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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에 속지 마라 - 내 안의 불안을 먹고 자라는 심리학의 진실
스티브 아얀 지음, 손희주 옮김 / 부키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About Time

예전 고스트스테이션이라는 라디오(와 인터넷을 오가던) 방송에서 신해철이 자주 했던 말이 '우리 같이 이 방송을 들으면서 하루 24분의 1을 낭비하자' 였습니다.
대충 기억해보자면 '인생의 모든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서 자기를 계발해야 하고 뭐 다 좋고 그게 선의에서 그런것이라고 생각해줄 수도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만 살 수 있냐. 
그냥 아무 생각도 없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1시간 정도는 걍 낭비하자. 이 방송이 그 시간의 배경이 되어주겠다.' 이런 얘기였지요.

책을 읽다가 문득 한동안 잊고 있었던 이 좌우명을 다시금 가슴에 새겨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낭비할 수 있는 1시간을 확보하려면 지금 그만 써야겠네요. 

- 중지 -

자, 다시 씁니다. 

팟캐스트를 듣다보면 당연히 녹음방송인 탓에 진행자들은 '잠깐 쉬고 오겠습니다' 해도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짧은 효과음 한번 나오고 방송은 그대로 진행되는 것처럼 들립니다. 
진행자가 쉬는 시간을 리얼 타임으로 녹음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저 '중지'라고 쓴 이후 지금까지 제게는 이틀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읽는 분들은 기껏해야 한 3초나 흘렀겠지요.

당연해서 당연하고 당연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당연하게도. 
시간은 각자에게 따로 흐릅니다.

심리학책을 읽고 나서 웬 시간 타령인가 싶습니다만 제게 이 책은 시간에 관한 얘기가 되었습니다.


About Time - 열네 살

이거 만화 제목입니다. 
40대 남자가 어쩌다가 중학생 시절의 자신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기억을 더듬어 보니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고 사라졌던 직전 어느 즈음입니다. 
결국 떠나는 순간의 아버지를 붙잡고 물어 보지만 딱히 정확한 대답도 없이 아버지는 떠나고 과거는 바뀌지 않습니다.
미래를 기억하는 사람도 다시 돌아온 현재는 바꿀 수 없고 과거는 그대로 다시 현재를 거쳐 미래로 갑니다.

역자의 머릿말을 보면 멋있는 말이 나옵니다. '시간은 본질적으로 비가역적이다.'
무슨 얘긴가 찾아봤는데 정의를 읽어봐도 쉬운 얘기인 듯, 어려운 얘기인 듯 합니다만 뭐 대충 돌아갈 수 없다는 얘기 같습니다.

작게는 콩 외에는 잡곡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잡곡밥 대신 걍 백미밥 먹고 몇 백원이라도 아낄 걸 하는 후회서부터 
크게는 뭐 그때 삐삐 음성 메지시로 사귀자고 했던 건 건 정말 아니었다는 후회까지.

수많은 후회되는 선택들이 있지만 삶을 다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죠. 

그런데 완벽한 자신은 아니지만 제법 닮은 사람이 있습니다. 아직 선택이란 걸 해본적이 없을 정도로 어립니다. 게다가 한 10여년간은 내가 하라는 대로 할 것 같습니다. 
얘라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미래의 기억을 가지고 현재를 사는 완벽한 삶이.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는 삶이.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이 책에서 처음 본 말인데 요 몇일 머리에 자꾸 맴돕니다. 내가 아이와 함께 가는 이 길이 혹시 지옥으로 가는 길은 아닐까. 그 이전에 선의 이기는 할까.
'인간복제를 통해 부모가 자식을 설계하는'건 끔찍하고 '양육을 통해서 자식을 설계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는 근거가 있을까.
매일 밤 책을 읽어주면서 내가 얻으려는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실패하고 실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주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내가 완벽한 부모가 되려고 노력하는 만큼 아이에게도 완벽한 아이가 될 것을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럼 그렇다고 걍 놔둬?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이 책에서도 그러더군요. 당장 해답 같은 건 없다고. 
단지 따로 흐르는 녀석의 시간을 제게 맞추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인생의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것은 자신이다.' 

About Time - 현재를 쥐고 있다는 것

이거 영화 제목입니다.
크리스마스 개봉작을 1주일 전에 봤습니다. 믿고 보는 워킹 타이틀. 
제게 가장 다가왔던 장면은 이제 다시 아버지를 만날 수 없는 상황에서 아버지가 마지막 시간 여행을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온 것은 열 댓살이 된 주인공과 아버지의 산책 장면.
 
커가는 아이와 늙어가는 엄마, 아빠의 매순간이 개별적인 희소성을 가진 마지막 순간임을 계속 상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영화 끝나자마자 애들 유치원, 학원으로 데리러 갔습니다. 뭐 물론 금방 다시 까먹긴 했습니다. 
도대체가 마음대로 안되네요. 내꺼 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다시 하루의 24분의 1 낭비하기

태어나서 뭘 하기로 결심한 것 중 가장 수월하게 목표 달성 중입니다. 침대나 소파에 누워서 탱자 탱자. 
아직 몇년 전에 샀지만 구석에서 먼지만 쌓여가고 있는 기타가, 불과 몇 개월전에 샀던 서바이벌 영어 회화책이, 사놓고 읽지 않은 책들이 은근 눈에 밟히긴 합니다만
하루에 한 시간은 걍 삐대고 있습니다. 이쯤에서 자기 합리화 한토막. 한병철의 '피로사회'관련 책 소개에서 따왔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이 책을 읽은 건 아닙니다..

한병철은 성과사회의 과잉활동, 과잉자극에 맞서 사색적 삶, 영감을 주는 무위와 심심함, 휴식의 가치를 역설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피로’의 개념도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다. 성과사회에서 ‘피로’란 할 수 있는 능력의 감소이고, 그저 극복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무위의 가치에서 출발하는 한병철은 피로가 가진 또 다른 측면을 본다. 피로는 과잉활동의 욕망을 억제하며, 긍정적 정신으로 충만한 자아의 성과주의적 집착을 완화한다. 피로한 자아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자신을 채찍질하는 유아론적 세계에서 벗어나 타자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다. 

뭐 이 정도면 괜찮지 싶습니다. 다들 타세요.


# 재미로 보기: 아버지와 아들 얘기가 나와서 생각난 The Six Ways You'll See Your Dad(번역본으로 봤는데 이건 아니네요.. 짤방으로도 돌아다니니 찾으시면 찾으실 수도 있 ..)


* 밑줄 긋기

# 현실 감각을 잃지 않을 정도라면 자신을 약간 미화하는 일은 자존감 형성에 꼭 필요하다. 이는 실패를 인정해야 할 때와 계획대로 모든것이 잘 돌아가지 않을 때 감정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준다(57)
# 자기계발의 숭배(65페이지)
# 자기 계발에 대한 희망은 삶에서 느낄 수 있는 기쁨의 일부를 빼앗는다.(260p)
# 실수를 저질러도 괜찮다. 일이 흘러가는 대로 놔둘 수 있는 용기는 공포감을 조성하는 일이 수포로 돌아가는 속도에 따라 성장한다.(265p)
# 진지한 것에 대항하기(265p)
# 생각하지 않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지기(266)
# 위험에 대해 용기를 가져라(267)
- 완벽함과 무모함이라는 양 극단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환상적인 가능성이 있다(267)
# 비교는 금물 - 결국은 내 삶이다.(267)
# 제 정신이 아닌 상태도 괜찮다(268)
# `자녀양육프로젝트`를 위해 자신을 심리학적으로 무장하려는 부모의 희망사항은 심각한 잘못을 필하려는 세심함에 의한 것(251)
# 아이는 부모 마음대로 주물럭거려서 만들 수 있는 점토덩어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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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물정의 사회학 - 세속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노명우 지음 / 사계절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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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 강박증'이라는 것이 있답니다. 
어떤 계기로 숨쉬는 것을 의식하게 되면 호흡을 자연스럽게 하지 못하게 되어 스트레스를 받는 증상이라네요.
무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반복되던 호흡이 생경하게 느껴지는 순간.
호흡강박증 환자는 그 순간 이후 자신의 모든 호흡을 되새기고 계획하게 된답니다.

익숙했던 무언가가 갑자기 낯설어지는 그 어느 순간.

‘일을 한다’는 것.

개인적인 사건으로 몇 주간 격렬한 감정상태 였습니다.
폭풍같던 감정의 세기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적응과 평온은 또 이르게 찾아왔고 저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호흡의 생경함을 인식해버린 호흡강박증 환자처럼 순간 순간 낯섭니다. 
직장에서 필요로 하는 건 일을 하는 나인가, 내가 하는 일인가
... 어렵네..

그러면 일단 제일 쉬운 것 부터. '나'에게 '일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임금 노동, 노동자의 운명

* 고대 그리스어로 노동을 의미하는 ponos는 슬픔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 히브리어에서 일을 나타내는 단어와 노예를 나타내는 단어는 동일하다. 
* 라틴어에서 일을 의미하는 단어 labor는 고통이 수반되는 극도의 노력이라는 뜻이다.
* 노동(labour)이라는 단어는 14세기 영어에 최초로 등장했다. 이 단어는 짐을 메고 미끄러지거나 비틀거리는 것을 의미했다.
* 노동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travailles는 라틴어 tripalium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이는 원래 로마군이 사용했던 고문 도구의 일종으로
   세 개의 말뚝을 가리키는 말이며 슬픔과 고통을 뜻한다.
* 중세 독일어로 노동이라는 뜻을 지닌 arbeit는 시련, 박해, 역경, 곤경으로 해석된다. 
* 한국어의 노동(勞動)역시 노력(努力)이며, 그 노력은 고통인 노고(老苦)를 포함하고 있다.


...월급쟁이의 다른 뜻은 월급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 이외에는 먹고살 길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월급은 고용된 사람들에게만 지급된다. 고용되지 않으면 먹고사는 일이 막막해지는 사람들이 해야만 하는 노동, 그 노동이 바로 임금노동이다.
“그에게 있어 삶이란 이러한 활동이 멈출 때, 즉 식탁에서, 선술집 의자에서, 침대에서 시작된다. 이와는 반대로 그에게 있어서 12시간의 노동은 옷감 짜기, 실 뽑기, 구멍 뚫기 등등으로서의 의미는 전혀 없고 그를 식탁으로, 선술집 의자로, 침대로 데려다 주는 벌이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다.”(엥겔스, 잉글랜드 노동계급의 처지 중에서, 노영우 세상물정의 사회학에서 재인용)

그러고 보니 일에 대해 생각해본 기억이 없네요.
일, 직무는 제게 평가나 분석의 대상일지언정 그 자체로 고민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 나름대로는 직장에서의 저와 그 외의 저를 잘 분리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이, 노동이 제 존재를 정의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 상상하지 않았습니다.

‘일주일에 5일간 매일 9시간 이상씩 일을 하고 임금을 받아서 살아가는 임금 노동자'
삶을 시간과 공간의 소비로 봤을 때 지금은 이 이상 저를 객관적으로 잘 설명할 수 있는 건 없겠다 싶습니다.
하루종일 사무실 책상 앞에서 나의 시간과 체력을 팔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아 나와 내 가족의 삶을 이어나가는 것.
제게 일은 먹고 사는 수단입니다. 

‘그는 필요한 생활 수단을 확보하기 위하여 이 생명 활동을 제3자에게 판매한다. 따라서 그의 생명 활동은 그에게는 생존할 수 있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그는 살기 위해서 노동하는 것이다. 그는 노동을 자기 삶으로까지 생각하는 일이 없으며, 오히려 노동은 그의 삶의 희생일 뿐이다. 노동은 그가 제3자에게 넘겨버린 하나의 상품이다. 따라서 그의 활동의 산물 또한 그의 활동의 목적이 아니다.’(같은 책)

제가 팔아야 하는 것은 제 자신과 일 모두네요. 직장에선 일이 나고, 내가 일인 셈입니다. 
지나치게 수동적이고 비관적인가요. 열심히 노력하면 우주가 도와준다고 누가 그러던데.

'다른일을 더 하게 되었으니 이를 성장의 계기로 삼아보라‘시작도 안하고 그러냐 일단 해보고 얘기해라.
개인적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만나봤던 사람 중 몇분이 해주셨던 조언입니다. 
그분들의 성의(?)에도 불구하고 나름 발끈해서 수용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한 문제제기를 이어나가긴 했습니다만.
글쎄요. 전달이 되었을지.

그는 성과사회에 내재하는 시스템의 폭력을 간과하고 이러한 폭력이 심리적 경색을 야기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오직 자기 자신이 되어야한다는 명령이 아니라 성과를 향한 압박이 탈진 우울증을 초래한다.
긍정성의 과잉 상태에 아무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그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한병철, 피로사회)

밥벌이의 지겨움

무슨 얘길 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뭐라도 뱉어내고 나니 시원하네요. 이런게 카타르시스겠죠.(찾아보니 이거 정확한 뜻이 '배설' 이라네요.
어제, 폭풍같은 하루가 지나갔습니다. 인사 이동 소문이 나기 시작한 요 몇일 간, 오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에 저마다의 기대가 그림자처럼 길게 늘어져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네요.
새로운 자리, 새로운 일과 함께 바뀐 듯, 바뀌지 않은 듯, 바뀐 생활을 시작하실 모든 분들의 건투를 빕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근로감독관들아, 제발 인간을 향해서 열심히 일하라고 조져대지 말아 달라. 제발 이제는 좀 쉬라고 말해 달라. 이미 곤죽이 되도록 열심히 했다.  나는 밥벌이를 지겨워하는 모든 사람들이 친구가 되고 싶다. 친구들아,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이걸 잊지 말고 또다시 각자 핸드폰을 차고 거리로 나가서 꾸역꾸역 밥을 벌자. 무슨 도리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김훈, 밥벌이의 지겨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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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의 눈으로 아프리카를 말하지말라 - 한국인의 눈으로 바라본 그래서 더 진실한 아프리카의 역사 이야기 백인의 눈으로 아프리카를 말하지 말라 1
김명주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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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디선가 들어 본 이야기 - 그네들이 보기엔 그 놈이 그놈.

요즘은 뭐하고 사는지 통 보기 힘든 더스틴 호프만이 주인공이었던 '아웃 브레이크'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더스틴 호프만이 다른 나라에서 건너온 원인 모를 전염병에 맞서는 내용이었지요.
영화 속 전염병이 발생한 나라는 아프리카의 어딘가였고 병이 전파되어 난리가 나는 곳은 당연히 미국이었습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이 병의 모델이 ‘에볼라’라고 합니다. 
상황의 유사성 덕에 주요 기사에 따라 붙는 관련 기사에 종종 언급되고 있더군요.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전에도 가끔 우리나라 뉴스에 등장했었습니다.
박찬욱, 김지운 감독의 헐리우드 데뷔, 이병헌의 지아이조 시리즈 주조연급 출연 등이 성사될 때마다 볼 수 있었던
예의 그 '특집, 헐리우드 영화 속 한국, 한국인’ 이런 기사에 항상 언급됐죠.

이 영화에서 병원균의 숙주인 원숭이를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옮긴 사람이 한국인 선원이고 이들이 탄 화물선이 태극호라는 한국 배였거든요.
(한국어 대사도 제법 나왔던 걸로 기억합니다. 오히려 '햄보칼 수가 없어…! 수준보다 낫게.)

그런데 아웃 브레이크 기사를 검색하다 보니 작년에 개봉했던 ‘월드워 Z’에서도 좀비 바이러스의 근원지가 평택 미군기지라는  것까지 나옵니다.
아웃브레이크는 1995년, 월드워 Z는 2013년. 

여기까지 생각하다 문득 떠오르는 영화 하나 더. 컨테이젼. 
또 전염병입니다. 여기에서는 기네스 팰트로가 홍콩 왔다가 전염되고 사망하면서 시작합니다. 
이건 2011년 영화.

왜 더스틴 호프만과 기네스 팰트로를 위협하는 위협하는 전염병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발생하거나 옮기는 것으로 설정되는 걸까요. 
내가 그런 것만 본 건가?

'하얀 제국의 가면' - 박노자

이 책의 제목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올린 건 박노자의 '하얀 가면의 제국'이었습니다. 
책장을 뒤져봤더니 없네요. 그래서 검색했더니 '일제와 미국을 통해 내면화한 우리의 서구 중심주의적 세계관에 대한 내용’이라고 합니다.
내용에 대한 흐릿한 기억과는 달리 책을 읽는 내내 일종의 쇼크상태 였던 기억이 강렬했던지 일맥상통하는 제목을 보니 구미가 당기더군요.

누가 공무원 아니랄까봐 두괄식. 저자는 머리말에서 책을 쓴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 우리에게 알려진 아프리카는 아프리카인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아프리카를 지배하고 있는 
  백인들의 시각에서 나온 것
- 아프리카에 관한 일을 하고 있는 공무원의 입장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제대로 아프리카를 
  알려줘야 겠다는 막연한 의무감 내지는 지적 호기심.

개인적으로는 첫번째 이유는 오케이, 그런데 두번째는.
음. 뭔가 뜨뜻미지근합니다.

'재미 없겠다..'

그런데 우려한 것 보다는 이 양반 꽤나 성격 있습니다.

* 초반인 12페이지에서 부터 프랑스를 '놈'이라고 호칭.(어라)
* 59페이지에서 영국과 영국인의 역사 미화 - 역겨움.(오호)
* 79~81페이지에서는 프랑스의 아프리카 식민지 진출이 그 유명한 프랑스 혁명 이후에 자유, 평등, 
   박애를 기치로 하고 벌어진 일임을 서술하는 부분에서 
   비아냥 폭발(얼씨구)
* 121~122페이지의 프랑스의 식민지 정책인 '동화 정책'과 현재의 프랑스 이민자 정책을 연계하여 
   분석한 부분(절씨구)
 - 지금도 이따위 쇼를 하고 있는데 식민지 시대에는 얼마나 더 했겠어..
* 212페이지 '프랑스 다운 속좁은 행동'
* 291페이지 샌프란시스코 조약 관련해서 일본 - '헛소리도 정도 껏 해..'
# 312페이지 프랑스 - 절도전문국가, 기소르망의 헛소리, 에펠탑 고철덩어리..
# 유럽의 자유주의, 민족주의가 자기들 나라에서는 근대 시민사회가 확립하는 기반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아프리카 식민지 쟁탈전의 이념적 기반이었다는 분석이 나오는 부분은 
   흥미롭고 시원하기도 했습니다.(84페이지)

이렇게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을 까대다가 순식간에 식민지 근대화론까지 깝니다.
(그분께서 아시면 어쩌려고..)

* 108페이지 식민지 근대화 관련 내용
 - 독재가 없었다면 발전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하여야 한다.
 - 기회비용은 어쩔거냐
 - 경제, 산업 토대의 발전이 다가 아니다. 법, 제도, 교육은 과연 발전했냐? 그래놓고 근대화래?

그리고는 이후 서로 다른 맥락에서 비슷한 내용이 반복됩니다.

뻑킹 제국주의(특히 프랑스), 아프리카 개불쌍, 알고보면 아프리카 능력 있다능.

그렇게 주욱 흘러가다가 닫는 글이 시작되고 책이 마무리되기 시작하는 371페이지에서 안타깝게도 
이 책에서 가장 후진 부분이 시작됩니다. 
문제는 이 가장 후진 부분이 아무리 봐도(위치도 그렇고) 결론 같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 함은정.

아프리카의 문제가 제국주의 국가들의 수탈로 부터 시작된 것임을 길게 각종 정보를 근거로 설명하고서는, 그리고 같은 문단에서도 그것이 원인임을 지적하면서도 '식민지배의 잔재' 타령만으로는 부족하고 결국 그들의 미래는 그들 손으로 헤쳐 나가야 한다는 별 의미없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고는 아프리카를 반면교사로 21세기의 대한민국을 바라봐야 한다면서 저출산 현상, 강대국 틈바구니에서도 졸라 잘 버티는 우리나라, 민족 만세.
현실이 어려우니 우리 국력을 키워야 함.
부국강병!

그리고 책이 끝납니다.(2권이 있다고는 하네요.)

'나를 배반한 역사' - 박노자.

머리말에 써있던 조총 얘기가 갑자기 다시 떠오릅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조총의 위력을 실감했을 텐데 왜 그걸 준비 해서 다음 전쟁에 대비할 생각을 안했던 건가.
그래서 결국 식민지배를 받은 거 아냐.(13페이지)

300페이지가 넘도록 격렬하게 제국주의 국가의 만행, 식민지 국가의 아픔을 얘기하던 사람이 결론은 
버킹검 부국강병이라니. 
(심지어 어투도 무섭도록 구태의연합니다. ' ~ 최선의 길이 아닐까?')

이 부분에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 시작과는 달리 결국 일제의 제국주의를 위해 복무하는 논리로 까지 오용되었던 민족개조론의 그림자를 보았다면
오해인걸까요.

근대화에 사로잡힌 구한말
제국주의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사회 진화론이니 민족개조론이니
부국강병·국가주의에 치우쳐
배려와 권리를 주장하는 개인주의는
반사회·이기주의로 고사되었으니
지식인의 부실한 세계관은
우리에게 얼마나 위험한가

'나를 배반한 역사'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또 박노자네요. (그래요, 박빠..)

저자의 선의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러면 아프리카인들이 나서지 않으면 누가 아프리카를 발전시킬 수 있냐고 묻는 다면 저도 딱히 할말이 없습니다.
다만, 이 책의 제국주의 국가들에 대한 날선 비판을 생각하면 결론이 부국강병으로 정리되는 것이 과연 맞는가에 대해서는 수긍할 수가 없네요.


2등 흑인, 2등 백인 - 우리는 몇등?

이 책에서 제가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은 158페이지 부터의 '아메리코-라이베리안'과 원주민들과의 갈등에 관한 부분이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강제로 끌려갔다가 자유를 찾아 다시 아프리카 돌아와 라이베리아를 건설한 이들(백인과의 혼혈이 많았다고)과 그땅에 원래 살고 있었던
토착 원주민.
아메리코-라이베리안들이 토착 원주민을 시민으로 보지 않고 노예처럼 부렸다는 믿기지 않는 얘기. 덜 까만 흑인이 더 까만 흑인을 지배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

저자도 이 부분의 끝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동남아시아 사람들에게 보이는 태도에 대해 지적합니다.
다만 이 것도 약자로서 겪어봤으니까 알지 않냐. 우리도 이제 강자가 됐으니까 약자를 잘 대해줘야 한다는 식이라서 흔쾌히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은 아닙니다만.

아웃브레이크, 월드워Z, 컨테이젼. 
몇개의 영화를 가지고 침소봉대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네들이 보기엔 다 거기서 거기. 잘 쳐줘야 2등 백인. 라틴계까지 따로 고려하면 뭐 3등 백인. 덜 까만 흑인.

강자, 약자 어쩌고까지 갈 것도 없이 이것만 봐도 우리가 백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어이 없는 일인지. 

뜬금없이 신해철.

소식을 들었던 그 날은 야근하다가 바로 술 사서 집에 가서 아내와 한 잔 했습니다. 
빈 허공에 술도 한 잔 올리고.

그러다가 10월이 가기전에 감상문은 정리해야지 하고 노트북을 열었는데 그냥 멍했네요.

생전에도 화제를 몰고 다녔던 사람답게 죽은 후에도 이런저런 얘기가 많습니다.
90년대의 조종이 울렸다는 얘기부터 청춘의 페이지가 뜯겨 나간 것 같다는 한탄이 있는가 하면.
이 와중에서도 일부 쿨하시고 시크하신 힙스터 나리들은 비아냥 폭발.

쟤들은 왜 이 상황에서도 비아냥 거리는 걸까. 무엇 때문에. 
생각하다보니 드는 의문. 

* 아니 뭐 알고는 하는 얘긴거야?  편견 아냐?
*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웬 오지랖. 관심 꺼.

책을 읽으면서 내내 느꼈던 불편함도 비슷했습니다.

저자는 아프리카인들을 나름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려고 하는 것 같지만 이 책에서 아프리카인들은 그저 우리의 반면교사를 위해 소비되고 있을 뿐입니다.
아프리카의 부족적 특성을 무시한 채 국경을 정하고 나라를 분리한 베를린 컨퍼런스에 대한 비판을 담았음에도 본인 역시 아프리카인들의 '후진적 민족성'에
대해서 언급하다가 결국은 니네들이 각성해야해.. 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이 무슨 의미없는 오지랖인가 싶습니다. 

너무 갖다 붙인 거 아니냐... 그래요, 좀 글죠. 
 
2014년 10월에 읽었던 책 얘기를 하면서 신해철 얘기를 하지 않을 수 는 없었습니다.
그냥 제 기분에. 

어떻게든 갖다 붙였을 거예요..

결론은 월드 피스. 그리고 형 잘가요. 


민물장어의 꿈

좁고 좁은 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나를 깎고 잘라서 스스로 작아지는 것뿐
이젠 버릴 것조차 거의 남은 게 없는데
문득 거울을 보니 자존심 하나가 남았네
두고온 고향
보고픈 얼굴
따뜻한 저녁과 웃음소리
고갤 흔들어 지워버리며 소리를 듣네
나를 부르는 쉬지 말고 가라하는
저 강물이 모여드는 곳
성난 파도 아래 깊이
한 번만이라도 이를수 있다면
나 언젠가
심장이 터질 때까지
흐느껴울고 웃다가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 없이
익숙해 가는 거친 잠자리도
또 다른 안식을 빚어 그 마저 두려울 뿐인데
부끄러운 게으름
자잘한 욕심들아
얼마나 나일 먹어야 마음의 안식을 얻을까
하루 또 하루
무거워지는
고독의 무게를 참는 것은
그보다 힘든
그보다 슬픈
의미도 없이 잊혀지긴 싫은
두려움 때문이지만
저 강들이 모여드는곳
성난 파도 아래 깊이
한 번만이라도 이를수 있다면
나 언젠가
심장이 터질 때까지
흐느껴울고 웃으며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 없이
아무도 내게 말해 주지 않는
정말로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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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소년 2015-10-01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4년 토담에 올렸던 글을 수정없이 그대로 올림. 동영상은 어캐 올리는 건지..
 
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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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산부 독서 불가 - 다섯째 아이

이야기의 초반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가족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들어갈 법한 장면 묘사가 계속 이어집니다. 끝에 나와야 할 이야기가 앞에 나오는 것이 영 께름칙합니다. 
아이가 하나 둘씩 태어납니다. 하나, 둘, 셋, 넷. 건강한 아이들입니다. 
그런데 제목은 '다섯째 아이'.
심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서 갈등이 생기는 스토리인가 싶은 순간, 친척 조카 캐릭터 중에 다운 증후군을 가지고 있는 아이가 등장합니다. 
이쯤 되면 이제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는 최소 오멘.
우리 가족의 임신 및 출산 계획이 이미 종료되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낄 무렵, 해리엇은 벤을 임신하게 됩니다. 
'무성한 정원을 가진 빅토리아 풍의 큰집'에는 속할 수 없는 다른 존재인 바로 그 다섯째 아이.

벤의 잉태 함께 해리엇(엄마)과 데이비드(아빠)의 세계는 무너져 내리기 시작합니다.

운칠기삼(運七技三)

어디선가 진중권이 '논객'으로서의 글을 쓰게 된 것은 본인의 의지나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었다는 얘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독일 유학 중 한국의 어느 문학계간지에서 받았던 원고 청탁에 응하게 되면서 사건들이 발생하고 거기에 대응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책 제목 빼고는 아무런 기억도 없는데 유독 이 이야기만 기억나는 건 다음의 문장 때문이었습니다.

'삶은 우연에 의해 지배된다는 생각을 한다.'(정확한 어구인지는 잘 모르겠..) 

제 학교 동기의 군대 후임이자 고향 후배의 친구였던 지금 제 아내도, 
지원 마감일 전날 밤에 친구가 같이 쓰자고 해서 부랴부랴 지원했다가 합격한 지금 제 자리도.
생각해보면 다 우연.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라지만 그때 한 끗만 빗겨나갔더라면 지금 제가 퇴근을 앞두고 월급 도둑질 여기서 이 글을 타이핑하고 있지는 않았겠죠.

현실감 없는 존재인 벤, 전혀 연관없는 시, 공간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유달리 목 죄어오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고 믿고 싶은 것들이 내일 아침 내 방문 앞에서 벌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인과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인과관계가 있더라도 알 수 없는, 안다고 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하게 될 수 도 있다는 가능성은 이미 그 자체로 공포입니다.

검색해보니 아예 용어가 있네요. '통제감의 오류' 
아래 내용은 퍼온 내용입니다.

통제감(sense of control)이란 외부의 영향에 상관 없이 
'내가! 내 의도대로 내 일들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반대로 낮은 통제감, 내 힘의 크기나 범위가 제한되어 있다는 느낌은 무기력과 맞닿아 있지요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꽤 높은 통제감을 보이는 편입니다. 
같은 주사위도 남들보다 내가 던지면 왠지 더 높은 확률로 딱 원하는 숫자가 나올 것 같고
(실제로 다른 사람 말고 자신이 주사위를 던질 때 배당금을 더 높이 걸곤 합니다)
복권도 내가 긁으면 당첨 확률이 더 높아질 것만 같지요
남들은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설마 내가..'라며 자신이 위험에 처할 확률은 과소평가 하기도 하고요. 

우리가 이런 과도한 통제감, '통제감의 환상(illusion of control)'을 보이는 한 가지 이유는
그래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입니다ㅎ

'당장 내일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다'라는 걸 직시하면 마음이 너무 불안하거든요..
'내가 어쩔 수 없는 환경이나 운에 의해 내 삶의 많은 부분이 좌우된다'는 것 또한 왠지 우울하지요.
이렇게 우리 삶에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는 걸 깨닫고 인지하는 건 잔인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착각이든 뭐든 
'나는 세상이나 내 삶의 많은 부분을 예측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다'고 믿고싶어 하는 것이지요.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근자감.
예를 들면 요런 거.




'무성한 정원을 가진 빅토리아 풍의 큰집'으로 상징되는 해리엇과 데이비드의 세계는 사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나름 독립적으로 살아온 것으로 묘사되는 데이비드는 그 큰집을 얻기 위해 호텔하려고 그러냐는 비아냥에도 지금은 다른 여자와 재혼한 아버지에게 손을 벌리고 해리엇 역시 친정 어머니의 충고는 무시한 채 여덟명의 아이를 낳겠다는 계획을 실천하기 시작합니다. 육아는 친정 어머니에게 맡겨 버린 채. 

생각은 얘들이 왜 이러나로 뻗어 갑니다. 
'뭐 때문에 이러는 거야 얘들.'

이들이 결국 주위 사람들을 이용하고 자기 자신까지 속이면서 완성(했다고 믿는)한 행복이란 과연 뭘까요.
행복은 본질적으로 안정감을 기반으로 하고 그 안정감은 통제감에 많은 부분 기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행복은 그냥 착각인 걸까요. 그냥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게 마음이 편하고 좋으니까. 난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사는 걸 택하는 걸까요. 그럼 저 무책임하고 대책없어 보이기까지 하는 해리엇과 데이비드와 내가 구별될 수 있는 지점이 과연 있을까요. 

"행복은 감옥이야. 행복이란 가장 음흉한 감옥이지."

2년쯤 전에 같이 몰려 다녔던 대학 동기 몇과 함께 1박 2일 여행을 갔었습니다. 
만나자마자 화투치고 괜히 바닷가 몰려다니다가 밥 먹고 새벽까지 술집 전전하면서 농담 따먹기 하다가 새벽에 박지성 경기 보고 잤죠. 10시쯤 일어나서 대충 씻고 해장하고 12시 되기 전에 외출을 허락해주신 분께 드릴 진상용 태안김 한 봉지씩 각자 챙겨서 컴백홈.
그날 저녁이 생생한 건 간만에 느꼈던 잉여로움 덕분이었지만 그 자리에서 동기 형이 제게 한 말 때문이기도 합니다.
'넌 보면 행복을 딱 정해놓고 그거에 맞출라고 발버둥 치는 것 같어.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안 행복하면 억울하니까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거 아녀?'

그러고 보니 한 가지 더 떠오르네요.  집으로 돌아온 그날 저녁 거실 소파 위에 무겁게 내려 앉았던 공기도.

뭐 모르겠습니다. 정답이라는 게 있을 수도 없는 문제겠지요. 
정답이 아니라고 해도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닐 것 같구요.

그저 저와 해리엇이나 데이비드는 별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는 정도. 그리고 제 인생에도 갑자기 벤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자각 정도. 이 정도만 어렴풋이 깨닫게 되네요.

다시 운칠기삼(運七技三)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생각 나긴 했는데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몰라서 찾아보니 유래가 인상적입니다.
생각하다 보니 머리가 복잡해졌는데 유래를 읽으니 위로가 됩니다. 

한 선비가 과거공부를 하는데 흰 수염이 나도록 번번이 낙방하여 가산이 기울고 아내는 아이를 둘러업고 가출해 버렸다. 죽을 작정을 하고 대들보에 동아줄을 매어놓고 생각하니, 
자기보다 못한 자들이 번번이 급제한 것이 억울하여 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옥황상제에게 가서 따져보기로 했다. 
옥황상제는 정의의 신과 운명의 신을 불러 술 마시기 시합을 시켜놓고 서생에게 말했다.
"정의의 신이 더 많이 마시면 네가 분개한 것이 옳고 운명의 신이 더 많이 마시면 네가 체념하는 것이 옳다"고 했다.
이 술 마시기 시합에서 운명의 신은 일곱 잔을 마시고 정의의 신은 석 잔 밖에 마시지 못했다. 
옥황상제는 말했다. 
"세상은 정의대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불합리한 운명의 장난이라는 것이 꼭 따르는 법이다. 세상이 7푼의 불합리가 지배하고 있긴 하나 3푼의 이치가 행해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어쨌든 열심히 살아보라는 얘기겠지요. 
행복이 착각이고 감옥일 수 도 있지만 '자고 있는' 둘째 아이 볼을 살짝 꼬집을 때의 기분을 생각하면.
....
뭐가 그리 중요할까 싶습니다. 어떻게든 되겠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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