쨌든 그로부터 소포가 하나 배달되어 왔는데, 거기에는 옥해(獄海)라는 다소 묘한 지명에 가서 소포를 전달해달라는 부탁이 쓰여 있었다.

소포를 보관하던 '나'는 반년이 지나서야 옥해로 간다. 옥해에서 다방 여급과 하룻밤 연정을 나눈 다음 날, 지정한 주소로 찾아갔지만 만나야 할 주선욱은 '나'를 피하는 눈치였다. 여동생에게 사정을 설명했지만 그녀의 태도도 아리송했다. 얼마 뒤 그녀를 통해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나'는 구문모가 사랑했던 사람이 동성의 주선욱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는 문득 숨을 헐떡이며 육지로 올라오려는 애처로운 표정의, 낙타가 그리워 사막을 가는 무모한 고래를 떠올린다.


<내 가슴으로 혜성이 날아들던 날 밤의 이야기>


'나'는 인문계 사립고등학교에 뺑뺑이로 들어갔지만 2학년이 되자 간단한 테스트를 거쳐, 중요 과목의 수업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시간을 미대 진학반 작업실에서 보냈다. 길수형은 당시 미술반의 선배였다.

길수형은 미술 선생님이 지정해 주신 수채화 데생말고도, 입시엔 필요하지도 않은 유화를 자주 그렸다. 유화는 수채화와 달리 어두운 색에서 시작해 윗부분으로 갈수록 밝은 색으로 칠해가는게 기본 기법이다. '나'는 삶이 유화처럼, 세상의 바탕을 마땅히 고통스럽고, 슬프고, 쓸쓸하고, 외로운, 곧 어둠의 색으로 인정해야 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 길수 형의 가방을 충동적으로 뒤져 스케치북을 본 적이 있었다. 스케치북에는 풍만하고 아름다운 여자들이 기름기 흐르는 근육질의 남자들과 갖가지 포즈로 성교를 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한동안 넋이 나가 있던 나를 발견한 길수형이 분노로 이글거리며 다가와 따귀를 갈겼고,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나'는 내게서 '무엇'이 빠져 나가고, '또다른 무엇'이 들어오는 희안한 체험을 하게 된다.

결핵이 의심되는 고열에 시달린 뒤, '나'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된다. 그림 그리는 법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이다.

'나'는 그 뒤 카메라 기자가 되었고, 소연이라는 아가씨와 사귀게 되지만 언제나 과거의 경험 때문에 종종 '다른 사람' 처럼 행동하게 되고, 소연은 그런 '나'에게 미국자리공이라는 귀화식물에 대해 이야기 한다.

다시 길수형 이야기로 돌아가, 길수형은 비박(Biwak)을 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산을 제대로 알 수 없는 법이라 했다. 산의 신비와 밤의 어둠, 그리고 턱을 들면 바라다보이는 하늘의 무한한 깊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박을 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길수 형은 에베레스트로 갔고,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혜성 햐쿠타케가 지구를 스쳐지나가던 시기에, 과거의 경험을 다시 반복한다. 소연은 '나'를 떠났다.

인생이 비의(秘意)로 가득찬 오지라면, 그래서 우리 모두가 탐험가라면, 이제 '나'는 천공에 달려 비박을 하는 사람으로 뭔가에 들떠 잠 못 들 준비가 되어 있는 참이라고 느꼈다.


<그녀에게 경배하시오>


'나'와 s는 록 카페에서 만났는데 '내'가 그녀의 직업을 단박에 알아맞혀 가까워지게 되었다. s는 불가사리다. 그녀가 먹어치운 쇳덩어리가 경비행기 한 대 분량쯤 된다. 어렸을 적에 소아마비로 다리를 절었기 때문에 특별한 능력을 아이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는데, 마침 쇠를 먹어치워도 괜찮을 만큼 위벽이 두껍고 위산분비가 잘 됐다고 했다. 그녀는 춘천에서 왔는데, 이제는 미국에 가서 한대수를 만나겠다고 했다. 유독 '왜'만 'why'로 치환해서 말하는 말버릇을 가진 s.

일요일 이른 아침 T를 만난다. T의 부친은 입시 재벌이다. 최근 '나'는 동성애자인 T의 약점을 들춰내는 작자를 몽키스패너로 작살내준 적이 있다. 그걸 빌미로 돈을 우려낸 날, 집 부근에 스포츠 머리 형사들이 어른거렸다. '나'는 받은 돈을 s에게 주며 그녀의 행복을 빌어준다. 얼마 뒤 식당에서 나는 벽에 걸린 TV에서 s가 <기인열전>에 출연해 쇳덩어리를 먹는 장면을 본다. '나'는 결코 s를 비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미 어둠의 계보를 알고 있었다>


수영이 이 달 말에 미니애폴리스로 간다고 선언한다. 그녀는 주립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할 예정이고, 멋진 자동차도 몰겠다고 했다. 수영은 준기의 여자친구였고, 준기는 죽었다.

사업으로 성공한 '형'은 '나'를 철부지 취급하며 인생의 비밀을 안다는 듯이 잘난 척 했고, 진득하니 사업이나 배우라고 했다. '나'는 그런 형 앞에서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지만, 사업을 배울 생각은 없었다. 대학원에 복학한다. 종교학과 대학원생은 미오와 '나' 둘 뿐이었다. 미오는 냉장고니, 라디오니 하는 걸 어디선가 주워와서 뚝딱뚝딱 고치는 재주가 있었다. 미오와 '나'는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티벳의 천장(天葬)이니 견장(犬葬)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이야기 끝에 미오는 한의사가 되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미오에 대해 알 수 없다고 느끼고, 그런 '나'에게 미오는 시절인연(時節因緣)이니, 줄탁동기(啐啄同機)니 해가며 또 알 수 없는 소리를 뇌까렸다.

문득, 준기와 무당을 찾아갔던 때가 떠오른다. 무당은 준기에게 '이미 없는 놈' 이라고 했고, '나'에게는 '허송세월 하다 서른다섯 넘어 뭘 끄적거리는게 성과가 있을거' 라고 했다.

수영으로부터 엽서가 날아들었다. 수영은 포르쉐를 몰고 싶다 했지만 기껏 1990년산 폭스바겐을 밤이면 있는 대로 밟고 다닌다고 한다. '나'는 아무렴 어떠랴 하는 심정이었다.

미오가 어디서 고물 오토바이를 구해서 고쳐왔다. '나'와 미오, 그리고 철학과 조교 정아씨, 이렇게 다 큰 어른 셋이 오토바이를 타고 살곶이 다리까지 간다. 셋은 그곳에서 쓸쓸한 대화를 나눈다.

학교에서 한총련 출범식이 열리자 경찰은 학교의 모든 통로를 차단했다. 그에 맞서는 학생들은 연일 강도 높은 시위를 해댔다. 전경이 한차례 밀어닥쳤고, 앳된 신입생 하나가 다리를 다쳐 피를 흘렸다. '나'는 그 학생을 치료한 뒤 헌 신발을 내주었다. 학생은 종교학은 뭘 공부하느냐고 묻고, '나'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앳된 신입생이 경영학과에 다닌다길래 '나' 역시 그건 뭐하는 건지 묻고, 학생은 '지도 몰라예' 한다. 둘은 한참을 웃었다. '나'는 외롭기 때문에 낯선 이에게 약을 발라주고, 붕대를 묶어주고, 수건과 비누를 건네주었음을 깨닫는다.

전경이 학교로 들어오진 않았지만 전경 하나가 페퍼포그 차에 깔려 죽었고, 무고한 시민이 프락치로 몰려 학생들에게 맞아 죽었다.

미오의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날아온다. 그날 '내'가 느낀 감정은 놀랍게도 절친한 친구의 불행에 대한 걱정이라든가 동정이 아니라, 일종의 설렘이라는 것이 이해하기 힘들었다. 교문으로 이어진 가파른 언덕을 내려가다 정아를 본다. 그녀가 매우 특별해 보인다는 것이 놀랍다. 살다 보면,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오직 한 사람이 떠난 것일 뿐인데도, 마치 전 세계가 송두리째 상실된 듯한 기분이 드는 때가 있다. 그러나 뿌듯한 사랑은 반드시 찾아오고, '나'는 그 불꽃스런 힘을 그 순간 느꼈다.


<지평선에서 헤어지다>


독일 유학 당시 알고 지내던 진석 형이 임서현이 결혼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온다, 남자의 직업은 의사고, 재혼이라 했다. 당시 '나'는 독일 유학에서 돌아와 잘 팔리지 않는 남성전용잡지를 만들고 있었다. 곧 실업자가 될 예정이었고, 임서현의 소식으로 다소 우울한 감정을 느낀다.


독일로 떠난 것은 유학생활을 가장한 사치스런 유람이자 먼 곳으로의 정처없는 도피생활이었다. 가자마자 외로움을 심하게 느꼈다. 어느 날, 여섯 시간 동안 접시를 닦아 돈을 벌었다. 아는 사람과 진탕 술을 마시고 싶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고, 우연히 한인 감리교회를 통해 알게된 임서현과 술을 마시게 된다. 임서현과 나는 그날 꽤나 죽이 맞아서 오랫동안 얘기했는데, 그녀가 자기가 쓴 동화를 들려주었다. 내용은 이랬다.

아이들만 사는 별이 있는데, 남극과 북극에 샘물이 하나씩 있었다. 사내아이는 남극에서, 계집아이는 북극에서 물을 떠 마셔야 어른이 될 수 있었다. 사랑하는 소년과 소녀가 있었는데 그들은 어른이 되어 사랑을 이루고 싶었다. 둘은 지평선에서 각각 북극과 남극으로 길을 떠난다. 

왜 하필이면 지평선에서 떠났느냐고 '내가 묻자 임서현은 지평선에서 헤어져야 그들이 멀어져가는 모습을 누군가 가장 오래 지켜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임서현 7년 사귄 남자가 있다 했다. 그날 밤, '나'는 전철을 놓쳤고, 서현은 자신의 현관문을 열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야윈 등으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얼마 뒤 외로움이 사무쳐 그녀에게 전화를 건다. 그녀는 오라 했지만, 현관문은 열리지 않았다.

서울로 돌아온 뒤 멀리서 흐느끼는 전화가 걸려온다. 그녀였던 것 같다.


결혼식이 끝난 뒤에야 도착한 '나'는 신부화장을 한 그녀를 본다. 무엇인가, 그녀의 맨살에 머물던 그 시절의 외로움을 요령껏 아름답게 감추고 있었지만, 찬찬히 살펴본 그녀는 결국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이고, 그러하기에 영원히 '내'가 알지 못하는 그녀였다.


<내 여자친구의 장례식>


장례버스는 해저물 녘 우리를 서울역 광장에 떨어뜨려 놓았다. 다들 쭈뼛쭈뼛 눈치를 살피다가 종로통으로 몰려갔다.


심병삼씨는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가 주는 교훈이 '누군가를 거짓말할 정도로 고독하게 만들면 불행한 일이 생긴다' 라고 독특한 해석을 할 줄 알았다. 그는 Ernest Hemingway라는 이름의 카페를 경영하면서 커피 감음회를 열었다. 거기엔 사진작가, 서양미술사 교수, 오토바이 수리공, 사법고시생, 공인중개사, 피혁공장 사장, 동물병원 원장 등이 드나들었다.


은희는 연극배우였다. 그녀와 '나'는 어느 날 문예회관 대극장 옥상 문 앞에서 관계를 한 적이 있다. 은희의 요구였다. '기념식수'라는 알 듯 모를 듯한 말은 일주일 뒤 파혼이라는 통고로 의미가 명확해진다.


심병삼씨가 죽고, 드나들던 사람들이 경찰에 불려가서 조사를 받는다. 알고보니 그들은 커피를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감음회는 심심파적이었던 것 같다.


휴대폰을 꺼내 은희에게 전화를 건다. 너의 장례식에 다녀왔다고, 청혼했던게 사실인지 거짓인지 궁금하다고, 어짜피 너와 행복하지 못했을 것 같으니 헤념하는게 나을지 궁금하다고 중얼거린다. 문득 은희는 쓸쓸한 양치기 소년이고, '나'는 아랫마을의 무심한 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


 

2000년 전후 소설들을 관통하는 묘한 정서가 있다. 쓸쓸함, 외로움, 죽음, 이별 등을 주조로 한 고즈넉한 정서. 한 시대가 끝나고, 희망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면 사람들은 실존주의에 경도되는지도 모르겠다.

이응준은 매우 시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작가인데, 다소 기교적으로 흐르는 곳이 눈에 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개똥벌레>와 <노르웨이의 숲>을 연상시키는 곳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어둠의 계보를 알고 있었다>는 마음에 와 닿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