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 회복하는 인간 Convalescence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 24
한강 지음, 전승희 옮김, K. E. 더핀 감수 / 도서출판 아시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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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대학교 1학년, 언니가 졸업반이던 무렵, 언니는 당신을 동행하여 소파수술을 했다.

당신의 언니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당부할 필요가 없었다.

당신이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고 그 비밀을 끝까지 짊어질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수 있을 만큼 온 힘을 다해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당신의 언니는 그날 이후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았다.

당신과 말을 섞으려 하지 않았고, 눈조차 제대로 맞추려 하지 않았다.

당신은 그 후 수년간 언니의 마음을 돌리려 노력했으나 그 어떤 노력도 부질없었다.

그렇게 둘은 남이 되었다.

 

 

당신은 부모님을 통해 언니의 소식을 들었다.

아이를 갖기 위해 십 년 가까이 공을 들였던 각고의 노력.

가족모임이 있을 때면 언니의 얼굴이 어두워진다는 것을 당신만이 알았지만

당신은 당신의 언니를 사랑하지 않으려 애썼다.

당신의 마음을 최대한 차갑게, 더 단단하게 얼리기 위해 애썼다.

언니는 불치병에 걸려 투병하다 일주일 전에 죽었다.

언니를 산에 묻고 엄마를 부축해 내려오던 길, 당신은 발을 삐고 만다.

한의원에서 깊숙히 뜸을 뜬 것이 화근이 된 질병은 치유가 되지 못할 정도로 악화되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바쁘게 지냈던 당신은 그제야 정형외과를 찾아 치료를 시작했다.

 

 

그리고 언니를 회상한다.

어긋나버린 언니와의 관계에 대해 괴로워한다. 

이렇게 된 것에 이유를 묻는 대신 언니를 떠올리며 당신을 돌아보기도 한다.

당신도 앞이 보이지 않았던 것은 마찬가지였다며 뒤늦은 변명도 한다.

언니를 잊기 위해 자전거를 타보지만 모든 것이 내 것 같던 바람의 감촉은 이제 느낄 수 없다. 

불가능해 보였던 피부의 점막은 재생되었고 이제 발목은 서서히 나아지겠지만

어쩐지 당신의 슬픔은 더욱 침잠해지는 것만 같다.

 

 

 

/

 

 

 

당신과 언니.

동성의 자매가 갖는 심리를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당신의 심연이 꼭 자매의 관계에 국한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안다.

크기는 조금씩 다를지라도 가족에 얽힌 아픔은 누구나 있다고 위로의 말을 해본다.

당신의 발목에 새 살이 돋 듯, 당신의 슬픔도 언젠가는 회복될 것이다.

아마도 어쩌면 회복되었다고 믿으면서 묵혀두는 것이겠지만.

여자라는 사람이 읽으면 더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은, 쓸쓸한 이야기.

되게 슬픈 소설인데 이상하게 마음이 단단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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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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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힘들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아, 모르긴 몰라도 단 한 명은 아마도 이런 책이 굉장히 불편할 것이다.

그로 인해 짓밣힌 수많은 영혼들의 넋은 어쩜 그리도 인정이 많은지, 여전히 그는 지독히도 건재하다.

아마 그가 생을 마감하면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더 자주, 더더 사실적으로 재조명될 것이다.

아직도 우리나라는 개인의 눈치를 보는 겉만 그럴 듯한 민주주의 국가니까.

 

문체가 아름답기 때문에 더 애잔히 느껴졌던 깊은 슬픔.

자세히 알지 못했던 아니 알고자 하지 않았던 나의 과오는 이 책을 만나고서야 진정으로 부끄러웠다.

진짜 무서운 것은 양심이 시켜서 앞으로 나섰던 항쟁이 아니라 그 뒤의 고문, 그리고 살아가야만 하는 남은 생이었다.

<소년이 온다>는 한강이 쓴 광주 이야기라면 읽는 쪽에서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겠다고 각오한 사람조차 휘청거리게 만든다.

5월 광주에 대한 소설이라면 이미 나올 만큼 나오지 않았느냐고, 또 이런 추천사란 거짓은 아닐지라도

대개 과장이 아니냐고 의심할 사람들에게, 나는 입술을 깨물면서 둘 다 아니라고 단호히 말할 것이다.

뒷표지에 새겨진 신형철 평론가의 글이 내 생각의 전부를 대변한다.

이미 많은 사람이 이 책의 진가를 확인했겠지만, 더 많은 사람이 읽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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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차미혜 사진 / 난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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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에 몰아서 읽어야지 했던 한강의 책들.

그 와중에 이 책 <흰>을 별색에게 선물 받았다(완전 감동 >_<).

계획에 차질은 생겼지만 모순되게도 몹시 흥분하여, 이 책을 먼저 읽어두기로 했다.

그대 덕분에 정말 진심 기쁘게 잘 읽었다오! 고마와 ;)

소설치고는 꽤 얉은 두께의 이 책을 처음 읽을 때는 글자에 반짝반짝한 물결이 일 듯 너무나 곱게 느껴졌다.

뭐라 꼭 칭할 수 없는, 그저 소녀적, 국어 시간에 배운 은유가 담뿍 들어 글자의 미학이 전해지더라는 말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아주 아주 옛날 신경숙의 소설을 처음 읽고 받았던 찌르르한 전율이 내 안에서 비슷하게 파동치는 느낌이었다.

두번째 읽을 때는 소설 속의 '나' 그리고 '그녀'가 작가로서의 한강을 대변하는 것 같아 설렜다.

나와 그녀에게서 소설가로서의 투지가 보인다는 건 글을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충분히 들뜰만한 일이니까.

특히나 한강이라는 사람은 아픈 편린을 세상에 드러내 그들에게 시선을 돌리게 만드는 작가이니 더욱 의미 깊다.​

그러니 몇 가지 일이 그녀에게 남아 있다;

거짓말을 그만둘 것.

(눈을 뜨고) 장막을 걷을 것.

기억할 모든 죽음과 넋들에게-자신의 것을 포함해-초를 밝힐 것.

이러한 글이 이 작가의 사명감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흰> 소설의 매개체는 세상의 모든 '흰'이다.

저자는 세상의 흰 것들을 통해

존재하는 것과 영원한 것을 이야기한다.

책을 읽다보면 유물과 관념, 나와 남을 넘어선 영혼의 순례가 보이는데

읽다보면 하나에서 열을 이르는 길에 둘셋넷, 의 숫자가 하나씩 더해지듯 자연스럽게 어울려짐을 느낄 수 있다.

나의 존재가 그녀이고 그녀를 닮은 흰 것과 흰 것이 아닌 것들로 이루어진 세상 속에서 나는 살고 있다는 것.

문장을 읽다보면,

한강이라는 작가가 타고난 재능으로 하루 아침에 일약 스타덤에 오른 것이 아닌

소설가로서의 자세와 소설을 풀어가는 방식을 오랜동안 공부하고 노력해 온 사람임이 전해진다.

(나 따위가 뭐라고 ​이런 평가를 감히 하겠냐마는)

 

 

소설 속의,

나는 어머니에게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다.

당시 스물세살이었던 어머니는 ​뱃속의 아기가 여덞달 되던 즈음 조산을 한다.

외딴 사택이었고 급작스런 산기였으나 어머니는 홀로 가위를 소독하고 무서움에 눈물을 떨구며 배내옷을 만들었다.

혼자 아기를 낳고 탯줄을 잘라 방금 만든 배내옷을 입히며 죽지마라 제발, 되풀이했으나

아기는 태어나고 두시간만에 죽었다. 그 아기가 그녀다.

나는 타지의 어느 흰 도시에 머물러 1945년 미군의 항공기가 촬영한 도시의 영상을 본다.

​유럽에서 유일하게 나치에 저항했던 이 도시는 히틀러에 의해 극단적으로 파괴되었다.

​모든 건물이 무너지고 부서졌다. 검게 불에 탄 흔적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 영상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오래전 성이 있었다는 공원에 다다른다.

그리고 깨닫는다. 이 도시에는 칠십 년 이상 된 것들은 존재하지 않음을, 복원된 모든 것은 가짜라는 것을.

그 날 처음으로 그녀를 생각한다.

이 도시와 같은 운명을 가진 사람. 한차례 죽었거나 파괴되었던 사람.

어떤 기둥, 어떤 늙은 석벽들의 아랫부분이 살아남아, 그 위에 덧쌓은 선명한 새것과 연결된 이상한 무늬를 가지게 된 사람.

그렇게 나는 그녀를 나로 부합시켰고

그녀와 비슷한 처지의 파멸된 이 세상을, 그녀의 눈으로 '희게' 바라보고자 한다.

당신의 눈으로 바라볼 때 나는 다르게 보았다.

당신의 몸으로 걸을 때 나는 다르게 걸었다.

나는 당신에게 깨끗한 걸 보여주고 싶었다.

잔혹함, 슬픔, 절망, 더러움, 고통보다 먼저, 당신에게만은 깨끗한 것을 먼저.

그러나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

종종 캄캄하고 깊은 거울 속에서 형상을 찾듯 당신의 눈을 들여다봤다.

그래. '흰 것'만을 보여주기에 현실은 많이 타락했다.

그녀에게 보내는 독백에 왠지, 그간 글로 저항해온 소설가로서의 고독이 보인다.

그러나 다행인건 그럼에도 굴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신념으로 끝을 맺는다는 것.

당신의 눈으로 흰 배춧속 가장 깊고 환한 ​곳, 가장 귀하게 숨겨진 어린 잎사귀를 볼 것이다.

낮에 뜬 반달의 서늘함을 볼 것이다.

언젠가 빙하를 볼 것이다.

각진 굴곡마다 푸르스름한 그늘이 진 거대한 얼음을,

생명이었던 적이 없어 더 신성한 생명처럼 느껴지는 그것을 올려다볼 것이다.

자작나무숲의 침묵 속에서 당신을 볼 것이다.

겨울 해가 드는 창의 정적 속에서 볼 것이다.

비스듬히 천장에 비춰진 광선을 따라 흔들리는, 빛나는 먼지 분말들 속에서 볼 것이다.

그 흰, 모든 흰 것들 속에서 당신이 마지막으로 내쉰 숨을 들이마실 것이다.​

2009년에 발표한 산문집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을 읽은 기억이 있다.

그때가 한 오년전쯤인데 지금 작가는 명실상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저명한 인물이 되었다.

나를 비롯한 이 나라는 한강의 진가를 먼저 알아주지 못했고 뒤늦게 난리치기 시작했다.

이토록 꽤 자주 무지한 이 도시에서, 작가는 <흰> 책 속 그녀의 눈으로, '흰' 것을 향해 한발한발 걸어온 것은 아닐지.

우리가 모르는 사이 깨지고 넘어져도 글로 다시 일어섰던 성실한 작가는 수상 소감으로도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담백함까지 갖췄다.

아마 이 시대의 수많은 작가가 그녀와 비슷한 행보이거나 더 고된 생을 살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문단에 발은 디뎠으나 어떤 이유에서건 빛을 발하지 못할수록 고립감은 더 클테지.

한강의 수상 뒤로 우리나라 문학계의 어둠을 질타하는 글을 꽤 많이 읽었다.

출판사 뿐 아니라 베스트셀러의 책을 우선시하는 내게도 책임은 있다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으니 왠지 더 깊이 반성하게 됐다.

​글로 먹고 사는 사람보다 인기가 있으면 쉽게 출판이 되고 또 그게 잘 팔리는 기이한 세상.

좁디 좁은 시장에서 고군분투하는 우리나라의 작가에게 지금의 한강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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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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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렸던 정유정 작가의 신작.

지금 막 마지막장을 덮고 난 소감은 악의 끝을 보았다는 느낌.

끔찍하고 잔인한 묘사로 따지자면 <28> <7년의 밤> 보다는 덜 충격적인데

이 책이 그간의 간접화법이 아닌 '나'로 서술되어 있어서인지 훨씬 더 섬뜩하게 느껴졌다.

소설은 여지없이 탄탄한 구성이다. 특히 스릴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심리 묘사가 매우 자연스럽다.

소설을 읽고 께름칙했던 것은 아무래도 주인공의 사이코패스 성향이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아서 일텐데,

아마 그래서 더욱더 공포감에 휩싸이지 않았나 싶다.

작가는 언제나처럼 '악'에 대해 썼다.

사실 <28>과 <7년의 밤>을 읽었을 때는 작가가 생소한 부류를 재미있게 쓴다는 점과

어떤 평론가의 말처럼 아마존을 누비는 여전사 같은 인물이 우리나라에도 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

또, 앞으로도 이러한 맥락의 글을 쓸 것인지에 대한 독자로서의 궁금증이 컸었는데

이 책의 마지막 에필로그를 읽고 아, 정말 한마디로 정유정 작가에게 뻑갔다.

너무 멋져서.

소설을 이야기 하는 것보다

작가의 글을 더 소개해주고 싶은 이 마음.

해서, 작가의 에필로그를 요약해본다.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에 따르면 악은 우리 유전자에 내재된 어두운 본성이다.

그리고 악인은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누구나'일 수 있다.

소설의 주인공, '유진'이 수정란의 형태로 내 안에 착상되었다.

'유진'은 여러 소설의 주인공으로 형상화되었으나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들이 늘 '그'였기 때문이다. 외부자의 눈으로 그려 보이는 데 한계가 있었던 탓이다.

결국 '나'여야 했다. 객체가 아닌 주체여야 했다.

우리의 본성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을 '어두운 숲'을 안으로부터 뒤집어 보여줄 수 있으려면.

세 번을 다시 썼다.

그리고 세번째로 다시 쓸 때에야 비로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인 '나'가 어린 시절부터 학습돼온 도덕과 교육, 윤리적 세계관을 깨버리지 못했다는 걸.

주인공인 '나'는 그런 것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맹수'인데.

더 나쁜 건, 그 틀이 깨지는 걸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작가는 자기 이름을 걸고 글을​ 쓰는 한 두려움과 타협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배웠으면서도.

이제 내가 왜 인간의 '악'에 관심을 갖는지에 대해 대답할 차례다.

평범한 비둘기라 믿는 우리의 본성 안에도 매의 '어두운 숲'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똑바로 응시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지 못한다면 우리 내면의 악, 타인의 악, 나아가 삶을 위협하는 포식자의 악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분신 유진이 미미하나마 어떤 역할을 해주리라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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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을 나온 암탉 (반양장) - 아동용 사계절 아동문고 40
황선미 지음, 김환영 그림 / 사계절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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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도 만들어진 이 책이

센세이션을 일으킬 때만 해도 관심은 전혀 없었는데

아이란 정말 여러 각도에서 새로운 문물을 접하게 하는 것 같다.

'새로운 책'이라는 문장에 재미를 붙인 딸을 위해 가끔 동화책을 구입하는데

그러다 보니 동화책에 대한 나의 시각에도 꽤 변화가 생겼다.

아이와 별개로 내가 궁금해 사서 읽기도 하고, 아이를 이해하기 위해 일부러 읽기도 한다.

그래도 어쨌든 화두는 아이라서 좋은 동화책을 만나도 별도의 리뷰는 안했는데

<마당을 나온 암탉>은 정말 재미있게 읽어서 몇 자 적고 싶어졌다.

읽으면서 <미운오리새끼>를 떠올린 건 나 뿐만이 아니겠지만

안데르센 버젼의 업업업 정도는 되는 감동을 받았다.

 

 

잎사귀가 떨어져 거름이 되고,

그래서 향기로운 꽃을 피워내는 것처럼,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고 싶어 잎싹이라는 이름을 지은 암탉.

잎싹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움직일 수 없는 닭장에서도 꿈을 잃지 않는 것.

마당의 텃새에도 나를 지키려는 자존감.

낯설고 두려운 바깥이지만 꺾이지 않는 의지.

그리고 끝까지 자식을 끌어안는 엄마로서의 희생.

쓰고 보면 굉장히 구태의연하지만 이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책이었다.

이 감정들이 아이에게 자연스럽게 와닿을 걸 생각하면 동화작가에 대한 존경이 절로 든다.

그들은 어떻게 동심을 유지하는 것일까. 부러워만진다.

마지막 부분에, 매일 잎싹과 새끼 청둥오리를 두려움에 떨게 한 족제비가

그 역시 새끼를 위해 포식자가 될 수 밖에 없음을 표현하고

잎싹이 기꺼이 먹이가 되어주겠다고 자처하는 것까지,

악역은 배제되고 모두가 사랑에서 비롯됨을

알게 해 준 것도 참 고마웠다.

마음이 정화된다.

이래서 어른도 동화를 읽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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