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문학과지성 시인선 309
허수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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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저녁국

 

대구를 덤벙덤벙 썰어 국을 끓이는 저녁이면 움파 조곤조곤 무 숭덩숭덩

붉은 고춧가루 마늘이 국에서 노닥거리는 저녁이면

 

어디 먼 데 가고 싶었다

먼 데가 어딘지 몰랐다

 

저녁 새 벚나무 가지에 쪼그리고 앉아

국 냄새 감나무 가지에 오그리고 앉아

 

그 먼 데, 대구국 끓는 저녁

마흔 살 넘은 계집아이 하나

저녁 무렵 도닥도닥 밥한다

 

그 흔한 영혼이라는 거 멀리도 길을 걸어 타박타박 나비도 달도 나무도 다 마다하고 걸어오는 이 저녁이 대구국 끓는 저녁인 셈인데

 

어디 또 먼 데 가고 싶었다

먼 데가 어딘지 몰랐다

 

저녁 새 없는 벚나무 가지에 눈님 들고

국 냄새 가신 감나무 가지에 어둠님 자물고

 

달 내음

 

밤하늘 언덕에 풀을 몰고 다니던 염소들

휘파람을 불며 연애편지를 쓰던 동네 오라버니들

평상을 펴고 누워 부채를 부치던 노친네들

멀리멀리까지 끓어 넘치던 호박 넣은 수제비 국물이 놓인 화덕

 

매일매일 우물로 걸레를 빨러 나오던 노망난 할망구

소를 우리는 냄새가 진득하던 마을 입구에 복숭아나 무가 자라고

장티푸스를 앓던 아이는 그 앞에 등을 내밀고 엎드려 있었다

멀리멀리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

 

철도로 난 풀을 밟고 기차가 사라질 때 그 독하던 풀 냄새

장티푸스를 앓던 귀로 코로 몰려오던 자지러지던 것들

귓병을 앓으며 매일매일 항생제를 귀에 넣고 다니던 술집 여자

뚱뚱한 중국 남자가 끓이던 우울한 우동

웃는 얼굴로 되를 속이던 짠된장 상투를 튼 싸전 영감

 

벼멸구를 잡아 불태우던 연기를 향해 침을 퉤퉤 뱉던 동사무소에 댕기던 안경잡이

집문서를 팔아 여당 지방사무소 소장을 하던 위인

농업실험실 과수원에서 자두에 접붙인 수박을 만든다던 폐병쟁이

막된장에 무친 날내 나는 나물

 

잘게 썬 풋고추를 넣고 조린 피라미

호박잎에 싼 은어 회

날게 생긴 오이에 약 든 쇠고기를 잘게 썰어 익힌 오이찜 짠 멸치젓을 넣어 만든 쓴물 나던 고들빼기 너덜너덜한 처녑을 끓여 참기름장에 곁들이던 겨울날 할아버지의 술상

 

자진자진 햇살에 말라가던 고구마 박, 꿈으로 생으로 들어오는

그러다 달이 휘영청 떴지요

아직 복숭아나무 아래 배를 깔고 아이가 달을 바라 보았지요

이승으로 돌아왔지요

돌아올 까닭, 딱히 있는 건 아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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