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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철학자 - 떠돌이 철학자의 삶에 관한 에피소드
에릭 호퍼 지음, 방대수 옮김 / 이다미디어 / 2014년 2월
평점 :
'맹신자들'로 유명한 사회학자 에릭 호퍼의 자서전.
그는 15세 때까지 실명 상태였다가 이후 눈을 뜨고 독서에 집착했다고 한다. 10대 후반 때부터 여러 일을 전전하다가 반생을 떠돌이 노동자로 생활.
27가지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마치 소설을 읽은 것 처럼 재미있었다. 챕터 끝날 때 '평등이란' 식의 짧은 문장이 나오는데 전부 캡처할 만큼 좋았다.
한국 나이로 35세 때 몽테뉴 수상록을 탐독. 자칭 타칭 몽테뉴 박사가 되어 주위 사람들이 몽테뉴는 이 사안에 대해서 뭐라고 말했데? 라는 식의 대화를 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몽테뉴 수상록은 최초의 에세이로 베게 옆에 두고 자기 전에 조금씩 읽으려고 했는데(무려 1330페이지) 현재는 박스에...
인상 깊은 구절
인간이 스스로 어떤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재능을 갖고 있지 못할 경우, 자유는 성가신 부담이 된다. 우리는 개인적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젊은 나치의 말 그대로 '자유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대중운동에 가담한다. 자신들이 저지른 극악한 행위에 대해 나치의 말단 병사들이 자신들은 죄가 없다고 주장한 것은 결코 거짓이 아니다. 명령에 따른 책임을 져야 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은 속았고 무죄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나치 운동에 가담하지 않았던가?
저축한 돈이 얼마간 있어서 나는 1년 동안 그 돈을 쓰면서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1년이라는 세월은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궁리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절대 권력은 선의의 목적으로 행사될 때에도 부패한다. 백성들의 목자를 자처하는 자비로운 군주는 그럼에도 백성들에게 양과 같은 복종을 요구한다.
음식을 삼키면서 나는 생이 길이라는 비전 -어디로 가는지, 그 위로 무엇이 가는지 모르는 채 굽이굽이 끝없이 이어지는 길- 이 다시 머리에 떠올랐다. 도시 노동자의 죽지 못해 사는 일상에 대해 내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대안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도시에서 도시로 이어지는 길로 나서야만 한다. 도시마다 낯설고 새로울 것이다. 도시마다 가지 도시가 최고라며 나에게 기회를 잡으라고 할 것이다. 나는 그 기회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을 것이며,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자살을 감행하지 않았지만, 그 일요일에 노동자는 죽고 방랑자가 태어났다.
우리는 주로 자신이 우위에 설 희망이 없는 문제에서 평등을 주장한다. 절실히 원하지만 가질 수 없음을 알고 있는 그것을 찾기 위해서는 자신이 절대적 평등을 내세우는 분야를 찾아야 한다. 그런 시험에서 공산주의자란 좌절한 자본주의 자라는 것이 드러난다.
우리는 자질구레한 경험들을 주고받았다.
약자 속에 내재하는 자기혐오는 일상적인 생존 경쟁에서 유발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에너지를 드러낸다. 약자들에게서 분출되는 강렬함은 말하자면 그들에게 특수한 적응력을 부여해주는 것이다. 약자의 감화력에서 퇴폐나 퇴행으로 이어지게 될 속성을 보았던 니체나 D.H. 로렌스와 같은 이들은 중요한 핵심을 놓치고 있다. 인간을 유례가 없는 종일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바로 그 약자들의 특이한 역할이다. 따라서 인간의 운명을 한 형태로 결정짓는 데 약자가 하는 지배적 역할을 자연적 본능과 원초적 충동의 도착 행위가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과 결별하고 자연을 능가하게 만드는 일탈의 출발점으로 -퇴행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 창조의 산출로- 보아야 할 것이다.
홀로 있을 때가 창조의 정점에 있는 것이라고 믿으며 나는 일생을 살아왔다. 그러나 실제로 나의 중요한 구상의 대부분은 내가 군중 속에 휩쓸려 있을 때 태어났다. 내가 처음 쓴 최고의 저서가 거의 완전한 고립 상태에서 나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 저서에서 고심하며 마무리한 구상들은 고립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언어는 질문을 하기 위해 창안되었다. 대답은 투덜대거나 제스터로 할 수 있지만 질문은 반드시 말로 해야 한다. 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첫 질문을 던졌던 때부터였다. 사회적 정체는 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질문을 할 충동이 없는 데에서 비롯된다.
이런저런 것만 있으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불행의 원인이 불완전하고 오염된 자아에 있다는 인식을 억누르는 것이 된다. 따라서 과도한 욕망은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느낌을 억누르는 수단이 된다.
우리는 40대의 인간은 새로운 시작이 불가능한 완성품이라는 터무니없는 가정을 배척해야 한다. 40대가 청소년보다 배우는 것이 쉽지 않다거나 쉽게 잊는다는 증거는 없다. 중년은 보다 감각이 예민하고, 인생의 소중함을 알고 있으며, 관찰과 행동에 있어 끈기가 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돈과 이윤의 추구는 사소하고 천박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상한 동기에 의해서만 활기를 띠게 된다면 사람들이 움직이고 분투하는 곳에서 영위되는 일상생활은 빈약하고 궁색해지기 십상이다.
난 생계비를 벌기 위해 하는 일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일이란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해요. 이 세상에는 모든 이들이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의미가 있는 일이라는 건 있을 수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