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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268
황동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2월
평점 :
삼랑진 만어사 물고기 바위들
차곡차곡도 아니고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것도 아닌
혼자 사는 너럭바위도 아니고
언덕 아래로 굴러 내리는 몽돌들도 아닌
그런 삶을 본 적이 있는가?
한 골에 그냥 모여 살고 싶어서
모여 서로 몸 비비며 살고 싶어서
만어산 9부 능선까지 만 마리 물고기가 기어오르다
저 멀리 환한 낙동강 가을 물빛이 불렀던가
한번 모두 뒤돌아보아
소금 기둥 대신 바위들이 되어
두드리면 생각난 듯, 잘들 있지? 종을 치고
두드리지 않으면 달개비 구절초와 함께 질펀히 살고.
일부러 일으켜 세우려 들지 않는다면
누구나 일순 저도 몰래 주지가 되고
다음 순간 손 털면 범종 소리
손마저 턴 범종 소리.
우포늪
우포에 와서 빈 시간 하나를 만난다.
온 나라의 산과 언덕을 오르내리며
잇달아 금을 긋는 송전탑 송전선들이 사라진 곳,
이동 전화도 이동하지 않는 곳.
줄풀 마름 생이가래 가시연이
여기저기 모여 있거나 비어 있는
그냥 70만 평,
누군가 막 꾸다 만 꿈 같다.
잠자리 한 떼 오래 움직이지 않고 떠 있고
해오라기 몇 마리 정신없이 외발로 서 있다.
이런 곳이 있다니!
시간이 어디 있나,
돌을 던져도 시침이 보이지 않는 곳.
박수근의 그림
저 돌담 저 돌탑 저 돌무더기
끊겼다 이어졌다 저들 속에 흐르고 있는 화강암 결이
어느 날 떠올라 하늘이 되고
흐린 겨울 저녁이 되고
과일 함지 머리에 이고 걷는 아낙들이 되었으리.
너나없이 춥고 배고팠던 겨울날
옷 벗은 모델 살 돈 없는 박수근이
할 수 없이 나무들을 옷 벗겨 그리다가
달도 별도 없이 흐린 저녁 하늘 내다보며
이게 아마 마지막 물감이지 되뇔 때
몸과 마음에 화강암 옷을 해 입고
마냥 봄을, 봄을 향해 걸은 아낙들.
겨울날, 장승업의 활물도
세상살이 끓는 죽 먹는 것 같은 때면
속절없이 세잔의 정물 앞에 서곤 했으나,
금시 방바닥에 쏟아져 구르고 터지기 직전
식탁보에 몸 붙이고 있는 사과 오렌지 물병을 마주 보며
뜨거운 죽 눈감고 삼키곤 했으나,
아 일월의 먼지!
이제는 혀도 닳고
목구멍 데게 하던 죽도 설핏 식었으니
장승업의 빛 바랜 한지 활물도 구석에
슬며시 게로 기어 들어가
그냥 편히 놀고 있는 붓이랑 벼루랑 아직 살아 있는 조개랑
며칠씩 계속 싹 트고 있는 겨울 무랑
어렵지 않게 함께 뒹굴며 나머지 날을 날까.
내일인가 모렌가
하늘에 나무에 집에 바람 속에
생사람 못살게 굴 봄빛 터질 때
잽싸게 살고 싶어하는 것 다 밖으로 내보내고
게마저 나가고 싶어한다면 집게발 들려 내보내고
어느 날 문득 생각나 털이개로 먼지 털듯 목숨을 털면
목숨 한 장 붙어살던
몸의 진면목 비로소 나타날까.
권진규의 테라코타
흩어진 추억을 조립해본다.
대학병원서 조립 막 끝낸 인골이
배냇짓을 했다.
가랑비 속을
전람회에 선보일 테라코타를 태운 리어카를 끌고
권진규가 미아리 집을 떠나 대학병원 앞을 거쳐
전람회장으로 오고 있었다.
경복궁 뒤론 선명한 무지개.
리어카 짐들이 무지개 보려고 목을 빼고
두상 하나가 벙긋 솟았다.
눈을 밖으로 곧바로 뜨고 앞을 보며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얼굴,
인간 속에는 심지가 있는가
상처가 있는가?
두상이 더 오르려 하자 권진규가 얼른 목에 끈을 맸다.
권진규가 테라코타가 되었다.
속이 빈 테라코타가
인간의 속에 대해 속의 말을 한다.
인간에게 또 어떤 다른 속이 있었던가?
마크 로스코의 비밀 -K에게
마크 로스코의 비밀 하나를
오늘 거제 비치호텔 테라스에서 건졌다.
지난밤 늦게까지 불 켜 있던 고깃배 두 척
어디론가 가버리고
이른 봄밤 새기 전 어둡게 흔들리는 바다와
빛 막 비집고 들어오는 하늘 사이에
딱히 어떤 색깔이라 짚을 수 없는
깊고 환하고 죽음 같고 영문 모를 환생 같은
저 금,
지구가 자신의 첫 바다 쩍 추억을 발라 논,
첫 추억을 반죽해 허허로이 두텁게 발라 논
저 금,
점차 가늘어져 그냥 수평선이 될 뻔한
저 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