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지옥
김인정 지음 / 아작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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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단
#다정한지옥 #김인정 #아작 #소설집

아름답다.
문장들이 매우 수려하다.
허나 씨실과 날실의 글들이 직조해낸 것은 파국이다.
너무나도 귀한 것을 보고만 대가로
내 앞에 놓인 것은 더욱더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지옥이다.

23p 화선 中
물 위로 몸을 솟구쳤을 때 유난스레 맑은 달빛이
정수리를 쪼갤 것처럼 흘러내려 만월임을 알았다.
(중략)
달빛은 만물을 적실 수 있을 만큼 흥건하고,
여울 굽이마다 은비늘처럼 반짝이는 도장을 찍어 놓았다.

31p 화선 中
흔히 꽃 정령들이 그러는 것과 같이,
인간 사내가 건네주는 붉은 연문 한 구절에
온몸 흔들리는 이야기 말입니다.

35p 화선 中
서울 거리를 떠도는 소문이 듣고자 하지 않아도 귓바퀴에 묻어왔나이다.


귀신에 홀린 듯 페이지를 넘겼다.
오래전 전설의 고향에 푹 빠져 살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
할머니가 해주던 옛날이야기를 듣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빼어난 외관 속에 진득한 알맹이가 들어차있다.
알알이 들어찬 묵직한 질문들이 차곡차곡 내 안에 쌓여
다음 문장으로 내달리던 눈길을 붙잡고 머무르게 했다.
두루뭉술한 감각으로 외면하고 싶었던 순간들을
아프리만큼 들여다보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14~15p 선화 中
"네가 세상을 아느냐?"
"세상을 모릅니다."
"모르니 입을 다물려무나.
내 필요한 것이라곤 네년의 건강한 몸뚱어리에 물든 그 새 세상이지
네년이 아니니 말이다."

19p 선화 中
"오라버님, 오라버님, 제가 과연 세상을 알겠습니까?"
"우리가 어찌 세상을 알겠느냐."

51p 화선 中
서방님, 서방님께서 안타까이 여기시는 것은 저이옵니까 비녀이옵니까?
서방님, 서방님께서 슬피 우시는 까닭은 서방님의 팔자가 안타까워서 이옵니까
아니면 이년 보기가 안쓰러워 그러시옵니까?

47p 화선 中
아무것도 먹지 않고 죽음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그래도 이 안에 든 말이 무겁다니, 평생을 떠들었는데도 무겁다니...


즐겁게 읽을 수는 없는 작품이지만
진지하고 중요한 삶에 대한 질문들이 많아서 인상 깊은 독서 경험을 했다.

작가님의 스토리 구성과 필력에 감탄하며
다른 작품들도 꼭 찾아읽겠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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