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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숨결 가까이 - 무너진 삶을 일으키는 자연의 방식에 관하여
리처드 메이비 지음, 신소희 옮김 / 사계절 / 2024년 5월
평점 :
오랜만에 한강을 찾았다.
탁 트인 풍광을 찾기 위해 산책로를 한참 걸었다.
인적이 드문 강가 근처 자리에 작은 돗자리를 펴고 드러누웠다.
언젠가 비 오던 날 길가로 나왔다가 미쳐 땅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짓이겨 말라버린 지렁이가 보였다.
아님 누군가에게 밟혔던 걸까?
이름을 알 수 없는 아주 작디작은 벌레들도 보았다.
까맣고 통통한 개미들도 여럿 있었다.
개미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돗자리 가장자리에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보였다.
돗자리에 올라타지도 못하고 돗자리 아래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가느다란 팔, 다리와 더듬이를 쉴 새 없이 움직였지만 이동을 하진 못했다.
아!
내가 너희들의 길을 막고 있구나.
아이고, 이런...
미안해서 어쩐다...
하지만 나도 진짜 큰마음 먹고 나온 거라 우리 서로 양보 좀 하자, 어때?
최대한 생명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나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후후 바람도 불어보고 장애물을 이용해 진로를 변경해 주기도 했다.
건물에 잘려 조각난 하늘이 아닌 진짜 하늘 다운 하늘은 얼마 만인가?
끝장나는 노을을 기대했지만 지면 가까이로 구름이 두텁게 깔려있어 볼 수가 없었다.
대신 하늘을 나는 새들을 여럿 볼 수 있었다.
대형을 이루다가 흩어졌다가 금세 멋진 문양을 하늘에 새기는 날개 달린 친구들.
마침 읽고 있는 책<야생의 숨결 가까이>에서도 다양한 동물과 자연의 이야기가 담뿍 담겨있던 덕분에 오늘의 외출은 모든 장면이 새롭게 다가왔다.
<1장 둥지를 떠나 날아오르다>에서 작가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자세히 서술한다.
하여 페이지를 넘기면서 작가의 마음 상태에 동화되고 몰입하기 쉬웠다.
작가는 오래 살던 집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이주해야만 했다.
늘 자연을 바라보고 즐거움을 찾던 그였지만 우울증으로 인해 그 모든 것에서 시선을 거둔지 오래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세대를 거쳐 머물렀던 집을 처분하기까지 해야 했다.
15p
내 발목을 잡아둔 것은 과거, 아니 과거의 결핍이었다.
나는 습관과 기억에 갇혀 너무 오래 한자리에 묶여 있었다.
내가 뿌리를 내렸다는 생각에 얽매여 있었다.
그러다 결국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고 아무것도 쓸 수 없어졌다.
22p
우리가 이 집에서 산 시간을 합치면 110년이나 되는데, 텅 비어 휑뎅그렁한 식당에 의지 하나만 놓고 앉아 있노라니 고아가 된 듯했다.
아니, 눈이나 귀를 잃은 기분이었다.
그 장소의 추억은 집이라는 껍데기가 아니라 집 안의 세간들, 일상의 살림살이에 깃들어 있으니까.
두 세대에 걸친 손가락 자국으로 군데군데 움푹 팩 찬장.
어머니가 앉아 네 아이 모두에게 젖을 먹였던 낡고 나지막한 고리버들 의자.
50년 동안 거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던, 부엉이 모양 저금통을 재활용해 만든 문버팀쇠("PAT.SEPT 21&28 1880"이라는 명문이 새겨져있다).
문을 열 때마다 "부엉이 조심해"라고 외치듯 문버팀쇠 소리가 집 안 곳곳에 울려 퍼지곤 했다.
사물은 일종의 외적 기억, 사건과 감정의 구현이 된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부양하기 위해 어떻게든 글을 쓰고 살아내야만 했던 날들.
가끔은 과감하게 오래 머물던 곳을 떠나 새로운 곳에 둥지를 틀어야 하는 순간들이 인생에는 찾아온다.
작가에게는 노년의 그 지점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모두 잃어버린 줄 알았던 자연의 환희가 서서히 작가의 눈을 다시 뜨이게 만들어주었다.
28p
나는 평생 숲속에서 살아왔다.
봄의 눈부시고 힘찬 폭발, 여름의 짙푸르고 기나긴 황홀, 가을의 호화로운 쇠락, 겨울의 순수하고 헐벗은 나날 - 작업과 절제의 계절.
숲에서의 1년은 메트로놈 움직임처럼 규칙적이다.
숲이라는 공간뿐만 아니라 그곳의 나무결과 갈라진 줄기, 느리게 순환하는 빛과 그늘로 겹겹이 에워싸인 역사의 층에 내가 언제까지나 빠져들 줄만 알았다.
숲에는 수 세대에 걸친 인간의 삶을 넘어 문명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기운이 서려 있다.
숲, 즉 원시림은 개인에게나 인류 전체에 있어서나 '자라며 떠나온' 곳이라고 여겨지지만, 그럼에도 숲에 들어서면 항상 '돌아가는' 느낌이 든다.
숲은 오래된 기억과 회복력을 지난 장소다.
외국 작가임에도 문장이 수려하고 아름다워서 한국 작가의 글을 읽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작가 본인의 능력도 있을 테고 번역가님의 센스도 한몫했다고 생각된다.
물론 낯선 지명들, 처음 듣는 동식물의 이름 앞에서 잊고 있던 사실을 기억해 내곤 했지만 말이다.
그의 묘사가 아주 성실해서 곧잘 머릿속에서 상상의 세계를 그려낼 수 있었다.
16p
아침에 깨어났을 때 다락방에서 갓 태어난 새 한 마리를 발견했다.
둥지에서 떨어진 아직 날 줄 모르는 새가 초승달 모양 날개를 뻣뻣하게 편 채 누워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아기 새의 깃털은 한여름 하늘을 휙 스쳐 가는 어미 새의 실루엣처럼 신비로운 검은색이 아니라 잿빛과 갈색, 순백색이 어룽어룽 섞여 있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공중에서 보내는 삶에 완벽히 적응하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도 알아볼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정말 많은 동식물을 검색했다.
세상은 내가 모르는 수많은 것들로 가득 차 있다는 생각이 늘 막막했는데 이번 책을 읽으면서는 나의 무지가 그리 거북하지 않았다.
이 나이가 되어도 새로울 것이 있다는 게 감사하게 느껴졌다.
작가가 인용한 다른 작가들의 글들도 적재적소에 배치되었고 하나같이 아름다워서 감탄하면서 읽었다.
35p
알도 레오폴드는 "해마다 빛과 먹을거리를 맞교환하러" 미국을 찾아오는 칼새 덕분에 "대륙 전체가 어두운 하늘에서 떨어지는 야생의 시를 순이익으로 얻는다"라고 썼다.
칼새는 인간의 신경계 어딘가에 아직 남아 있는 기억이자 하늘을 날 수 있는 능력의 가장 순수한 표현이다.
38p
테드 휴스는 시 칼새에서 새들이 돌아올 때 느끼는 감정("그들이 다시 돌아왔다")에 관해 썼다.
새들은 여름이 돌아왔다는 것뿐만 아니라 "지구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라는 걸 보여준다고.
54p
에드워드 윌슨이 저서 아마조니아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듯이 말이다.
다시 태양이 나와서 숲 표면을 빛과 그림자의 요철로 조각냈다.
나뭇잎 앞면에 강렬한 빛이 쏟아지자 나무껍질에 2,3센티미터 깊이로 길게 팬 고랑이 축소판 협곡처럼 보였다.
바닷속에서와 마찬가지로 위쪽에서 걸러져 내리는 빛이 곧추선 나무둥치의 가장 낮고 움푹한 틈바구니를 끈질기게 비추었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건 자연과 동물 앞에서 인간이 모든 것을 멋대로 주무를 수 있다는 오만함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었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작가님.
18p
인생이 기묘하고도 희한하게 꼬이면서, 나는 다른 피조물과 어울리지 못하고 공허한 대기 속을 떠도는 불가해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당시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어쩌면 인류 전체가 그렇게 변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30p
산림 파괴와 해양 오염부터 멸종하는 생물이 1,000배 가까이 늘어난 상황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저질러온 비참한 실패의 목록은 더 이상 스스로를 동물 세계의 일부로 여기지 않는 생물종의 모든 징후를 보여준다.
우리는 기술을 통해 자연의 물리적 명령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자처하지만, 실은 자의식 때문에 자연의 관능과 직접성으로부터 추방된 섬뜩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지구에서 우리 역할이 위태로워진 것은 우리의 위력보다도 이런 오만함, 다시 말해 자의식이라는 특정한 능력이 인간에게 다른 모든 생물종의 삶을 멋대로 평가하고 처리할 유일무이한 특권을 부여했다는 신념 때문이다.
좋은 문장이 너무 많아서 이러다 책 한 권을 다 필사해야 할 기세이기에 이쯤에서 줄이겠다.
팍팍한 도시 생활에 지치고 상처받고 쪼그라든 당신에게 자연의 기운을 보낸다.
부디 회복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