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물정의 사회학 - 세속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노명우 지음 / 사계절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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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 강박증'이라는 것이 있답니다. 
어떤 계기로 숨쉬는 것을 의식하게 되면 호흡을 자연스럽게 하지 못하게 되어 스트레스를 받는 증상이라네요.
무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반복되던 호흡이 생경하게 느껴지는 순간.
호흡강박증 환자는 그 순간 이후 자신의 모든 호흡을 되새기고 계획하게 된답니다.

익숙했던 무언가가 갑자기 낯설어지는 그 어느 순간.

‘일을 한다’는 것.

개인적인 사건으로 몇 주간 격렬한 감정상태 였습니다.
폭풍같던 감정의 세기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적응과 평온은 또 이르게 찾아왔고 저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호흡의 생경함을 인식해버린 호흡강박증 환자처럼 순간 순간 낯섭니다. 
직장에서 필요로 하는 건 일을 하는 나인가, 내가 하는 일인가
... 어렵네..

그러면 일단 제일 쉬운 것 부터. '나'에게 '일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임금 노동, 노동자의 운명

* 고대 그리스어로 노동을 의미하는 ponos는 슬픔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 히브리어에서 일을 나타내는 단어와 노예를 나타내는 단어는 동일하다. 
* 라틴어에서 일을 의미하는 단어 labor는 고통이 수반되는 극도의 노력이라는 뜻이다.
* 노동(labour)이라는 단어는 14세기 영어에 최초로 등장했다. 이 단어는 짐을 메고 미끄러지거나 비틀거리는 것을 의미했다.
* 노동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travailles는 라틴어 tripalium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이는 원래 로마군이 사용했던 고문 도구의 일종으로
   세 개의 말뚝을 가리키는 말이며 슬픔과 고통을 뜻한다.
* 중세 독일어로 노동이라는 뜻을 지닌 arbeit는 시련, 박해, 역경, 곤경으로 해석된다. 
* 한국어의 노동(勞動)역시 노력(努力)이며, 그 노력은 고통인 노고(老苦)를 포함하고 있다.


...월급쟁이의 다른 뜻은 월급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 이외에는 먹고살 길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월급은 고용된 사람들에게만 지급된다. 고용되지 않으면 먹고사는 일이 막막해지는 사람들이 해야만 하는 노동, 그 노동이 바로 임금노동이다.
“그에게 있어 삶이란 이러한 활동이 멈출 때, 즉 식탁에서, 선술집 의자에서, 침대에서 시작된다. 이와는 반대로 그에게 있어서 12시간의 노동은 옷감 짜기, 실 뽑기, 구멍 뚫기 등등으로서의 의미는 전혀 없고 그를 식탁으로, 선술집 의자로, 침대로 데려다 주는 벌이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다.”(엥겔스, 잉글랜드 노동계급의 처지 중에서, 노영우 세상물정의 사회학에서 재인용)

그러고 보니 일에 대해 생각해본 기억이 없네요.
일, 직무는 제게 평가나 분석의 대상일지언정 그 자체로 고민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 나름대로는 직장에서의 저와 그 외의 저를 잘 분리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이, 노동이 제 존재를 정의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 상상하지 않았습니다.

‘일주일에 5일간 매일 9시간 이상씩 일을 하고 임금을 받아서 살아가는 임금 노동자'
삶을 시간과 공간의 소비로 봤을 때 지금은 이 이상 저를 객관적으로 잘 설명할 수 있는 건 없겠다 싶습니다.
하루종일 사무실 책상 앞에서 나의 시간과 체력을 팔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아 나와 내 가족의 삶을 이어나가는 것.
제게 일은 먹고 사는 수단입니다. 

‘그는 필요한 생활 수단을 확보하기 위하여 이 생명 활동을 제3자에게 판매한다. 따라서 그의 생명 활동은 그에게는 생존할 수 있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그는 살기 위해서 노동하는 것이다. 그는 노동을 자기 삶으로까지 생각하는 일이 없으며, 오히려 노동은 그의 삶의 희생일 뿐이다. 노동은 그가 제3자에게 넘겨버린 하나의 상품이다. 따라서 그의 활동의 산물 또한 그의 활동의 목적이 아니다.’(같은 책)

제가 팔아야 하는 것은 제 자신과 일 모두네요. 직장에선 일이 나고, 내가 일인 셈입니다. 
지나치게 수동적이고 비관적인가요. 열심히 노력하면 우주가 도와준다고 누가 그러던데.

'다른일을 더 하게 되었으니 이를 성장의 계기로 삼아보라‘시작도 안하고 그러냐 일단 해보고 얘기해라.
개인적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만나봤던 사람 중 몇분이 해주셨던 조언입니다. 
그분들의 성의(?)에도 불구하고 나름 발끈해서 수용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한 문제제기를 이어나가긴 했습니다만.
글쎄요. 전달이 되었을지.

그는 성과사회에 내재하는 시스템의 폭력을 간과하고 이러한 폭력이 심리적 경색을 야기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오직 자기 자신이 되어야한다는 명령이 아니라 성과를 향한 압박이 탈진 우울증을 초래한다.
긍정성의 과잉 상태에 아무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그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한병철, 피로사회)

밥벌이의 지겨움

무슨 얘길 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뭐라도 뱉어내고 나니 시원하네요. 이런게 카타르시스겠죠.(찾아보니 이거 정확한 뜻이 '배설' 이라네요.
어제, 폭풍같은 하루가 지나갔습니다. 인사 이동 소문이 나기 시작한 요 몇일 간, 오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에 저마다의 기대가 그림자처럼 길게 늘어져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네요.
새로운 자리, 새로운 일과 함께 바뀐 듯, 바뀌지 않은 듯, 바뀐 생활을 시작하실 모든 분들의 건투를 빕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근로감독관들아, 제발 인간을 향해서 열심히 일하라고 조져대지 말아 달라. 제발 이제는 좀 쉬라고 말해 달라. 이미 곤죽이 되도록 열심히 했다.  나는 밥벌이를 지겨워하는 모든 사람들이 친구가 되고 싶다. 친구들아,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이걸 잊지 말고 또다시 각자 핸드폰을 차고 거리로 나가서 꾸역꾸역 밥을 벌자. 무슨 도리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김훈, 밥벌이의 지겨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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