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복종
에티엔느 드 라 보에티 지음, 박설호 옮김 / 울력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한 국회의원이 장관이 되려던 시기. 기자들과 김치찌개를 먹었다. 한 나라의 장관 후보가 기자에게, 자신이 언론 자유를 억압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기자들은 이를 듣고도 기사화 하지 않았다. 심지어 기자와 국회의원이 밥을 먹는 자리를 사석이라 표현했다. 얼마 전 드러난 소위 이완구 김치찌개 회동은 언론이 정치권에 자발적 복종을 하고 있음에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한국 언론의 출입처 제도는 기자가 정치권 혹은 권력과 함께 싸우거나 힘을 합치는 존재인지, 감시하는 존재인지를 잊게 만들었다. 시사IN의 고제규 기자는 출입처에 얽매이지 않는 기자(그의 경우 주간지 기자)를 복싱의 해설자로 비유했다. “권투경기로 비유하면 일간지 기자는 사각 링 안의 심판처럼 두 선수의 상태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 반면 주간지기자는 해설자 입장에서 관중과 코치를 보고, 경기의 판을 넓게 읽을 수 있다. 일간지 기자에 비해 주간지 기자는 팩트만 보고 쫓아갈 수 있다.” ‘왓치독이라는 언론 본연의 임무를 잊게 한 것은 출입처 제도에 익숙해진 기자들의 습관때문이 아닐까.

 

 

라 보에티도 자발적 복종의 이유가 습관이라고 말했다.

인간의 자발적 복종에 대한 첫 번째 근거는 습관이다. 인간의 순응 과정은 말()의 태도와 같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고삐를 당기고 물어뜯지만 나중에는 얌전하게 변하는 말과 다를 바 없이 변한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신하로 살아왔으며, 그들의 조상도 그렇게 살아왔다고 말한다. (56p)  

 

 

라 보에티가 글을 썼던 16세기는 천부적인 자유를 갑자기 빼앗긴 자들이 존재하던 때였다. 사람들은 자신이 억압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거의 잊고 지냈다.’ 그들은 오히려 노예가 되었다는 것을 환호하며, 그 순간부터 흔쾌히 즐거운 기분으로 군주에게 봉사한다. 처음에 무력에 의해 정복당한 자들은 군주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뾰족한 묘안이 없기 때문이다.(46p) 그 뒤로는 습관을 들인 말과 같다. 보에티에 따르면 다음 세대 사람들은 자신의 타고난 약간의 특권이 오래 지속되는 데 그저 만족할 뿐이다.’   

 

 

어차피 변하지 않을 것. 변하지 않을 것에 대해 사람들은 포기하기 마련이다. 사회학자 아미타이 에치오니는 대통령을 무당에 비유했다. 사회에 문제가 생길 때, 대통령은 과장된 언어와 행동을 내비친다. 하지만 결국 달라지는 것은 없다. 대통령은 말과 행동만으로 국민들은 안심시킨다. 무당인 셈이다. 현대의 대통령이나 정치권 보다 변하기 어려운 것이 라 보에티가 글을 쓰던 당시의 신분제였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피를 흘리며 겪어보지도 못한 자유를 외치기 보다 독재자 옆에서 주어지는 약간의 특권, 전리품을 챙기려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독재자의 비호를 받으며 전리품을 챙기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독재를 통해 이윤을 챙기려는 사람들의 수는 마치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대대적으로 확장된다. (85p)

 

 

이는 현대 사회에 들어서서 더 가속화됐다. 신분제가 보이는 폭력의 결과였다면 현대에 복종을 이끌어 내는 것은 폭력은 아니다. 이는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많은 이들의 지지, 자본의 세련됨, 인터넷과 같은 신기술로 인한 것이다. 사실 보에티의 시대에 어떤 것이 폭력이 아닌 형태오 복종을 끌어냈는 지 궁금하다. 추측해보건대 돈이나 물품을 주고 누군가를 노예처럼 자신의 평으로 만드는 모습이었을 테다. 히포크라테스의 사례는 이를 뒷받침한다 

 

 

어느 날 페르시아의 왕이 히포크라테스를 신하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높은 관직과 선물로 유혹한 적이 있다. 이때 히포크라테스는 그리스인들을 죽이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한 이방인을 치료한다는 것은 양심이 허락하지 않으며, 자신이 조국을 억압하려는 어떤 사람에게도 자신의 의술을 이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64p)

 

 

이러한 은밀한 유혹은 현대에 더 기승을 부린다. 재독철학자 한병철은 <심리정치>에서 소셜미디어가 전면적 통제와 자발적 상호 감시를 유도하는 '디지털 파놉티콘'이라고 분석했다. 정치인이나 공인의 사생활이 아니더라도 sns를 타고 얼마나 많은 민간인(?)들이 마녀사냥을 당했는지를 상기해보면 무리한 분석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라 보에티 역시 폭력보다 무서운 것은 이러한 은밀하고도 세련된 유혹이라고 밝힌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우리를 은밀하게 노예로 만드는 유혹이다. 이에 비하면 폭력으로 통치하는 방법은 그다지 겁나지 않는다. 언젠가 미트리다테스는 사람들이 독약을 먹는데 익숙해졌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처럼 권력자들은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 노예 근성이라는 독으로써 유혹한다. 이러한 유혹은 하나의 습관으로 작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수월하게 이 독약을 삼키게 하고, 한번도 이 독이 쓰다고 말하지 못하게 한다. (49p)  

 

 

유혹에 익숙해지고 유혹이 가져다주는 전리품에 익숙해진 이들은 독재자가 사라질 때 오열한다. 로마 시인들은 카이사르의 죽음을 몹시 애도했다. 가장 악랄한 폭군의 잔혹성보다도 더 끔직한 것이 바로 카이사르에 대한 로마 시민들의 찬양이다. 진실로 말하건대, 폭군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노예 근성이라는 달콤한 독을 로마 시민들에게 마시도록 조처했다. 카리사르의 낭비벽, 관대함, 연회석은 인민들로 하여금 오랫동안 달콤한 맛을 즐기게 하였다. (70p)  

 

 

자유는 인간에게 천부적이지만 겪어본 적이 없어서 일까, 자유보다 전리품을 원하는 이들이 더 많아서 일까. 자유의 값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자발적인 복종을 하고도 그것이 복종인지 알지 못한다. 이제는 이 복종이 강요된 복종인지, 자발적 복종인지 구별하는 지혜조차 잃은 듯하다. 언론을 떠나 사회 곳곳에 숨어 있는 복종을 찾아내 구분하는 지혜가 필요한 때다.

 

 


 

  

-자발적 복종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플라톤이었다. 플라톤은 자신의 문헌 <향연>에서 사랑하는 자가 임에게 봉사하려고 생각하는 것을 "자발적 예속"이라고 표현하였다. (19p)

-인민 가운데 누군가 자유를 획득하기를 원한다면, 그는 권력에 대항하여 싸울 수밖에 없다. 비록 가장 고귀한 목적인 자유의 천부적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려 한다 하더라도, 나는 그에게 그러한 모험을 권유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혼자만의 힘으로는 인민 전체의 동물적 신분이 보편적으로 고유한 신분으로 바뀔 수 없기 때문이다. 개개인 가자에게 커다란 용맹심을 발휘하라고 무리하게 요구할 정도로 나는 욕심을 부리고 싶지는 않다. 인민들은 제각기 고유의 취향에 따라 자유로운 삶에 대한 막연한 희망과 확신을 가지고 불행한 삶을 계속 영위하려고 한다. 나는 이러한 태도를 무조건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권력에 봉사하느냐, 저항하느냐 하는 물음은 결코 개인이 제각기 선택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유를 그저 열망하기만 하였으며, 단순히 그러한 의지만 품는 것으로 만족하고 살았다. (...)사람들이 자유에 대한 열망과 의지를 다만 우연히 수동적으로 얻으려고 하기 때문이 아닐까? (24p)

-자유란 오로지 그것을 깨닫는 사람에게만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숨마저 바칠 정도로 자유가 가치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 25p)

-자연 속에는 어느 누구도 간과해서는 안 될 사항이 한 가지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평등이다. 신의 시녀이자 인간의 교사인 자연은 인간을 오로지 어떤 한 가지 형태로,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동일한 설계에 따라 창조했다. ( 34p)

-동물들 중에는 갇히게 되면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종류들이 많이 있다. (...)동물계의 그 밖의 다른 짐승들은 크든 작든 간에 그들이 감금당할 경우 완강히 저항한다. ( 37p)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인민은 자신이 억압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거의 잊고 지낸다. 자신에게 주어진 천부적인 자유를 너무나 뜻밖에, 갑작스럽게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들의 뇌리에는 자유를 되찾으려는 생각이 미처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얼핏 보기에 사람들은 자유의 상실에 대해 슬퍼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노예가 되었다는 것을 환호하며, 그 순간부터 흔쾌히 즐거운 기분으로 군주에게 봉사한다. 처음에 무력에 의해 정복당한 자들은 군주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뾰족한 묘안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다음 세대 사람들은 선대의 사람들은 혹독한 억압 밑에서 온갖 노역을 어쩔 수 없이 행하지 않았던가? 말하자면 다음 세대 사람들은 자신의 타고난 약간의 특권이 오래 지속되는 데 그저 만족할 뿐이다. 그들은 감히 다음의 사항을 인지하려고 하지 않는다. 즉 차제에 눈앞의 것과는 다른 어떤 행복이 주어지며, 전대미문의 어떤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 말이다. (46p)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우리를 은밀하게 노예로 만드는 유혹이다. 이에 비하면 폭력으로 통치하는 방법은 그다지 겁나지 않는다. 언젠가 미트리다테스는 사람들이 독약을 먹는데 익숙해졌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처럼 권력자들은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 노예 근성이라는 독으로써 유혹한다. 이러한 유혹은 하나의 습관으로 작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수월하게 이 독약을 삼키게 하고, 한번도 이 독이 쓰다고 말하지 못하게 한다. ( 49p)

-우리의 내적성향은 무엇보다도 노예화로의 유혹이라는 습관에서 강한 영향을 받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천부적 기질은 지속적으로 가꾸어 나가지 않을 때에는 순식간에 썩어버리기 때문이다. (50p)

-인간의 자발적 복종에 대한 첫 번째 근거는 습관이다. 인간의 순응 과정은 말(馬)의 태도와 같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고삐를 당기고 물어뜯지만 나중에는 얌전하게 변하는 말과 다를 바 없이 변한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신하로 살아왔으며, 그들의 조상도 그렇게 살아왔다고 말한다. (56p)

-인민이 노예 신분으로 태어났고, 노예로 길러졌다는 게 자발적인 복종에 대한 첫 번째 근거다. 즉 인간은 독재 치하에서 필연적으로 비겁하고 연약해진다는 것이다.(63p)

-어는 날 페르시아의 왕이 히포크라테스를 신하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높은 관직과 선물로 유혹한 적이 있다. 이때 히포크라테스는 그리스인들을 죽이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한 이방인을 치료한다는 것은 양심이 허락하지 않으며, 자신이 조국을 억압하려는 어떤 사람에게도 자신의 의술을 이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64p)

-로마 시인들은 카이사르의 죽음을 몹시 애도했다. 가장 악랄한 폭군의 잔혹성보다도 더 끔직한 것이 바로 카이사르에 대한 로마 시민들의 찬양이다. 진실로 말하건대, 폭군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노예 근성이라는 달콤한 독을 로마 시민들에게 마시도록 조처했다. 카리사르의 낭비벽, 관대함, 연회석은 인민들로 하여금 오랫동안 달콤한 맛을 즐기게 하였다. (70p)

-많은 사람들은 독재자의 비호를 받으며 전리품을 챙기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독재를 통해 이윤을 챙기려는 사람들의 수는 마치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대대적으로 확장된다. (85p)

-신하들은 향락적인 연회를 개최하여 폭군을 만족시키고 황홀하게 해야 한다. 어쩌면 이러한 유흥은 그들의 고유한 기질을 억압하고 천부적인 재능을 거부하고 방해하는 것이다. 신하들은 항상 통솔자의 말에 넋을 잃고 들어야 하며, 그의 눈짓에 따를 눈을 가지고 있어서 언제나 그를 살펴보아야 한다. 손과 발로써, 눈과 귀로써 그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항상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사는 인간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요컨대 인간이 그렇게 살 수 있단 말인가? (88p)

-사람들은 어리석기 때문에 항상 독재자를 용서한다. 그러나 나는 어째서 그렇게 용서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만약 독재자의 잔혹함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스스로 만족하는 것보다 더 분명한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면, 사람들은 독재자의 잔악무도한 행위를 충분히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9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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