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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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 소개(알라딘 제공)

 

 


 

'다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9.11테러 일주일 후 손택이 쓴 글의 제목이다. 테러에 슬퍼하되, 이 테러가 '미국이 맺은 특정 동맹관계와 미국이 저지른 특정 행위에 따른 당연한 귀결'임을 인정하자고 한다. (만약 한국에서 비슷한 양상의 테러가 일어났을 때 한 여성지식이 이런 말을 했다면 그는 어떻게 됐을까.)

 

 손택이 <타인의 고통>을 통해 하고 싶은 말도 이와 같다. 타인의 고통을 보고 연민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바보처럼 슬퍼하는 거라고. 슬퍼하되, 바보가 되지 않아야 한다고.

 

 


 

 

유튜브의 뉴스·정치 카테고리에 들어가 보면 재난 영상은 엄청난 조회 수를 자랑한다. IS가 만드는 동영상을 굳이 꺼내지 않더라도 총살된 사람, 쓰나미가 닥치는 모습들이 그득하다. 그 유명한 9.11 테러의 순간은 지구 반대편의 사람이라도 몇 초간 그 영상이 저절로 떠오를 만큼 자주 재생됐다. 3.11이후 후쿠시마의 영상, 4.16이후 무한 반복되었던 세월호 침몰의 순간.

 

어마어마한 재난이 아니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주차장 알바의 굴욕적 모습, 보육원 선생님에게 아이가 맞아 저 멀리 쓰러지는 모습까지. 여기저기서 고통은 재현된다. 우리는 이런 불편한 일들을 보아야한다고, 피하지 말고 직시해야 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이것들을 바라보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윤리의 문제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다.

 

세월호 이후 언론의 반성문은 이런 윤리의 문제를 전면으로 들고 나왔. 하지만 아직 이. 얼마 전 모 인터넷 언론사에서는 이른바 땅콩회항 사건으로 검찰에 출석하는 여성의 표정을 순간 포착했. 왜곡된 앵글에서는 여성혐오까지 읽혀지는 사진이 나왔다. 그 사진은 인터넷에 흘러넘쳤고 예능프로그램까지 진출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사진은 영상보다 위험하다. 영상이 수백 장의 사진을 이어붙인 것이라면 사진은 한 장이다.

 

맥락과 사실의 싸움이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듯, 맥락을 잃은 사실은 왜곡을 사져온다. 어쩌면 왜곡된 순간 중에서도 가장 성공적으로 왜곡된 순간이 사진이다. 손택은 카메라가 발명된 1839년 이래로, 사진은 죽음을 길동무로 삼아왔다’(46p)고 말한다. 사실 인간이 사는 동안 죽음을 맞는 시간은 찰나 중의 찰나이며, 어쩌면 가장 강렬한 순간이다. 강렬한 것만을 길동무 삼기에, 사진에서 왜곡은 필연일지도 모른다.

 

 


 

▲책 32p의 도판(알라딘 제공) 

 

 


 

모순이다. 사진의 전제는 누군가는 틀림없이 그곳에 존재했던 인물’(48p)사실이며 일말의 예술적 기교가 아닌 증거품’(49p)이다. 뉴스라는 사실을 전하는 매체에 사진이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 사진이 왜곡이라니? 사진작가의 프레이밍 안에는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작가의 의도가 담겨있다. 사진 이미지도 누군가가 골라낸 이미지일 뿐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구도를 잡는다는 것이며, 구도를 잡는 다는 것은 뭔가를 배제한다는 뜻이다.(75p)

 

수많은 유명사진들의 왜곡과 연출을 줄줄이 읊은 후, 손택은 예외의 사례를 짚기도 한다. 사실을 담은 사진들은 세상을 바꾸기도 했다. 1947년 파리에서 만들어진 <매그넘 포토 에이전시>는 베트남 전쟁의 모순(미국이라는 세계의 수호자가 민간인 학살이라는 비문명적인 일을 행했다는 참상)을 고발했고 전 세계적 반전운동의 계기가 됐다. 허나 베트남전이라는 사례를 제외하고, 끔찍하고 잔인한 실상이라는 사진들은 대부분 연출이었다.

 

    

▲매그넘의 웹페이지. 

 

 

사진을 위해 끔찍한 장면을 만드는 일들도 비일비재했다. 이 때야 말로 사진의 shoot이 총을 쏘는 shoot과 같은 단어임을 상기하는 때다. 손택은 이를 피사체를 쏘는 카메라와 인간을 쏘는 총을 동일시 할 수밖에 없다’(103p)고까지 이야기했다.

 

 

문제는 사진을 연출할 때 드러나는 나와 타인의 구분이다. 전쟁이나 죽음 다루는 사진들 중에 미국들 제 1세계(편의상)를 다룰 때에 죽은 사람의 얼굴은 드러나지 않지만 제3세계, 타인들의 얼굴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것은 일종의 품위 차리기인데, 타인들에게는 꼭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졌던 그런 품위 차리기이다.(109p) 여기에서 윤리는 상실된다.

 

 

자신들이 저지른 폭력의 희생자를 전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망각한 채, 자신들보다 어두운 피부를 지닌 이국인들을 잔혹하게 대하는 광경을 사진에 찍어 전시하는 것도 이와 똑같은 일이다. 비록 적이 아닐 지라, 타자는 보는 사람이 아니라 보이는 사람 취급을 당한다. (113p)

 

 

이 연출을 손택은 대상화’(125p)라고 불렀다. 대상화됐다는 것은 곧 타인화됐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1990년대 사라예보에서 내전으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의 사진과 아프리카 소말리아에서 기근을 견디는 사람들의 사진이 나란히 전시됐을 때, 대상화된 대상은 우리의 고통은 세계 어디에나 있는 흔한 고통이란 말이야?”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다. 사진이 고통을 대상화한 결과다.

 

 

이 대상을 바라보는 연민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연민은 소중한 감정이지만 이미 대상화된 고통을 볼 때 사람들은 나는 거기 있지 않다를 확인하며 나의 안전을 확인하게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연민은 스스로 자신을 이 일에 무고하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다. 연민 속에는 무관심, 무력감, 안전을 확인하려는 욕구, 무고함이 들어있다. 위험한 동영상과 그것을 보고 있는 내가 앉은 소파의 간극은 얼마나 큰가.

 

 

특권을 누리는 우리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보내는 것을 그만둔다는 것. 이것이야 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손택이 남긴 과제를 떠안지 않으면 안 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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