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말의 지옥 ㅣ 들판문고 1
이은재 지음, 신민재 그림 / 온서재 / 2021년 9월
평점 :
과거 “신과 함께”라는 영화가 있었다. 한국의 사후 세계-저승-관을 배경으로 하는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로, 인간이 이승에서 지은 죄를 심판하는 것을 큰 줄거리로 한다. 이 중 누구든 걸리겠구나, 싶었던 지옥이 있다. 그것은 바로 발설지옥(拔舌地獄)이다. 발설지옥은 입으로 남에게 상처를 준 자를 심판하는 곳이다.
말은 의사소통의 수단이자 감정 표현의 수단이기도 하다. 자신의 감정을 적절한 어휘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한 사람에게도, 간혹 속에서 끓어오르는 화 때문에 욕이 튀어나올 때가 있다. 고백컨대, 나도 가끔은 그렇다. 욕이 사람을 저열하게 보이게 하고, 욕을 함으로써 무엇 하나 해결되는 것 없다는 걸 아는 어른인 나도 그렇다. 욕이 사람을 세 보이게 하고, 욕을 함으로써 감정이 해소되는 것 같다고 여기곤 하는 아이들은 더더욱 욕을 자유롭게 사용한다. 욕의 사용 행태를 보면 창의적이기까지 하다.
“말의 지옥”의 주인공 호랑은 삶이 쉽지 않다.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익숙지 않은 곳에 이사와 자신과 가족들을 탐탁지 않게 여겨 할 말 못할 말 가리지 않는 욕쟁이 돈할매도 만났다. 호랑은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주변에 분노하며, 누구도 자신을 건들지 못하게끔 가시 돋친 혀로 무장한다. 그 혀가 찾은 손쉬운 사냥감은 같은 반 학생(친구가 아니라 학생이다. 사과와는 별개로 그들이 서로를 친구로 두느냐는 다른 문제이므로)이다. 호랑은 함께 한 얼마 안 되는 시간만으로도 어떻게 하면 빠르고 깊은 상처를 줄지 손쉽게 파악하고, 누구보다도 날카로운 말로 그들을 사정없이 할퀸다. (다행히) 주변 친구들도 가만있지는 않아서, 호랑이 할퀼수록 반발이 커지고, 결과적으로 호랑의 욕 구사 능력은 날로 일취월장한다. 하지만 누구도 행복하지는 않다. 오히려 호랑은 정당방위로 휘두른 다른 친구의 날카로운 혀에 괜히 상처받는다. 웃기는 꼴이다. 칼을 먼저 휘두른 사람이 아프다고 울어봤자 동정받지 못한다. 호랑이 원한 것은 자신을 위해주는 따뜻한 말과 손길이었을 뿐인데 말이다. 호랑이 말을 할수록 점점 그가 원하는 것들과는 멀어져간다.
서툰 호랑의 행동이 눈살이 찌푸려질 때쯤 욕의 구렁텅이에 처박힌 호랑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이 있다. 호랑이 멍텅구리라고 여겨왔던 오잘이다. 오잘은 욕 너머 호랑의 상처를 마주하고 어루만진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욕을 하지 않게 된 호랑을 주변에서도 변화한 태도로 대한다. 자신에게 상처 주지 않는 주변을 확인하며 호랑은 점차 안정되어간다. 호랑을 변화시킨 것은 욕 그 자체가 좋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욕을 하면서 자신에게 좋지 않은 상황이 반복되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호랑은 변했다.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은 말과 행동이요, 욕을 사용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이 질이 좋지 않음을 증명한다. 질이 좋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에 걸맞는 대우가 이어지는 법이다. 그것이 싫으면 그 굴레에서 스스로 나오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수준 낮은 대우가 지속되어 싫어질 경지까지 가려면 얼마나 욕을 해야 할까, 5년? 10년? 그 긴 세월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이 책이다. 굳이 내가 욕을 하지 않아도, 욕을 해서 얻을 수 있는 낮은 평판과 불쾌한 대우를 호랑을 통해 간접 체험할 수 있다. 누구보다도 강한 말의 칼로 남에게 휘두르지만, 본인 역시 남의 말에 크게 요동치는 얄팍한 멘탈의 호랑이 여기에 우리 대신 있다. 백 번 욕 하지 말라 지도해도, 한 번 경험하는 것만 못하다. 호랑을 반면교사 삼아,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것만이 그 끝없는 말의 지옥에서 헤어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