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밍 소설Y
최정원 지음 / 창비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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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가 봉쇄됐다.
벌써 9년 전 이야기다.
어느 6월의 햇살 좋았던 날, 인류 멸종의 카운트다운은
조용히, 시시하게, 그러나 막을 수 없는 방법으로 사람들을 덮쳤다.
많은 사람들이 쓰러지거나 죽어갔고
병원으로 이송된 사람들이 미라처럼 말라붙다가
몸에서 뿌리가 자라나며 나무처럼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재앙의 검은 비가 내렸다.
사람들은 나뭇가지처럼 보이는 각질화된 세포들을 쏟아내며
비명과 함께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 현상은 세계적 대도시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고
서울도 예외는 아니었다.
생화학 무기라는 둥 빙하가 녹으며 풀려난 고대의 바이러스라는 둥
신의 심판이 떨어졌다는 둥 원인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다.
학자들은 자신 없는 어투로 '그것'을 생명체의 유전자 전반에
구조적 변이를 일으키는 일종의 바이러스로 규정했다.
그 무형의 폭발이 일어난 폭심지가 분명하고
증상의 중증도도 그 거리와 반비례한다는 사실 앞에서
인류는 화합했다.
대도시의 외곽에 높이 50미터의 방벽을 쌓기 시작했다.
'그것'이 공기보다 무거워 지표면에 깔리는 성질이 있다는 이유였다.
그렇게 서울은 봉쇄되었다.

시간이 흐르고 인류는 우산이라는 광역 방역 시스템을 개발했다.
바이러스로 절여진 땅에 핵폭탄을 떨어트리는 역하을 할 것이고
가동 전후에는 오염 수치가 크게 개선되어
곧 서울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뉴스가 세상에 흘러나온다.

여운은 국립재난대응연구소의 수습 연구원이다.
갑작스러운 대피 상황에서 엄마를 만나지 못한 채
이모 손에 겨우 서울을 벗어났다.
9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엄마를 찾는다는 희망을 내려놓지는 못했다.
어느 날 연구소로부터 메일을 받는다.
우산 가동에 문제가 생겨 선발 대응팀이 직접 투입되었으나
여운도 보조 인력으로 충원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프로젝트 종료 시 높은 보수를 약속한다는 말과 함께
엄마를 찾고 싶은 마음에 그녀는 서울로 진입한다.
R이라는 유능한 인형과 함께.

정인은 9년 전 서울에 갇혔다.
차마 대피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모여
피가 섞이지 않은 새로운 가족이 되었다.
어린 정인은 어른들의 보살핌으로 무사히 청소년이 되었다.
시간이 흐르며 바이러스 감염으로 몇몇 가족들은 나무가 되었고
지금은 나무로 변해가는 삼촌과 할머니, 레슬링 인형 미호와 함께다.
다행히 정인은 그것에 면역이 있는지 증상은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두 사람과 두 인형은 우연한 계기로 교차한다.
각각의 사연이 서서히 밝혀지고 다양한 생각과 마음이 쉴 새 없이 부딪힌다.

문장을 읽으면 장면이 떠오른다.
인물들이 등장하고 머릿속에서 자동적으로 영상이 재생된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소리가 들리고
비릿하고 역한 냄새가 나거나 탄내가 나기도 한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VR 보다 생생한 감각으로
나는 봉쇄된 서울 속을 헤매고 있다.

문장이 거북하지 않고 담백하면서 감정을 쉴 새 없이 자극한다.
화자가 변할 때마다 그 마음이 온전히 이해되고 공감된다.

서글픈 미래상 앞에, 인류의 실망스러운 대처방안에
가슴이 답답하고 울적해지지만
그렇기 때문에 서로의 온기가, 서로의 존재가
더 애틋하고 값지게 다가온다.

책을 읽는 동안 꿈도 자주 꿨다.
오랜만에 만난 잔상이 오래 남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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