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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하지만 만만하지 않습니다 - 공감부터 설득까지, 진심을 전하는 표현의 기술
정문정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평점 :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이라는 책 제목은 누구나 다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호기심을 가졌을 것이다.
대체 그 방법이 뭘까?
저 제목을 보고도 전혀 관심이 생기지 않았던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타인의 무례함에 화가 머리끝까지 나거나 울음이 터질 만큼 상처받아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읽게 된 <다정하지만 만만하지 않습니다>는 앞서 이야기한 책의 저자인 정문정 작가의 신작이다.
책은 250여 페이지 분량이고 작가가 의도한 대로 누구든 쉽게 읽을 수 있게 문장을 만졌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읽힌다.
저자는 작가이자 강연자로 일을 하고 있기에 각각의 분야에서 어떻게 글을 쓰고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오래 고민하고 그 끝에 얻은 결론을 우리에게도 공유해 준다.
우선 시작부에서는 글쓰기와 말하기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집어주며 말과 글을 신경 써서 사용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말한다.
20p
작가로서의 태도와 강연자로서의 태도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요.
글쓰기와 말하기에는 각기 다른 에너지가 사용됩니다.
(중략)
예컨대 글쓰기의 중요한 태도 중 하나는 확신하지 않는 것입니다.
에세이 같은 글은 고민에 천착한 과정과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이해해 보고자 노력한 흔적을 섬세하게 표현할수록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중략)
반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강의를 할 때는 주제의식이 명확해야 합니다.
27p
말을 하면서는 더욱 친절한 표현을 찾도록 애쓰고, 글을 쓰면서는 세심한 표현을 찾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32p
이런 대화들 앞에서 제일 먼저 체감하는 것은 '반향실 효과 echo chamber effect'예요.
반향실 효과는 소리가 울려 메아리치도록 설계한 방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반향실 안에 있으면 같은 소리를 반복해 듣듯,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끼리 모여 동일한 의견만 나눈다면 설득이나 설명을 위한 새 언어를 개발하지 못하고 매번 비슷한 어휘만 쓰게 된다는 것이죠.
(중략)
저는 '언어 표현의 외주화'에 대해서도 심각한 문제를 느끼고 있습니다.
메신저로 소통할 때 길게 말을 쓰려다가도 귀여운 이모티콘 표정 하나로 대체해버리는 경우가 많지요.
어떤 감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려다가 유행어를 써버리고 말 때도 자주 생깁니다.
69p
다른 사람들에게도 예외 없이 소변 주머니가 달려 있음을 확인하면, 이 두려움이 나에게만 찾아오는 게 아님을 알게 된다고요.
그러면 조금 더 솔직해도 되겠다는 용기가 생겨나고, 용기를 낸 자신과 대면하다 보면 타인을 덜 부러워하게 되며 자기혐오의 밤이 줄어든다고 말이죠.
다음 장에서는 어떻게 글을 쓰고 말을 해야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127p
우리가 자주 하는 말들은 최초에는 무의식의 영역에서 입 밖으로 튀어나오죠.
그러다 오래 입은 잠옷 같아진 말을 계속해서 쓰다 보면 그 말이 자꾸만 자기 귀에 들림으로써, 말이 드리운 자장 속에 스스로를 가두는 경우가 생긴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142p
엄마의 행동에 단순히 싫은 감정만 드는 게 아니라 마음이 뒤죽박죽 괴로운 상황이네요.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하지만 답답하고 죄책감마저 드는 거죠.
좀 더 들여다보면 '엄마는 내가 원치 않았던 걸 주면서 자신의 진심만 강조하고 감사를 강요하기 때문에' 힘든 것으로 느껴져요.
144p
결국 좋은 에세이는 실패담인 동시에 성장담인 것 같아요.
다음 장에서는 불쾌함을 어떻게 현명하게 표현할 수 있는지, 거절도 잘할 수 있는지 이야기한다.
경상도 문화권에서 자란 사람으로 작가의 이야기가 매우 공감이 갔고, 특히 자신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노력하는지에 대해 쓴 부분이 인상 깊었다.
183p
잘 따져보면 결국 거절을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부탁의 내용과 자기 자신이 찐득찐득하게 들러붙어 있는 거죠.
202p
아버지를 보고 있으면 행복해질까 봐 무서워하는 사람 같아요.
좋은 걸 좋다고 말하는 순간 시샘 많은 귀신의 저주에 걸릴까 봐 겁내는 사람이요.
204p
그런데 저를 가장 오랫동안 괴롭혀온 부분은 분노가 일렁일 때 비아냥거리고 싶은 걸 참는 일이에요.
더 날카로운 표현을 찾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턱이 얼얼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꾸준히 노력합니다.
임이나 당뇨 등 가족력이 있다면 더욱 건강에 신경 쓸 필요가 있듯이, 분노의 말을 다듬는 건 제가 평생 안고 가야 하는 약점이라 생각해요.
208-209p
비폭력대화의 언어로 부모에게 말을 걸어보았지만 번번이 저는 실패합니다.
딱히 실망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부모님은 바뀌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애초에 부모님을 바꾸는 건 제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도달할 수 있는 목표는 제가 바뀌는 것뿐이에요.
그것만이 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어요.
연애와 결혼까지 십 년을 함께한 남편과 거의 싸워본 적이 없다는 게 증거 중 하나입니다.
부부가 서로 상처 주지 않고 지내는 게 가능함을 삶에서 직접 목격 중이죠.
제가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가족에게만은 실패하지 않을 거예요.
225-226p
일본의 사상가 우치다 다츠루는 교양의 가장 큰 역할을 '쪼개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는 것도 배운 사람, 즉 언어가 있는 사람에겐 쪼갤 수 있는 미세한 차이가 보인다는 거죠.
그는 이를 해상도에 비유했습니다.
높은 해상도로 세상을 볼 수 있으면 차이를 분별해서 더욱 섬세하게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마치 48색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더 세밀하고 다채로운 언어를 사용하면 글 역시 풍부해지고 삶의 해상도도 높아집니다.
(중략)
글을 쓸 때는 자신에게 집중하게 됩니다.
표현하고 싶은 생각들을 머릿속에 소장 중인 어휘들과 일대일로 짝지어나가는 것이 글의 기본이기 때문이지요.
신문을 인쇄하기 위해 판을 준비하는 조판공처럼 중간에 흔들리지 않고 결론까지 뚝심 있게 밀고 가야 힘이 생깁니다.
적확한 단어를 고르는 데 힘을 써야 하지요.
반면 말하기에는 타인에 대한 관심이 기본입니다.
(중략)
또, 말을 하는 순간에도 타인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사회 초년생들에게 권장하고 싶다.
내가 어렸을 때 이 책을 만났다면 수많은 무례함 앞에 죄송하지도 않은 일에 죄송합니다만 연발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일일이 마음이 무너지지도 싶은 상처를 받지도 않을 수 있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너무 모든 감정에 매몰될 필요는 없다.
지금부터라도 조금 떨어져서 제대로 의견을 피력하고 나를 거칠게 대하는 말들에는 불편함을 확실히 표현할 줄도 아는 말과 글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