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스의 종말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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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서점 가판대에 [피로사회]라는 책이 놓여있었다. 은은한 보랏빛 표지와 제목을 보고 있으니 마치 [아프니까 청춘이다]부류의 자계서 또는 힐링서적일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그냥 지나쳤었다. 그러다 얼마 전 핑크빛 표지의 [에로스의 종말]이라는 신간이 눈에 띄었다. 궁금해서 봤더니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의 책이었다. 검색을 해보니 그는 독일 베를린 예술대학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였고 [피로사회]는 독일 사회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쓴 책이었는데 독일에서 이슈가 되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독일에 사는 한국인이 독일어로 독일사회를 비판한 책을 출판했는데 독일에서 이슈가 되어 다시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온 책. OEM. 매우 궁금해진 상태로 구입을 망설이다가 전자도서관을 찾아보니 있길래 메모해두고 읽으려는 중이었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의 시학]이라는 책 또한 마찬가지로 구입을 망설이다가 동네 도서관에 있길래 대여하러 갔다. 책 위치가 신간 목록 쪽이었는데 [에로스의 종말]이 떡하니 있더라. [에로스의 종말],[음악의 시학],[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뇌]를 잽싸게 안고 대여 완료. 아직 누구의 손에도 닿지 않은 새 책이라 책을 구입하는 것보다 기분이 좋았다.


페이지를 넘기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아서 당황스러웠다. 처음 보는 용어도 보이고 헤겔 등 아직 개념 모르는 철학자도 나오고 커스틴 더스크가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멜랑콜리아]도 우울과 나르시시즘에 맞춰 언급되었다. 이 영화 보긴 했는데 너무 재미없어서 막 넘겨 봤던 터라 책 읽을 때 더욱 아쉬웠다.


그럼에도 만족스러웠다. 조금 앞서간 생각은 아닌지 고민하게 만드는 부분들이 있었지만 그런 부분을 차치하고서라도 신자유주의, 타자와 나, 에로스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이 있어 좋았다. 100페이지 안되는 얇은 두께여서 이틀에 나눠 읽고 오늘 다시 한 번 더 발췌해서 읽었다. 두 번째 읽을때 훨씬 잘 읽혀서 한병철의 다른 책들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 맥락은 다 비슷하다고 하니 다음에 [피로사회]를 읽고 어떤 맥락인지 확실히 알아보고 싶다. 

큰 수확이다. 독서는 이래야 한다.

책 읽은 후 서문을 읽으니 오히려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서문을 알랭 바디우가 썼다는것도 신기했다.



인상 깊은 구절


캡처한 걸 보니 인상 깊은 구절이라고 보기에 긴 글이 너무 많아서 중간까지만 올린다.


최근 사랑의 종말을 고하는 목소리가 자주 들려온다. 오늘날 사랑은 무한한 선택의 자유와 다양한 옵션, 최적화의 강요 속에서 파괴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가능성이 끝없이 열려 있는 세계에서 사랑은 가능하지 않다고들 한다. 식어버린 열정에 대한 한탄도 들려온다. 에바 일루즈는 [사랑은 왜 아픈가'라는 저서에서 오늘날 정열이 식어버린 이유를 사랑의 합리화 과정과 선택 기술의 확산에 돌린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학적 사랑 이론들은 오늘날 사랑이 무한한 자유나 무제한의 가능성보다는 어떤 다른 변화로 인해 훨씬 더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사랑의 위기를 초래하는 것은 단순히 다른 타자의 공급이 넘치기 때문만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오늘날 모든 삶의 영역에서 타자의 침식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 이와 아울러 자아의 나르시시스트화 경향이 강화되어가고 있다는 점에 있다. 타자가 사라진다는 것은 사실 극적인 변화이지만, 치명적이게도 다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과정이 진행중이라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p17


우리는 오늘날 나르시시즘적 경향이 점점 강화되어가는 사회에 살고 있다. 리비도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주체성에 투입된다. 나르시시즘은 자기애가 아니다. 자기애를 지닌 주체는 자기 자신을 위해 타자를 배제하는 부정적 경계선을 긋는다. 반면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명확한 자신의 경계를 확정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나르시시즘적 주체와 타자 사이의 경계는 흐릿해진다. 그에게 세계는 그저 자기 자신의 그림자로 나타날 뿐이다. 그는 타자의 타자성을 인식하고 인정할 줄 모른다. -p19


성과사회는 금지 명령을 발하고 당위('해야 한다') 를 동원하는 규율사회와 반대로 전적으로 '할 수 있다'라는 조동사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 생산성이 어느 지점에 이르면 해야 함은 곧 한계를 드러낸다. 생산성의 향상을 위해서 해야 함은 할 수 있음으로 대체된다. 착취를 위해서는 동기 부여, 자발성, 자기 구도적 프로젝트를 부르짖는 것이 채찍이나 명령보다 더 효과적이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 명령하고 착취하는 타자에게 예속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 있지만, 결코 진정으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주체는 자기 자신을, 그것도 자발적으로, 착취하기 때문이다. -p29

-신자유주의 시대와 개인의 균형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될지 고민도 되었고 이러한 관점으로만 생각하게 되면 사회구조에 저항하는 상태가 될 수도 있어 꽤 피곤해질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병철 교수가 쓴 다른 책들의 맥락과 관련 있는 것 같던데 꼭 읽어봐야겠다.


할 수 있음의 절대화는 바로 타자를 파괴한다. 타자와의 성공적인 관계는 일종의 실패로 여겨진다. 타자는 오직 할 수 있을 수 없음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타자에 대한 에로스의 이러한 관계를 실패로 규정할 수 있을까? 다시 한번 답은 그렇다이다. 만약 우리가 흔히 에로스의 묘사에 사용되는 용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래서 에로스적인 것을 '붙잡다''가지다''알다'와 같은 말로 규정하려고 한다면 말이다. 에로스 속에 그런 것은 전혀 없다. 혹은 에로스는 그 모든 것의 실패다. 우리가 타자를 소유하고 붙잡고 알 수 있다면, 그는 더 이상 타자가 아닐 것이다. '가지다''알다''붙잡다'라는 모두 할 수 있음의 동의어다. 오늘날 사랑은 긍정화되고 그 결과 성과주의의 지배 아래 놓여 있는 성애로 변질된다. 섹시함은 증식되어야 하는 자본이다. 전시 가치를 지닌 신체는 상품과 다를 것이 없다. -p41

-위의 이야기가 이렇게 타자, 에로스와 이어진다.


모든 삶의 영역이 긍정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가운데 사랑도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과잉이나 광기에 빠지지 않은 채 즐길 수 있는 소비의 공식에 따라 길들여진다. 모든 부정성, 모든 부정의 감정은 회피된다. 고통과 열정은 안락한 감정과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흥분에 자리를 내준다. 속성 섹스의 시대, 즉흥적 섹스, 긴장 해소를 위한 섹스가 가능한 시대에는 성애 역시 모든 부정성을 상실한다. -p51


"사랑의 진정한 본질"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을 포기하고, 다른 자아 속에서 스스로를 잊어버린다는 점"에 있다. 헤겔의 노예는 의식이 제한되어 있다. 그의 의식은 절대적 결론을 맺을 능력이 없다. 그것은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을 포기하기 못하기 때문이다. -p57


절대적 결론으로서의 사랑은 죽음 속을 통과한다. 사랑하는 자는 타자 속에서 죽지만 이 죽음에 뒤이어 자기 자신으로의 귀환이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흔히 타자를 폭력적으로 붙들어 자기 소유로 삼는 것을 헤겔 사유의 중심 형상으로 이해하지만, 헤겔이 말하는 "타자로부터 자기 자신으로의 화해로운 귀환"은 그런 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것은 오히려 나 자신을 희생하고 포기한 뒤에 오는 타자의 선물이다. -p58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에로스의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초월적 조건으로 끌어올린다. "친구가 [.....] 사유를 실행하기 위한 조건이라면, 이때 '친구'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는 연인이란? 차라리 연인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친구 자신이 그동안 순수한 사유에서 배제되어 있다고 여겨져온 타자와의 생동하는 관계를 사유 속으로 다시 끌어들이지 않을까?" -마지막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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