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의 미러링 - 혐오의 시대와 메갈리아 신드롬 바로보기
박가분 지음 / 바다출판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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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두 형태가 공격하는 논향점이 서로 어긋나 있는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인터넷의 모습은 이도저도 아닌 무언가, 그냥 하나의 현상으로만 존재하는 느낌이다. 그것에 더해 쌓여가는 학문들의 영역은 그 현상에 집중한다기보다는 하나의 메세지로 치부하고 시위나 실질적인 문화 비평에 포커스가 맞춰지는 반면, 그 집단에 반향적인 집단 혹은 학문들의 영역은 그 현상에 대해서만 유독 집중적인 비판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보면 서로 초점이 다른 대화 혹은 투쟁이 아닌가처럼 느껴진다. 그 두 집단의 미묘한 삐걱임 사이에 급진 성향의 인터넷 단체는 그저 존재하는 것일 뿐. 자신들의 정당화된 사연들과 함께. 그것은 무엇을 보느냐에 관해 비판 받을 수도 지지 받을 수도 있겠지만 정작 그 안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스스로가 느끼고 있지 않을까. 이 책은 충분히 정당하고 논리적으로 그 모순들을 짚어냈다. 어떻게 보면 반대 진영에서 가장 현실적인 처방을 내린 게 아닌가 싶다.


그저 존재론적으로 봤을 때 극우 성향 집합소처럼 그런 성향의 개인들이 모여 존재하는 것이고 사회의 의의적으로 보았을 땐 연구 가치가 서로 다른 상태인 것. 완벽한 주관이지만 또 다른 해석 속에는 정치적 프로파간다가 분열을 더욱 악화시키기 위해 집단을 진두지휘한다던지... 공상이라 믿고 싶다. 사실 상당히 모호하기에 뭐라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결론은 대충 간단하지 않을까. 그 문화를 차치하고서라도 그게 어떤 식으로 쌓아올려진 학문일지 모르겠지만 그 학문은 실질적인 주장을 하며 문화의 병폐를 지적한다. 그렇다면 악순환을 끊어내는 방법은 이론 상 간단해진다. 한 명이라도 더 잘못된 남성 문화, 일반화, 성고정관념의 굴레를 부수는 것이 해결 방안이 되지 않을까.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을 어느덧 알아가지만 그것의 고통을 외면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재미만을 위해서 저 문화를 포장하고 받침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그 사이에 놓인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비판적 견해들을 수용하면서 정립을 해나가야한다. 더 이상 순간의 쾌락으로 두고 볼 수는 없는 일. 분명한 지향점을 놓고 성숙한 토론을 진행하다보면 어느덧 그들은 자신만의 영역에 고립되게 되지 않을까. 낙관적인 미래를 그리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지젝의 사상을 공부해야겠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불확실한 주관을 서술한 것이기에 일부러 모호하게 글을 적었다.



이처럼 공익으로 포장된 마녀사냥이 더 심각한 문제인 이유는 그것이 대외적으로는 차별 반대, 혐오 반대를 내세우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차별과 혐오를 재생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 P93

이러한 문화적 성비 불균형까지 고려하면 결혼 연애 시장에서 성비 문제는 더욱 악화된다. 천관율 기자는 이들 ‘잉여 남성‘ 인구가 여성혐오의 진앙지라고 지목하고 있다. 일단 이들 "여성혐오 집단에서 사례가 수집되면 축적되고, 공유되고, 증폭되며, 결국 일반화된 혐오 서사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혐오는 자기 강화의 경로에 올라탄다. - P172

이처럼 우리는 언제부턴가 타인이나 낯선 상황과의 원치 않는 조우 자체를 개인을 무력화하고 질식시키는 심각한 폭력으로 체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제든 거기에 대해 분노를 표출할 준비가 되어 있다. 외국인 이민자에 대한 점증하는 혐오 정서와 SNS의 여성주의 담론도 이와 원리적으로 다르지 않다. - P201

그러한 정치적 관계 외에, 서로가 원치 않거나 예기치 못한 관계와 상황에 휘말리는 것에서 ‘완충 지대‘ 역할을 해온 것은 본래 ‘계약‘이 아니라 ‘문화‘였다. 예컨대 남녀 관계에서의 사교술과 에티켓, 문학 등의 예술 그리고 종교가 대표적이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외상적인 폭력을 승화시키는 방편이자 완충재였고, 프로이트가 ‘문명‘이라고 불렀던 것이기도 하다. 지금은 그러한 문화가 파산을 맞았고, 일상의 관게에서 그 빈약한 대체물에 불과한 인권 담론이 인터넷 상에 범람하고 있다. - P203

다시 단톡방 성폭력 사건으로 돌아가면, 단톡방에서 성희롱의 대상이 되었던 피해자의 구제를 넘어서서 이것을 인권의식의 개선이나 계몽주의적 캠페인으로 끌고 가려는 시도는 항상 실패한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오히려 인권 교육 끝에 타인의 인권은 소중하기 때문에 절대로 그와 같은 대화를 유출하지 말아야겠다는 냉소적인 결론으로 이어진다면 어찌할 것인가? ... 이처럼 또래문화의 결핍을 인권 담론으로 채울 수는 없다. 그보다 더 시급한 것은 남자 아이들이 섹드립이나 게임 이야기 외에도 또래집단과 놀고 향유할 수 있는 문화적 교류의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다. - P206

공감이라는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을 ‘절대화‘할수록 그 잣대에 들어맞지 않는 사람이라면 심지어 유가족이라고 해도 원색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 이러한 ‘공감의 정치적 도구화‘에서 비롯된 또 다른 문제는 이것이 다른 사건사고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방식의 ‘공감의 도구화‘현상을 연쇄적으로 낳는다는 점이다. ... 피해자에 대한 공감이 인터넷 판 성정치의 날 선 흉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이러한 조롱 조의 태도는 상호간의 부정적인 피드백의 악순환을 통해 자기 강화의 길로 진입한다. 이를 통해 다수의 성인 남녀가 아동기의 도덕으로 퇴행해버리는 것이다. - P227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피해자에 대한 공감이 아니라, (이제 더 이상 발언할 수 없는) 피해자에게 제멋대로 투사한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일 뿐이다. 공감의 절대화가 역으로 타자에 대한 공감의 마비로 이어지는 슬픈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P229

인간이 개, 돼지 처럼 행동하도록 만드는 환경을 내버려두면서 인권 규범 혹은 ‘차이‘와 ‘정체성‘ 그리고 ‘욕망‘의 권리를 내세우는 담론들은 기본적으로 위선에 불과하다. 사실 인터넷 혐오 발언 신드롬은 ‘인간성‘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차이‘ ‘정체성‘ ‘욕망‘을 무한정 긍정하는 포스트모던 철학이 낳은 괴물이기도 하다. 여기서 인간성을 철학적으로 되묻는다는 것은, 다시 말해 인간성을 확보할 수 있는 조건을 되묻는 것이지, 그것을 부정하는 형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 -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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