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브 창비교육 성장소설 13
보린 지음 / 창비교육 / 202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잠에서 깰 때마다 종종 낯선 감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여기가 어디인지,
지금이 언제인지,
나는 누구인지.
시간이 조금 흐르고 세포들도 잠에서 깨고 나면
이내 정답을 찾게 된다.
여기가 어디인지,
지금이 언제인지,
나는 누구인지.

여기 고3 남학생인 우연우가 있다.
독감 때문에 체육 시간 홀로 교실에 남아 잠을 자고 있다.
지금은 한여름, 뙤약볕이 내리쬐는 7월이다.
뻐근한 몸 때문에 잠에서 깬 연우는 세수를 하려고 몸을 일으킨다.
세상이 빙빙 돌고 구역질이 난다.
그런데 몇 발자국 내딛기도 전에 무언가에 부딪혀 밀려난다.
이게 뭐지?

(8p) 슬라임? 하리보 젤리? 유리와 젤리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투명한 물질이었다.
(9p) 창문에서부터 가로로 책상 네 개, 세로로 책상 세 개,
총 열두 개 책상이 놓인 공간이 연우가 움직일 수 있는 범위였다.
투명한 막 같은 게 사방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리고 천장에 떠 있는 빨간 공 하나.
공 한가운데 떠오른 글자.

(10p) 당신은 채집되었습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지구만 아니라면
아주 기분 나쁜 꿈을 꾸고 있는 거라 생각했겠지만
애석하게도 이것은 그의 현실이었다.
아이들이 교실로 쏟아져 들어와 곁을 스쳐가지만
큐브에 닿는 부분은 사라졌다.
연우의 모습은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연우는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채집되어
투명하고 말랑한 큐브에 갇혔다.

처음엔 교실을 난장판으로 만들며 별짓을 다해봤지만
빨간 공은 안정을 위해 의식을 통제한다는 안내와 함께
이내 강력한 잠을 선사했다.
쓰러지듯 잠들었고 잠에서 깨면
모든 것은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리셋.
다른 건 다 상관 없었지만 해고니가 너무 보고 싶어 괴롭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고백이나 해볼걸.
결국 그리움이 깊어져 눈물까지 흘리며 괴로워하자
몸에 극심한 통증이 찾아왔다.

고통에 몸부림치다 깨어난 연우는
어느새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왜 갇힌 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듯
알 수 없는 이유로 돌아온 것이었다.
해고니를 다시 보게 된 건 너무 기뻤지만
자신이 무려 1년이란 시간 동안 행방불명 상태였음을 알게 된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걸까?

누구에게 말한다 해도 다들 미쳤다고 할 게 뻔하니
연우는 큐브에서의 일들을 비밀로 품고
되찾은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전의 삶과 같은 듯
다른 주변 사람들과 자신의 상태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기발한 상상력과 어설퍼서 아릿한 첫사랑의 기억이
담뿍 담겨 있다.
읽는 내내 여름의 햇볕 냄새와 말랑한 포도향이
페이지에서 풍겨 나온다.

연우뿐만 아니라 우리도 모두 각자의 큐브에 갇혀 있을지 모른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래도 흘러가듯 살아도 별 탈은 없겠지만
기왕이면 한 번뿐인 인생 후회 없이
좋아하는 것을 위해 전력질주해 보는 시도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드릉드릉, 당장 어디든 달려나가고 싶은 마음이 시동을 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