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 홍콩
국민학생 때 중국은 중’공’이었습니다. '두려울 공(恐)’과 같은 발음이어서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받아들인 건가 싶기도 합니다. 80년대 국민학생이 단체관람했던 ‘이승복 어린이’ 영화에도 이 ‘공’자들이 잔뜩 등장합니다. 공산당이 싫어요! 하니 공비들이 입을 찢어 죽이지요. 사건의 진위, 당사자에 대한 안타까움과 별개로 이 영화는 제 나이 또래 한국인들이 인생 첫 고어영화가 됩니다. 이러니 무서울 수 밖에요.
중학생 때 중국은 홍콩이었습니다. 영화는 아름다웠고 배우들은 멋있었습니다. 규칙도 모르는 카드 게임을 하며 입 속 깊히 초콜릿을 집어 넣어 먹었고, 맥락없이 날아가는 하얀 비둘기에도 쓰러졌지요. 특히 좋아했던 유덕화는 가수이기도 했는데 새로 산 음반을 다 듣기도 전에 새 음반이 나오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한 음반을 북경어, 광동어 버전으로 발매했던 것이지만 알 수가 없었죠. 그저 초인적인 성실함의 증거로만 생각했지요. 그러니 좋아할 수 밖에요.
더이상 학생은 아닌 지금, 중국은 더 이상 중공이 아니고 홍콩과 중국은 ‘일국양제(一國兩制)’ 상태라는 정도는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 유비, 관우, 장비는 아직 복숭아 밭을 떠나지 못했고, 3글자 나라 이름은 머리속에 계통없이 흩어져있습니다. 책 제목처럼 이만큼 가까운 나라도 없는데 말입니다.
이만큼 가까운 나라 - 중국
‘이만큼 가까운 중국’은 우리나라와 밀접한 국가의 역사와 정치, 경제부터 문화와 생활에 이르기까지 그 국가와 사람을 이해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담은 ‘이만큼 가까운 시리즈’의 중국편입니다. 세계 각국을 다룬 다른 책과 차별되는 깊이를 추구하면서도 다양한 독자층이 이해하기 쉽도록 눈높이를 맞추었다고 하네요.
황하 문명의 발원부터 봉건제가 시작된 주나라, 통일제국 진나라, 전성기 한나라, 당나라, 이민족의 원나라, 청나라를 거쳐 근대와 현대 중국까지. 책을 읽고 난 후에 확인하니 건너 뛴 나라들이 꽤 있습니다. 한나라와 당나라 사이의 위진남북조시대, 수나라는 당나라 도입부에 '오랜 혼란기' 이 다섯글자로 정리되는 정도지요. 제게는 이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입니다. '중국이 궁금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공부까지는하고 싶지 않은 일반 독자'가 접근할 수 있는 최고 지점을 향한 안내서라고 할까요. 중국으로 가는 주요 지점만 콕 집어 설명해줍니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굴욕의 근대’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천하의 중심을 자처하던 사람들이 서양 깡패와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동양 듣보잡(일본)에게 얻어 맞고 대문을 열어주었으니 그 패배감이 얼마나 컸을까요. 패배의 원인을 찾고 극복하려는 시도가 뒤따르는 것도 당연합니다.
- 서양 수준의 군사력이 필요하다. - 양무운동
- 군사력을 키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국가 제도를 바꾸자. - 1911년 아시아 최초의 공화제 국가 '중화민국' 수립
- 중국인들의 생각, 사상, 가치관이 문제다. 유교문화 타파! - 신문화운동(이 것이 현대 중국의 사상적 기원이 된다고 합니다.)
- 제국주의, 자본주의는 그 한계가 명확하다. 대안은 사회주의다. -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 봉건주의, 자본주의를 철폐하고 사회주의적 발전 단계를 완성하자. - 문화대혁명(마오쩌둥)
- 빈곤이 사회주의가 아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게 좋은 고양이다. - 사회주의 시장경제(덩샤오핑)
머리속에 계통없이 흩어져 있던 3글자 나라 이름들이 순서대로 줄을 섭니다. 선 굵은 정리에 묘한 쾌감마저 느껴집니다.
중국사 특강 이후, 책은 본격적으로 현대 중국의 이해에 대한 요점 정리를 시작합니다. 지리∙문명, 정치∙경제, 사회, 문화∙예술, 한중관계를 다룹니다. 그중에서 눈길이 오래 머물렀던 주요한 단어를 되새겨봅니다. 누가 중국 아니랄까봐 죄다 '중'으로 시작하는 단어들입니다. 중앙집권, 중앙통제, 중국식 네티즌 민족주의 그리고 중화.
큰 땅덩어리, 다민족, 다언어라는 환경적 특성 때문에 중국에게는 중앙집권, 중앙통제가 가장 매력적인 답안이 된듯 합니다.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 유튜브는 인터넷 미디어 시대의 대표주자들이지만 중국에서는 접속이 불가능합니다. 대신 중국사람들은 웨이보, 위챗, 바이두 같은 중국 자체 플랫폼을 이용한다고 합니다. 언론, 종교도 중앙의 통제를 받고 있고 천안문 사태 이후에는 애국주의 교육도 강화되어 이 교육을 받고 자란 '포스트 80세대'는 민족주의 성향이 짙다고 하네요. 중앙집권, 중앙통제에 관한 설명은 이 부분에서 자연스럽게 민족주의로 넘어갑니다.
'포스트 80세대'는 중국의 1자녀 정책의 주인공이자 우리나라 뉴스에서도 가끔 들리던 그 '소황제'들이 해당되는 세대입니다. '중국식 네티즌 민족주의'가 수면으로 떠오른 시점은 베이징 올림픽이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베이징 올림픽은 중국인에게 '굴욕의 근대'를 청산하고 중국이 다시 세계의 중심으로 다가가고 있음을 확인하고 알리는 자리였다고 하네요. 중국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티베트 독립 관련 시위 등으로 봉송되던 성화가 꺼지고 중국을 비판하는 프로그램이 방송되는 등 오히려 갈등이 강조되자 포스트 80세대가 분노했고 이들이 중국식 네티즌 민족주의를 낳게 되었다는 설명입니다.
여기까지 정리하고 보니 어줍잖게도 뭔가 흐름이 보이는 듯 합니다. 굴욕의 근대를 벗어나 새로운 중화적 질서를 회복하려는 중국과 중국인들의 분투.
'중화사상 & 복원'이라는 검색어로 검색하니 여러 기사가 눈에 띕니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시진핑 주석의 2013년 3월 제12기 전국인민대표대회 폐막연설입니다. 시 주석은 이 연설에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의 꿈(中國夢)을 9차례나 언급했다고 합니다. 중화제국의 유산을 새로운 제국을 여는 자산으로 활용하려는 시도는 대외적으로 '신 천하주의론'과 '신 조공질서론'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지적도 눈에 들어옵니다.(전인갑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대중국의 제국몽: 중화의 재보편화 100년의 실험' 소개 기사)
중국은 다시 천하의 중국이 되고 싶어하나 봅니다.
中國一点都不能少 (중국은 조금도 작아질수 없다.)
네덜란드 헤이그의 상설중재재판소에서 중국의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을 '불법'으로 규정한 지난 12일 밤 부터 우리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는 중국 연예인들이 SNS에 위의 문구와 관련 이미지를 올렸습니다. f(x)의 빅토리아, 미스에이의 페이, 피에스타의 차오루 등. 물론 다른 중국 연예인들도 비슷한 행보를 보였습니다만 빅토리아, 페이, 차오루는 한국을 기반으로 아시아, 세계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지요. 어떻게 봐도 본인과 소속 그룹에 악재가 될 것이 뻔해보였으니까요. 실제로 TV 예능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긍정적인 인지도를 쌓아가던 차오루는 이 글을 올린 이후 출연하는 프로그램 게시판에 하차 요구글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장사 하루이틀 하는 것도 아닌데.
이 책을 읽고 나니 보이는 부분이 생겼습니다. 여전히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왜 그랬는지 어느 정도는 알 것 같다고 할까요.
중국의 의지는 분명해보입니다. 다만, 이 의지를 실현해 가는 과정에 다른 나라, 특히 주변 나라를 고려할 생각은 없어 보입니다. 중국에게 굴욕의 근대를 안겨줬던 제국주의 국가에 대항해서 건설한 것이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일텐데요. 미워하면서 닮아버린 것일까요. 아니면 중화의 한계일까요. 원인이 무엇이든 우리에게는 절체절명의 숙제가 생긴 셈입니다.
이제 중국을 보는 새로운 눈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다른 영역은 제쳐 두고라도 두 나라의 경제와 문화가 갈수록 하나로 통합되는 시대에 살아갈 것입니다. 이 책은 이런 새로운 시대를 살아갈 사람들, 특히 청소년과 청년 세대가 중국을 보는 새로운 관점을 갖는데 도움이 되도록 구성했습니다.
일찍이 실학파 학자였던 박지원은 당시 조선 선비들이 가지고 있던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와 중국 멸시라는 두가지 극단주의를 비판하면서 '이용후생(利用厚生)'이라는 실용주의 중국관을 주장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박지원과 같은 생각이 필요합니다. 이 책이 중국과 함께 살아갈 한국의 미래 세대가 중국을 보는 새롭고 깊이 있는 눈을 갖는 데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머리말에서)
중국에 대한 다른 책과 앞으로 나올 '이만큼 가까운 시리즈'의 다른 책들이 읽고 싶어지네요.
(일본, 미국이 나왔고 터키, 프랑스편이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