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사람들을 생각해
정지혜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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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와 절벽으로 절경을 이루는 '목야'라는 섬을 아세요?
이 책은 그 섬에서 일어난 3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지은의 방
강과 구슬
이설의 목야

개별적으로 보이는 흐트러진 이야기의 퍼즐들은
페이지를 넘길수록 각자의 자리를 찾아가고
책을 덮을 무렵에는 하나의 커다란 그림이 됩니다.

누구나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강렬한 붉은색 표지에
물가에서 얼굴을 반쯤 내밀고 있는 검은 머리의 소녀가 그려진 표지.
예, 사실 책을 읽을 때마다 자꾸만 눈이 마주쳐
오싹한 기분에 포스트잇으로 얼굴을 가리고 읽었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이 책이 그저 무섭기만 한 이야기가 아님을 금방 알게 됩니다.

처음 실린 '지은의 방'의 지은은 부모와의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육지로 공부하러 나갔던 아빠가 어린 엄마를 만나 대학생 때 사고를 쳐 지은이 생겼고
둘은 학업을 이어가기 위해 아이만 덜렁 목야의 할아버지에게 맡깁니다.
지은은 할아버지와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고 부모는 억지로 목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렇게 지은의 소중했던 평온은 깨졌습니다.
부모는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웠습니다.
너 때문에 내가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네가 목야로 내려오자고 한 거 아니냐고 서로를 탓하며 지겹도록 물고 뜯습니다.
그들에게 지은은 무한한 애정을 쏟아부어야 할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지은에게도 그들은 부모다운 부모가 아니었고요.
책 곳곳에 부모를 향해 저주 같은 말들을 퍼붓는 대목이 많습니다.
이건 좀 심한데 싶으면서도 저는 그 문장들에 크게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텅 비어버린 지은의 마음을 저도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어느 태풍이 오던 밤, 친한 친구의 꼬임에 넘어가 지은은 강령술을 시도하게 되고
그 목소리를 만나게 됩니다.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를 흘리며 그것은 지은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고 유혹합니다.
그리고 일련의 사건들을 겪고 지은은 그토록 원하는 평온한 아침을 얻게 되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이게 여간 슬픈 게 아닙니다.

다음 이야기 '강과 구슬'에서는 어릴 때 사고로 동생 한이를 잃은 강과
구슬이라는 혼, 그리고 구슬이를 데리고 무당 일을 보던 구슬 할머니가 등장합니다.
어느 날 구슬 할머니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되어 강을 찾아와 구슬이를 찾아달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사실 강은 혼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강은 죽은 동생 한이 집 마당에서 어슬렁거리는 모습을 매일 지켜보기도 합니다.
구슬이는 할머니 곁을 맴돌지만 할머니는 그 사실을 모르고
강은 자신의 능력을 숨기느라 할머니와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되풀이 중입니다.
초원은 강의 유일한 친구로 목야로 이사 온 사람이며
강의 가족들이 한을 잃었을 때 유일하게 섬에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 모든 사람들의 관계가 목야에서 1년에 1번 열리는 목야제를 기점으로 크게 출렁입니다.

마지막 이야기 '이설의 목야'에서 화자 설은 자꾸만 가위에 눌리는 남편이 고민입니다.
그러던 중 '목야'에 용한 무당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되고 그곳을 찾게 됩니다.
무당은 설에게 자신이 이곳에 온 것이 우연이 아니라 인연이고 운명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오래 가지고 있던 거북이 인형을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며
설을 데리고 오래되어 낡고 초라한 집 앞으로 데려갑니다.
할 일을 다 마치고 돌아오라고 말하면서요.

책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의 결핍과 상실 때문에 상처를 안고 있습니다.
아프다고, 슬프다고, 힘들다고 제대로 내뱉지도 못하고 속이 곪아가고 있습니다.
그 비탄과 멍울들이 얽히고설킨 이야기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이 매우 좋았습니다.
뭐가 그리 좋았느냐 물으면 글쎄요.
그저 자꾸 제 마음이 철 가루가 되어 책의 자력에 끌려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마음속 커다란 블랙홀이 이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품었던 구멍과 잘 맞았기 때문이려나요.

관심이 가신다면 꼭 일독을 권장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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