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미래사 한국대표시인 100인선 9
정지용 지음 / 미래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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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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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 김남주 유고시집 창비시선 128
김남주 지음 / 창비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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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밥상

 

예나 이제나

어머니 밥상은 매한가지다

묵은 배추김치에

멸치 두세 마리 가라앉은 된장국에

젓갈에 마늘장아찌에

달라진 것이 있다면 보리밥 대신 쌀밥이다

 

어머니 살기 좋아졌지요

냉장고도 있고

세탁기도 있고

모는 기계가 척척 심어주고

제초제를 뿌리고 비닐만 씌워주면

오뉴월 땡볕에 진종일 콩밭에 나앉아

그놈의 김을 매지 않아도 되고요

 

그러나 짐짓 물어보는 나의 물음에

어머니의 대답은 시큰둥하다

 

좋아지면 뭣한다냐 농사짓고 산다 하면

총각이 시집 올 처녀를 구하지 못하는 시상인디

이런 시상 난생 처음 살아야 그뿐인 줄 아냐

사람이 죽어도 마을에 상여 멜 장정이 없어야

지난 봄에 아랫말 상돈이 아부지가 죽었는디

저승 가는 사람을 상여소리도 없이

식구들끼리 리야까에 싣고 뒷산에 갖다 묻었단다

옛날에는 사람이 죽으면 사흘 낮 사흘 밤

마을이 온통 초상이고 축제였는디......

 

밥술을 뜨는 둥 마는 둥하다가

어머니는 숟갈을 놓으시며 한숨을 쉬었다

 

봄이 와도 이제 들에 나가 씨 뿌릴 맘이 안 생겨야

쭉정이만 날릴 가실마당을 생각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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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젤 2015-05-21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시인
_김남주

세상이 몽둥이로 다스려질 때
시인은 행복하다

세상이 법으로 다스려질 때
시인은 그래도 행복하다

세상이 법 없이도 다스려질 때
시인은 필요없다

법이 없으면 시도 없다
 
유리창 민음사 세계시인선 20
정지용 지음 / 민음사 / 199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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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이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 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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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물고기처럼 - 2003 제48회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나희덕 외 지음 / 현대문학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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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명

 

그의 꿈과 꿈 사이에 나는 나의 꿈을 놓았다. 나의 꿈과 꿈 사이에 그는 그의 꿈을 놓았다. 꿈과 꿈 사이를 꿈으로 채웠다. 푸른 새벽이면 그 나란히 놓여진 꿈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갔다. 꿈으로 꿈을 붙잡았다. 꿈으로 꿈을 밀어냈다. 밀다가 밀리다가 그의 꿈과 나의 꿈이 겹쳐지면서 꿈은 지워졌다. 나는 비로소 잠에 빠져들었다. 어두운 잠 속에서 꿈은 파도가 밀려간 뒤의 조개껍질처럼 드문드문 흉터가 되어 박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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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같은 세월 창비시선 130
김용택 지음 / 창비 / 199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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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같은 세월

 

꽃이 핍니다

꽃이 집니다

꽃 피고 지는 꽃

강물입니다

강 같은 내 세월이었지요.

 

세월은 가고

 

가다가 문득 서 둘러보면

삶은 허허롭네

산허리에 기대고 싶은 이 몸이

마른 갈대처럼

가는 바람에 기대어

쓰러질 듯

문득 가벼워져

서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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