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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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렸던 정유정 작가의 신작.

지금 막 마지막장을 덮고 난 소감은 악의 끝을 보았다는 느낌.

끔찍하고 잔인한 묘사로 따지자면 <28> <7년의 밤> 보다는 덜 충격적인데

이 책이 그간의 간접화법이 아닌 '나'로 서술되어 있어서인지 훨씬 더 섬뜩하게 느껴졌다.

소설은 여지없이 탄탄한 구성이다. 특히 스릴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심리 묘사가 매우 자연스럽다.

소설을 읽고 께름칙했던 것은 아무래도 주인공의 사이코패스 성향이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아서 일텐데,

아마 그래서 더욱더 공포감에 휩싸이지 않았나 싶다.

작가는 언제나처럼 '악'에 대해 썼다.

사실 <28>과 <7년의 밤>을 읽었을 때는 작가가 생소한 부류를 재미있게 쓴다는 점과

어떤 평론가의 말처럼 아마존을 누비는 여전사 같은 인물이 우리나라에도 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

또, 앞으로도 이러한 맥락의 글을 쓸 것인지에 대한 독자로서의 궁금증이 컸었는데

이 책의 마지막 에필로그를 읽고 아, 정말 한마디로 정유정 작가에게 뻑갔다.

너무 멋져서.

소설을 이야기 하는 것보다

작가의 글을 더 소개해주고 싶은 이 마음.

해서, 작가의 에필로그를 요약해본다.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에 따르면 악은 우리 유전자에 내재된 어두운 본성이다.

그리고 악인은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누구나'일 수 있다.

소설의 주인공, '유진'이 수정란의 형태로 내 안에 착상되었다.

'유진'은 여러 소설의 주인공으로 형상화되었으나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들이 늘 '그'였기 때문이다. 외부자의 눈으로 그려 보이는 데 한계가 있었던 탓이다.

결국 '나'여야 했다. 객체가 아닌 주체여야 했다.

우리의 본성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을 '어두운 숲'을 안으로부터 뒤집어 보여줄 수 있으려면.

세 번을 다시 썼다.

그리고 세번째로 다시 쓸 때에야 비로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인 '나'가 어린 시절부터 학습돼온 도덕과 교육, 윤리적 세계관을 깨버리지 못했다는 걸.

주인공인 '나'는 그런 것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맹수'인데.

더 나쁜 건, 그 틀이 깨지는 걸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작가는 자기 이름을 걸고 글을​ 쓰는 한 두려움과 타협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배웠으면서도.

이제 내가 왜 인간의 '악'에 관심을 갖는지에 대해 대답할 차례다.

평범한 비둘기라 믿는 우리의 본성 안에도 매의 '어두운 숲'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똑바로 응시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지 못한다면 우리 내면의 악, 타인의 악, 나아가 삶을 위협하는 포식자의 악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분신 유진이 미미하나마 어떤 역할을 해주리라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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