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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평점 :
임산부 독서 불가 - 다섯째 아이
이야기의 초반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가족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들어갈 법한 장면 묘사가 계속 이어집니다. 끝에 나와야 할 이야기가 앞에 나오는 것이 영 께름칙합니다.
아이가 하나 둘씩 태어납니다. 하나, 둘, 셋, 넷. 건강한 아이들입니다.
그런데 제목은 '다섯째 아이'.
심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서 갈등이 생기는 스토리인가 싶은 순간, 친척 조카 캐릭터 중에 다운 증후군을 가지고 있는 아이가 등장합니다.
이쯤 되면 이제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는 최소 오멘.
우리 가족의 임신 및 출산 계획이 이미 종료되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낄 무렵, 해리엇은 벤을 임신하게 됩니다.
'무성한 정원을 가진 빅토리아 풍의 큰집'에는 속할 수 없는 다른 존재인 바로 그 다섯째 아이.
벤의 잉태 함께 해리엇(엄마)과 데이비드(아빠)의 세계는 무너져 내리기 시작합니다.
운칠기삼(運七技三)
어디선가 진중권이 '논객'으로서의 글을 쓰게 된 것은 본인의 의지나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었다는 얘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독일 유학 중 한국의 어느 문학계간지에서 받았던 원고 청탁에 응하게 되면서 사건들이 발생하고 거기에 대응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책 제목 빼고는 아무런 기억도 없는데 유독 이 이야기만 기억나는 건 다음의 문장 때문이었습니다.
'삶은 우연에 의해 지배된다는 생각을 한다.'(정확한 어구인지는 잘 모르겠..)
제 학교 동기의 군대 후임이자 고향 후배의 친구였던 지금 제 아내도,
지원 마감일 전날 밤에 친구가 같이 쓰자고 해서 부랴부랴 지원했다가 합격한 지금 제 자리도.
생각해보면 다 우연.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라지만 그때 한 끗만 빗겨나갔더라면 지금 제가 퇴근을 앞두고 월급 도둑질 여기서 이 글을 타이핑하고 있지는 않았겠죠.
현실감 없는 존재인 벤, 전혀 연관없는 시, 공간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유달리 목 죄어오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고 믿고 싶은 것들이 내일 아침 내 방문 앞에서 벌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인과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인과관계가 있더라도 알 수 없는, 안다고 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하게 될 수 도 있다는 가능성은 이미 그 자체로 공포입니다.
검색해보니 아예 용어가 있네요. '통제감의 오류'
아래 내용은 퍼온 내용입니다.
통제감(sense of control)이란 외부의 영향에 상관 없이
'내가! 내 의도대로 내 일들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반대로 낮은 통제감, 내 힘의 크기나 범위가 제한되어 있다는 느낌은 무기력과 맞닿아 있지요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꽤 높은 통제감을 보이는 편입니다.
같은 주사위도 남들보다 내가 던지면 왠지 더 높은 확률로 딱 원하는 숫자가 나올 것 같고
(실제로 다른 사람 말고 자신이 주사위를 던질 때 배당금을 더 높이 걸곤 합니다)
복권도 내가 긁으면 당첨 확률이 더 높아질 것만 같지요
남들은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설마 내가..'라며 자신이 위험에 처할 확률은 과소평가 하기도 하고요.
우리가 이런 과도한 통제감, '통제감의 환상(illusion of control)'을 보이는 한 가지 이유는
그래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입니다ㅎ
'당장 내일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다'라는 걸 직시하면 마음이 너무 불안하거든요..
'내가 어쩔 수 없는 환경이나 운에 의해 내 삶의 많은 부분이 좌우된다'는 것 또한 왠지 우울하지요.
이렇게 우리 삶에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는 걸 깨닫고 인지하는 건 잔인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착각이든 뭐든
'나는 세상이나 내 삶의 많은 부분을 예측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다'고 믿고싶어 하는 것이지요.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근자감.
예를 들면 요런 거.

'무성한 정원을 가진 빅토리아 풍의 큰집'으로 상징되는 해리엇과 데이비드의 세계는 사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나름 독립적으로 살아온 것으로 묘사되는 데이비드는 그 큰집을 얻기 위해 호텔하려고 그러냐는 비아냥에도 지금은 다른 여자와 재혼한 아버지에게 손을 벌리고 해리엇 역시 친정 어머니의 충고는 무시한 채 여덟명의 아이를 낳겠다는 계획을 실천하기 시작합니다. 육아는 친정 어머니에게 맡겨 버린 채.
생각은 얘들이 왜 이러나로 뻗어 갑니다.
'뭐 때문에 이러는 거야 얘들.'
이들이 결국 주위 사람들을 이용하고 자기 자신까지 속이면서 완성(했다고 믿는)한 행복이란 과연 뭘까요.
행복은 본질적으로 안정감을 기반으로 하고 그 안정감은 통제감에 많은 부분 기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행복은 그냥 착각인 걸까요. 그냥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게 마음이 편하고 좋으니까. 난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사는 걸 택하는 걸까요. 그럼 저 무책임하고 대책없어 보이기까지 하는 해리엇과 데이비드와 내가 구별될 수 있는 지점이 과연 있을까요.
"행복은 감옥이야. 행복이란 가장 음흉한 감옥이지."
2년쯤 전에 같이 몰려 다녔던 대학 동기 몇과 함께 1박 2일 여행을 갔었습니다.
만나자마자 화투치고 괜히 바닷가 몰려다니다가 밥 먹고 새벽까지 술집 전전하면서 농담 따먹기 하다가 새벽에 박지성 경기 보고 잤죠. 10시쯤 일어나서 대충 씻고 해장하고 12시 되기 전에 외출을 허락해주신 분께 드릴 진상용 태안김 한 봉지씩 각자 챙겨서 컴백홈.
그날 저녁이 생생한 건 간만에 느꼈던 잉여로움 덕분이었지만 그 자리에서 동기 형이 제게 한 말 때문이기도 합니다.
'넌 보면 행복을 딱 정해놓고 그거에 맞출라고 발버둥 치는 것 같어.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안 행복하면 억울하니까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거 아녀?'
그러고 보니 한 가지 더 떠오르네요. 집으로 돌아온 그날 저녁 거실 소파 위에 무겁게 내려 앉았던 공기도.
뭐 모르겠습니다. 정답이라는 게 있을 수도 없는 문제겠지요.
정답이 아니라고 해도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닐 것 같구요.
그저 저와 해리엇이나 데이비드는 별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는 정도. 그리고 제 인생에도 갑자기 벤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자각 정도. 이 정도만 어렴풋이 깨닫게 되네요.
다시 운칠기삼(運七技三)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생각 나긴 했는데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몰라서 찾아보니 유래가 인상적입니다.
생각하다 보니 머리가 복잡해졌는데 유래를 읽으니 위로가 됩니다.
한 선비가 과거공부를 하는데 흰 수염이 나도록 번번이 낙방하여 가산이 기울고 아내는 아이를 둘러업고 가출해 버렸다. 죽을 작정을 하고 대들보에 동아줄을 매어놓고 생각하니,
자기보다 못한 자들이 번번이 급제한 것이 억울하여 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옥황상제에게 가서 따져보기로 했다.
옥황상제는 정의의 신과 운명의 신을 불러 술 마시기 시합을 시켜놓고 서생에게 말했다.
"정의의 신이 더 많이 마시면 네가 분개한 것이 옳고 운명의 신이 더 많이 마시면 네가 체념하는 것이 옳다"고 했다.
이 술 마시기 시합에서 운명의 신은 일곱 잔을 마시고 정의의 신은 석 잔 밖에 마시지 못했다.
옥황상제는 말했다.
"세상은 정의대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불합리한 운명의 장난이라는 것이 꼭 따르는 법이다. 세상이 7푼의 불합리가 지배하고 있긴 하나 3푼의 이치가 행해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어쨌든 열심히 살아보라는 얘기겠지요.
행복이 착각이고 감옥일 수 도 있지만 '자고 있는' 둘째 아이 볼을 살짝 꼬집을 때의 기분을 생각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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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그리 중요할까 싶습니다. 어떻게든 되겠죠.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