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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 - 제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1997년 2월
평점 :
품절
문학동네가 조선일보의 자본력을 바탕으로 성장했다면, 은희경은 문학동네를 기반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그 두 번째가 전경린이라 할 수 있다.
은희경 소설의 인물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세상속에서 고독을 즐기며 자기에게로 지독히 침잠하는 조금은 낯선 인물들. 개인화된 일상속에서 자의식은 강하지만, 조금은 회의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인간의 모습. 가족제도와 감정사이에서 갈등을 느끼는 인물들...
반면, 전경린의 소설의 인물은 개인적으로는 나약하지만, 타인을 통해 삶의 의미를 깨달아가는 인물들이다. 유독 8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이, 무거운 배경과 야만적 폭정이 그네들의 개인적 감정을 허락치 않더라도 그들의 생의 의미는 결국 사랑이라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사회의 구조적 모순 앞에, 패배의 울분을 참아야 하는 동시대의 인물들 앞에 분노와 적대감을 원동력 삼아 운동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사람들. 태인이라는 이름의 아무곳에도 존재할 수 없었던 사람들, 어쩌면 정수처럼 죽어갔던 우리네 노동자들, 결국, 실존을 부정해야하는 현실 앞에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던 이들, 하지만, 80년대가 패배나 상실이 아닌 그리움으로 기억될 수 있는 건, 그네들의 삶을 하나로 묶어세울 수 있는 사랑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대의 무게에 눌려 또한 어머니의 외도로 인한 사랑의 강박적 두려움을 가진 태인의 이나에 대한 본능과도 같은 사랑, 끝없는 존재의 심연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이나의 태인에 대한 홀로서기를 감당하는 사랑, 시대의 목표를 상실한 활동가로서 허무와 회의를 감당해야하는 정수의 태인에 대한 삶을 위한 사랑, 아내의 죽음으로 원죄와도 같은 죄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정서현의 이나에 대한 생명을 창조하는 사랑, 그네들의 사랑이 조금은 의존적이고 왜곡되었을지라도 아름다울 수 있는 건 자신의 부정이 아닌 성장의 모태가 되었기 때문이리라.....
운동은 있으되 사람은 없었던, 분노와 적대감은 있으되 사랑은 존재하지 않았던 지독히도 아팠던 그 시절에 대해 그리워할 수 있는 80년대를 자신의 태생지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전경린과 같은 사람은, 어쩌면 행복한 사람이지 않을까? 적어도 그 시대를 경험해보지 못한 나같은 사람에 비한다면.....하지만, 80년대가 아쉬운 건 감히 그리움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일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