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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어렴풋이 꿈을 꾸다 - 이동진의 영화풍경
이동진 글.사진 / 예담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행복한 상황에 있는 것과 행복한 것과는 다르다. 누가 봐도 행복한 상황이고, 스스로도 알고 있다. 아니 오히려 이런 행복한 상황을 내가 누려도 되는가 싶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행복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행복할 줄 아는 사람은 타고 난다. 어떤 이는 행복할 줄 모른다. 다른 의미의 사이코패스인 게다.
‘행복사이코패스’들은 종종 그들 곁에서, 행복한 상황에 행복할 줄 아는 이들을 빤-하고 쳐다본다. 대부분 그 대상은 애인이거나 가족이다. ‘넌 행복하구나.’ 부럽기도, 가엾기도 한 느낌. 우리 같이 행복한 상황 속에 있는데, 네가 느끼는 걸 같이 못 느껴서 미안해. 그래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은 행복을 연기한다.
그러나 이들은 어떤 상황이 와도 행복할 거란 기대감이 없기에 역설적으로 현재를 즐긴다. 얼마 전 종영한 한 드라마에서 너무나 사랑하던 남편이 바람을 피우자 깨끗하게 돌아서는 한 여인의 대사가 떠오른다. ‘헌신의 장점은 미련이 남지 않는 거’라고. 물론 이 여인은 행복사이코패스는 아니었지만 현재에 충실했다는 점에서 같은 류로 보인다.
어떤 상황도 행복을 보장할 수 없기에, 지금 상황에 최대한 몰입한다. 이는 미래에도 행복을 느끼지 못한 자신이, ‘그때 충실했더라면 어땠을까’등의 자학을 않기 위한 장치다.
이 여행기에는 다른 여행기와는 달리 숭배나 찬미 혹은 불쾌 등의 감정이 절제돼있다. 종종 지나던 아이나 말에게서 슬픈 눈을 찾을 뿐이다. 이 기획은 누가 봐도 부러운 상황이다. 자신의 전문성을 살려 세계 곳곳을 누벼 책을 내고, 돈을 벌고. 그런데 이 사람, 들떠있지 않다.
책의 곳곳에서 나오는 ‘여행자의 윤리’를 지키는 모습은 자신의 감정에 따라 글을 쓰는 ‘예술가로서의 작가’의 모습이라기보다, 자신의 저술활동이 혹여나 현지 사람을 대상화하지는 않을까봐 노심초사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이 사람, 열심이다. 혼자서 이상한 무인도에 들어가질 않나, 경비원에게 몇 번이나 내쫓기고도 노숙을 하려하지 않나.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은 생각보다 행복하지 않다. 남들은 너무도 부러워하지만, 나도 내가 행복한 상황임을 알지만, 일이니까, 행복을 느낄 수 없다. 몇몇은 괴로움에 시달리거나 일을 그만두기도 한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몇몇은 행복사이코패스로서 일에 더더욱 헌신하고 충실해진다. 그리고 좋은 결과물을 만든다. 이 책은 그 결과물이다. 좋은 결과물을 낸 몇몇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영감을 찾는 것은 아마추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하러 간다." (필립로스 - 에브리맨 中)
홀로 있을 때의 침묵은 과도하게 쓰라리고, 둘이 함께할 때의 위안은 지나치게 감미롭다. 그렇기에 인간은 관계릐 부조리한 이진법 속에서 무망한 진자 운동을 한다. 48p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래는 고체이고 액체이며 기체였다. 65p
풋사랑은 대답하고 싶은 말을 오히려 질문한다. 그리고 어린연인들은 가장 중요한 순간에 딴청을 피우는 척한다. 109p
내 인생에서 가장 천천히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사이에, 나는 계절이 흘러 가는 것을 보았다. 130p
연인들을 변하게 만드는 것은 멀어지는 사랑의 퀀태일까, 다가오는 사랑의 열정일까. 이제 막 닻을 올린 남의 사랑 앞에서 오랜 세월 항해해 온 나의 사랑이 일순간에 침몰하는 광경을 목도해야 했던 사람의 슬픔과 자기연민을 강력한 멜로디에 실어낸 그 노래는 아바 음악의 정화였고, 영화 <맘마 미아>의 정점이었다. 140p
결국 모든 것은 무엇을 좀 더 원하느냐에 대한 욕망의 비중과 확률 문제였다.143p
그 모습을 사진에 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 순간에는 사진 찍는 것보다 마주보며 나도 손을 흔들어주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152p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란 인도 경전 우파니샤드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170p
사실 모누리키 섬 가까운 거리에는 몇 개의 섬이 있었다. 고립의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서 제작진들이 카메라 앵글 속으로 들어온 주변의 섬들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일일이 지웠을 뿐이다. ... 고독은 아무도 없는 망망대해 위에 있지 않다. 언제나 그것은 북적대는 시장 한복판이나 모두들 떠들썩하게 술잔을 비워대는 술집 같은 곳에 있다. 179p
너무 크거나 지나치게 강렬한 것은 전모를 파악하기 어렵다. 사람의 풍경은 클로즈업 앵글에만 담긴다. 연애는 미세한 감각을 극도로 예민하게 벼리는 대신 거시적인 조망 능력을 어느새 잃게 만든다. 185p
영화 <투스카니의 태양>은 프랜시스의 내레이션으로 끝난다. "듯밖의 일은 항상 생긴다. 그로 인해서 인생이 달라진다. 이젠 다 끝났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조차 좋은 일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 더욱 놀랍다." 199p
여행자들은 세상의 구석구석을 떠돌며 기어이 흔적을 남겼다. 어떤 연인은 바위에 하트무늬를 새기고, 어떤 연인은 철망에 자물쇠를 채운다. ...여행은 달콤하지만 동시에 허망하다. 간절한 마음으로 잠시 머물렀던 누군가의 순간은 영겁 속에 산산이 흩어져버린다. 그리고 무너진 돌탑과 희미해진 낙서, 녹슨 자물쇠와 닳아버린 동전은 호기심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새로운 여행자의 눈동자를 텅 빈 세월의 이명 속에서 무심하게 맞는다. 208p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현실의 남녀가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에 매혹되어 그 흔적을 찾아다니는 이유는 무엇일까. 허구의 슬픔을 자신들의 삶에 접종함으로써 면역을 얻으려는 걸까. 이럭저럭 만나서 고만고만하게 헤어지는 현실의 사랑은 미쳐 날뛰다가 산산이 부서지는 신화적 사랑의 파편 속에서라도 기필코 에너지를 끌어내고 싶은 것일까. 209p
<제 7의 봉인>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페스트가 만연했던 시대에 스스로 피범벅 상처를 내는 피학적 행위로 신의 분노를 달래려 했던 집단적 광란의 장면은, 역설적으로 신의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들의 절망이 그려낸 지옥도였다. 224p
1983년에 은퇴를 선언했던 베리만은 오랜 세월 이집에서 은거하며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 매일 아침 45분간 산책을 하고, 책상 앞에 앉아 세 시간동안 글을 썼으며, 점심을 먹고나서는 정해진 시간 동안 책을 읽은 뒤, 헛간을 개조해 만든 개인 극장으로 가서 영화를 보는 생활을 반복했다. 233p
말년의 베리만은 주위 사람들에게 이렇게 토로했다고 한다. "늙는 게 이토록 어렵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그동안 왜 하나도 없었지?" 아마도 그는 삶의 매 순간 쩔쩔매며 살았을 것이다. 235p
알제리의 카바일 부족 사람들은 시계를 ‘악마의 맷돌’이라 불렀다고 했던가. 그리고 도시문명 비평가 루이스 멈포드는 산업사회의 핵심 기계가 증기기관이 아닌 시계라고 말했다. 245p
누군가 잠깐 들른 휴식 공간이 다른 이에게는 삶의 터전이라는 것. 여행자는 종종 죄책감의 삯으로 환상을 소비한다. 248p
그는 존레논과 자신이 동갑이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하지만 나는 아직 살아 있죠."라고 말하면서 웃었다. 그의 웃음에 담긴 것은 행복감이었을까, 아니면 겸연쩍음이었을까. 혹은 먼저 보낸 자의 아쉬움이나 뒤에 남은 자의 미안함이었을까. 268p
새로운 사랑이 들어 앉는 곳은 상실한 이전 사랑의 빈자리가 아니라 그때까지 활용된 적이 없는 마음속 또 다른 공터다. 잃어버린 관계는 잊힐 수는 있어도,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되거나 복원될 수는 없다. 새로운 관계가 주는 위안은 그저 새로운 위안일 뿐이다. 271p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로 열리는 문이 닫혀버린 그 문인 것은 아니다. 설혹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해도, 그게 우리가 과거에 그토록 매달리는 이유일 것이다. 27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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