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리가 시작되지 않고 있다.


2. 생리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특히 불규칙한 생리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이 현상과 관련된 경험을 알리고 싶다.


3. 생리는 한 달에 한 번 하지 않는다. 사람마다 다 다르다. 

나의 경우에는 특히나 생리 불순이 꽤 심한 편이어서, 나이를 먹으며 조금 안정되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한 달에 한 번은 아니다. 

그리고 주기가 꽤 정확한 여성이라 할지라도 ‘한 달에 한 번’이라고 세는 것은 사태를 축약하는 느낌이다. 규칙적인 생리란 약 28일마다 4~8일 정도 일어나는 현상이다.

말하자면 생리가 끝난 때로부터 20일만 있어도 다시 시작되는 경우가 정상 범주에 속한다는 것이다. 

즉 건강하고 규칙적인 생리를 하는 여성은 가임기의 약 28.6% 가량 생리대를 차고 있을 수 있다. 


4. 생리는 규칙적이라도 짜증나지만 불규칙적이면 더더욱 짜증난다. 

‘왜~ 좀 건너 뛰면 좋은 거 아니야~~’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살의가 솟는다. 

생리가 불규칙적이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불규칙적이라는 뜻이다. 

‘아 이번 달에는 안 하고 다음 달 14일에 하겠네~’ 하고 미리 아는 경우는 전혀 없다. 

이걸 못 당해본 사람은 별 거 아니라 생각하겠지만 나는 어쩌면 결혼식날 생리를 하게 될 수도 있고 손꼽아 기다리던 소풍날 생리를 하게 될 수도 있고 몰디브의 바다에 수영하러 가는 날에 생리를 하게 될 수도 있다. 

19살 때는 수능시험날 생리가 터질 수도 있다고 봄부터 겁을 먹었었다. 그걸 예방하려면 주기적으로 피임약을 먹어야 한다. 19살인데. 

차라리 날짜를 받아놓은 큰 시험들은 방비책이라도 있다지만 할아버지 장례식에 그러고 있을 수도 있다는 건 어떻게 방비한담? 

몇 시간이나 이어지는 회의 동안 화장실 한 번을 못가고 같은 자세로 앉아 끝없이 뭔가를 받아 적다가, 문득 밀려오는 고통과 쎄한 느낌 때문에 정신이 아찔해졌었다. 그런 느낌이 있다고 해도, 아닌 적이 있었으니까, 아닐 거라고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끝없이 되뇌는 것 말고 대처할 수 있는 기제가 전혀 없는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할머니네 집에 내려가서, 온 가족이 한 이불을 덮고 자던 오밤중에 일이 터졌을 때 나는 16살이었다. 한번만 겪어도 마음에 상처를 입힐 사건들을, 나는 이미 여러 번 겪었고, 어쩌면 또 여러 번 더 겪어야 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불규칙하니까.  


중요한 이벤트의 어느 순간순간마다 예상 못한 피칠갑과 도무지 허리를 펼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릴 수 있다는 사실은 사람을 평생 동안 위축시킨다. 그 어느 곳을 갈 때도 늘 가방 속에, 주머니 속에 생리대 1, 2개씩은 가지고 다녀야 하는 불편함은 덤이다. 급히 생리대를 꺼내려고 지퍼를 열었을 때 텅 빈 가방을 마주하면 느끼게 되는 당혹감도 덤.


5. 생리를 하거나 하지 않는 문제가 얼마나 잦게 여성의 건강을 위협하는지 생리를 안 해도 되는 사람들은 모른다. 예를 들어, 매일 소량의 생리혈만 나오다가 어느 달 펑펑 쏟아지면 깜짝 놀라게 된다. 또는, 늘 4일 정도만 생리기간이었던 사람이 8일간 생리를 하게 되면 가슴이 철렁하다. 한 번도 배란혈이 나오지 않았던 사람이 그것을 겪으면 이게 혹시 생리인가, 그렇다면 큰일인데, 2주 만에 하다니, 생리가 아니라 부정출혈인가, 무슨 병이라도 걸린 건가 잔뜩 긴장하게 된다. 두어번은 컨디션 탓이겠지 하는 생각으로 넘길 수 있지만 그런 일이 수회 반복되면 심각하게 병원에 방문할 것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그 방문에는 필연적으로 불안한 설명, 불쾌한 검사와 처치에 대한 스트레스가 수반된다.

이상현상을 동반하지 않는 생리라도 건강에 해가 되긴 마찬가지다. 주기가 돌아올 때마다 피부가 뒤집어지거나 소화불량에 시달리거나 생리통을 겪는 것은 익숙한 일이므로 차라리 낫다. 그러나 약한 피부가 일회용 생리대에 쓸려 짓무르고, 민감한 기관이 습기 차 있고 통풍 안 되는 환경에 지속적으로 노출됨으로써 걸리게 되는 질염은 또 다른 문제다. 개인의 노력으로 어떻게 예방하기 어려운 질병이 나를 주기적으로 괴롭힌다. 그리고 그 문제가 터질 때마다 나는 꼭 병원에 가야 한다. 그냥도 모자란 휴식시간을 쪼개고, 불편한 몸을 며칠이나 참다가, 불편한 의자에 앉아 불편한 진료를 받기 위해 그토록 자주. 


6. 며칠 전 평소의 1.1배정도 되는 생리통에 시달렸다. 데이트 도중이었다. 나는 보통 생리 첫날에 생리통을 겪는다. 생리가 시작되기 하루이틀 전에 겪는 사람도 있고, 생리 내내 생리통을 달고 다니는 사람도 있지만 하여튼 나는 그렇다. 대충 이제쯤 할 수도 있다는 예상은 했었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았다. 얼른 생리대 하나를 챙겨들고 화장실에 갔는데, 시작하지 않고 있어서 조금 놀랐다. 이렇게 생리통이 심한데 왜 여태 소식이 없나 살짝 궁금했지만 어차피 한 두 시간 안에 벌어질 일이라 생각하고 생리대를 착용한 채 데이트를 계속 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난 지금, 생리는 여전히 시작되지 않고 있다. 심했던 생리통이 환상이었다는 것 마냥. 글쎄, 어쩌면 지금이라도 당장, 내일이나 모레라도 시작할지 모른다. 나는 그것을 방비하기 위해 내일 떠나는 연수에 잔뜩 생리대를 챙겨가야 한다. 어쩌면 연수를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생리가 시작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면 나는 이고 지고 갔던 생리대를 그대로 집에 가지고 와야 할 것이다. 생리통까지 잔뜩 앓게 해놓고 시작되지 않는 생리에 대해서 또다시 불안해하고,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면서 말이다. 다음 주에 건강검진이 예약되어 있다. 수 주 전에 정한 날짜다. 그러나 당장 생리가 시작되지 않는다면 그 날까지 생리가 끝나지 않는다. 나는 보통 8일 정도 생리중인 상태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생리 중에는 건강검진 항목 중 몇 가지가 제약된다. 나는 건강검진을 미뤄야 할 것이다. 이미 써둔 청원휴가를 취소해야 한다. 건강검진 다른 날 받으려고요, 팀장에게 보고해야 한다. 다른 날에 청원휴가를 다시 써야 한다. 그런데 그 미룬 날에도 생리를 하게 될 수도 있다. 그건 내가 모르는 일이다. 생리가 1회 불규칙한 경우에 이 정도의 스트레스가 발생한다. 이 일이 매달 발생한다면 어떤 기분일지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7. 생리를 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은 생리에 대해 잘 모른다. 성교육을 받고, 여자 형제와 자라고, 몇 번의 연애를 하면서 대강은 알 수도 있다. 그 불쾌함이나 고통 같은 직접적인 현상에 대해서는 또 몇 마디 말을 들어 학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리를 한다는 자체로 나를 옥죄는 일상적 제약과 강렬한 스트레스, 투자해야하는 시간과 정신력에 대해서는 알기도 어렵고, 이해도 못하겠지...


8. 억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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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식단 일기를 쓰고 있다. 원래의 목적은 다른 것이었지만 쓰다 보니 이 행위가 의외로 몹시 훌륭한 기록 수단이라는 것을 알았다. 일기를 쓰면 뭐가 좋고 뭐가 좋고 하는데 솔직히 종이에 직접 글을 쓰는 것은 수정이 어려워서 정제된 결과물이 나오지도 않고 생각을 문장으로 옮기는 순간 내가 느꼈던 감정이 왜곡되기 때문에 피곤하기만 하고 별로 얻을 것도 없다 생각했다. 


어차피 아무리 인간의 언어가 발달한다 하더라도 개개인이 시시각각 마주치는 사건과 느낌을 있는 그대로 묘사할 수 있는 어휘란 없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감정과 가장 유사한 형태의 단어를 찾아서 이용하고 있을 뿐이고, 우리의 대화는 모두 근사치라는 소리다. 

그런데 이 식단 일기라는 것은, 키워드 몇 개만 적으면 되기 때문에 시간도 얼마 안 들고, 그러니까 귀찮지 않아서 빠트리지 않게 되고, 객관적이고 건조한 사실의 나열이어서 내가 그 순간 고른 어휘에 오염될 일도 없고, 아침 점심 저녁만 적는 게 아니라 간식도 다 적으니까 꽤 촘촘하게 하루를 기록할 수 있어서 좋다. 


무엇보다, 우습게도 인간은 그날 무엇을 먹었는지 알면 그날의 다른 일과도 다 기억이 난다는 점이 신기하다. 나는 이제 2017년 1월 22일 오후 7시쯤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구구절절 적힌 기록이 없어도 그렇다. 그날 입은 옷도, 그날 날씨도 선명히 떠오른다. 어떤 말을 했으며, 그 말을 하기까지 어떤 사고과정을 거쳤는지도 생각난다. 

‘순두부찌개’하고 적힌 글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재생 버튼을 누른 것처럼 머릿속에 필름이 돌아가고, 당시의 나와 동기화가 되는 것이다. ‘어쩐지 울적했다’라고 써있었다면 나는 그 울적함에 대해 상상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순두부찌개’라는 단어는 나를 짐작과 어설픈 이해의 영역으로 이끌지 않는다. 

만약 그런 식으로 세세한 기억과 공감이 가능할 만큼 모든 생각을 문장으로 기록하려고 했다면 하루 종일 일기만 써야 했을 것이지만, 식단 일기는 인간의 기억력과 단어 몇 개만을 활용하여 놀라운 효율성으로 이 같은 일을 가능하게 만든다. 우와!


또 가끔씩 식단 일기를 이틀쯤 밀려 쓰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나는 각 하루가 내 삶에 어느 정도의 임팩트를 가지고 있는지도 간접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틀이나 지난 저녁 식사라도, 그날이 충분히 가치 있었다면 아주 쉽게 생각이 난다. 

그러나 하루쯤 지난 식사라 해도 그 날의 인상 자체가 희미하면 그 식사는 생각해내기 어렵다. 

사실 식단 일기를 쓰면서 딱 한 번 그런 일이 있었는데, 책상에 앉아 한 5분쯤 아무리 애를 써도 정말 그 하루가 깜깜했다. 

그렇다면 나는 그 날을 살지 않았던 것이나 다름없지 않나, 그 하루가 내 인생의 어떤 부분에 어떤 식으로도 기여하지 못했다면 말이다. 


식단일기 좋다,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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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갔다가 귀가했더니 집에 아무도 없었다. 빈집에서 혼자 잘 놀고 있었는데 얼마 안 있다가 아빠가 허둥허둥 들어왔다. 아직도 해가 쨍쨍한 한낮이었고 아빠는 몹시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빠, 아빠 왜 이렇게 일찍 퇴근했어? 왜 짐 챙겨? 하고 졸졸 쫓아다니면서 질문을 했는데 응, 응, 아니야, 하고 의미 없는 대답만 늘어놓으며 한동안 안방과 거실을 바쁘게 오가던 아빠는 한 10여분 만에 한 짐 챙겨가지고 집을 나섰다. 현관 앞에서 갑자기 생각난 것 처럼 내 쪽을 돌아보고, 엄마는 동생 낳으러 갔어, 곧 할머니가 올 테니까 잠깐 혼자 있어. 하고 말했다. 나는 원래 혼자 잘 있는 어린이여서 별로 당황은 안 했고, 동생이 태어난다는 것에 살짝 흥분을 느꼈다. 좀 신이 나서, 아빠가 나가고, 엘리베이터가 떠나는 소리까지 다 들은 다음에 “나도 이제 동생 있다!!”하고 괴성을 몇 번 질렀다. 당시 우리 옆집에는 노부부가 단 둘이 살고 있었는데 내가 그렇게 소리를 질러댔기 때문에 동생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추후 전해왔다. 어쨌든 약간의 흥분 증세로 거실을 왔다갔다왔다갔다왔다갔다 거리고 있자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아빠가 다시 데리러 왔고, 차를 타고 동생을 만나러 갔다. 그 병원에서의 일은 단 한 장면만 선명히 기억이 난다. 엄마가 병실 침대에 혼자 앉아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7월 중순이었다. 조용하고 더웠다. 내가 엄마, 하고 부르자 이내 돌아보고 미소를 지었는데 나는 그 장면이 이상하게 잊혀지지 않는다. 그 때까지 나는 두려움을 모르고 살았으나 그 순간 아주 실존적인 공포가 굉장한 속도로 엄마와 내 사이를 가로질러 왔다. 흰 환자복과 벽들 사이에서 엄마는 보호색을 띤 것처럼 새하앴다. 그렇게까지 핏기가 없는 인간을 나는 처음 보았다. 사람이 극도로 하얗게 되면 무기물처럼 보인다. 석고나 대리석 같은 느낌이다. 나는 병실 입구에서 주춤거렸다. 내가 걸으면 바닥이 떨리고, 그러면 그 충격으로 엄마가 죽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엄마가 팔을 벌렸기 때문에 곧 천천히 다가가 엄마를 만져 보았는데 만진다기 보다는 그냥 사람인가 아닌가 혹은 죽었나 살았나 확인해보는 수준이었다. 3일 후에 엄마는 퇴원을 했고, 애기를 작은 바구니 같은 데 넣어가지고 데려왔다. 그때 애기는 아주 쪼그맣고 부드럽고 조용했다. 동생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많이 우는 편이 아니다. 그 조그맣고 보드랍고 토실토실하고 정수리에 난 머리카락이 아주 얇고 간지러웠고 침을 많이 흘렸고 온몸에서 분유 냄새가 났고 하늘색 작은 이불을 썼고 엄마 머리카락을 꼭 붙들고 잤고 엄청 빠른 속도로 기어 다니다가 곧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고 낯을 잘 가렸어도 나한테는 곧잘 와서 안겼고 네잎 클로버를 찾아냈었고 풀밭에 쪼그려 앉기를 좋아했고 귀를 파주면 아주 겁에 질려서 꼼짝도 않고 누워있었고 찰리와 초콜릿 공장 얘기를 듣고 싶어 했고 문 뒤에 숨어서 울고 했던 애기는 지금 185cm의 거구가 되었으며 맨날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 게임을 하다가 밤 아홉시쯤 되면 나가 놀고 새벽 세시에 들어온다. 어젯밤에 걔 씻는 소리 때문에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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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철 2017-02-19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드치즈 님: 35세
동생: 24세

누드치즈 2017-02-19 19:57   좋아요 0 | URL
아 대댓 달기 어렵다... ㅠ.... 완전히는 아니지만 대체로는 땡입니다! 왜 이런 걸 짐작하고 계신지는 모르겠으나.. ㅋㅋㅋ

뷰리풀말미잘 2017-02-19 20:55   좋아요 0 | URL
한수철 님 : 42세
 













 

화장을 잘 하지 않는 편이다. 다만 입술 색이 옅어서 생기 없어 보일 때가 많으므로 어지간하면 립스틱은 바른다. 꼭 발라야겠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귀찮으면 몇 시간씩 생입술로 다니는 일도 많다. 하여 귀찮지 않기 위해서 집과 가방과 사무실에 모두 립스틱을 구비해놓았다. 반드시 손닿는 곳에 있어야만 바르기 때문에...

 

그런데 요즘 가방용 립스틱만 빼고 한꺼번에 똑 떨어져버렸다. 그래서 하나 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색조 화장을 잘 하지 않으니까 선호 브랜드도 없고, 화장품의 품질이 가격에 비례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에 그간 로드샵 립스틱을 주로 사용해왔다. 그런데 그 날 따라, 도저히 그 어떤 합리적인 이유도 찾을 수 없는 강력하고도 급박한 충동이 들었다. 비싼 립스틱을 사야 한다..! 너무나 강렬한 충동이라 거의 강박에 가까웠을 지경이었다. 나는 때마침 옆에 우두커니 서있던 백화점으로 향했고, 내가 지금껏 단 한 번도, 그 어떤 종류의 제품도 구매해본 적이 없는 브랜드를 골라 직진했다. 그리하여 선택된 곳은 바비 브라운이었다.

 

직원은 몹시 친절하게 나를 맞이해주었다. 무얼 찾으시나요? 립스틱이요. 색상은요? 모르겠어요. 촉촉한 타입 찾으세요? .. 별로 상관 없는데요........ 참으로 충동구매스러운 발언을 하고 있는 내게 그녀는 당황한 기색도 없이 3개 정도의 색을 보여주었다. 나는 그 중 두 개를 골라 입술에 발라달라고 했고, 그녀는 화장솜에 향기나는 리무버를 묻혀서 뭐 별로 올라가있지도 않은 내 입술을 정성스레 닦고서 깨끗한 브러쉬로 꼼꼼히, 정말 꼼꼼히 립스틱을 발라주었다. 립 리무버를 먹어도 되는가 하는 궁금증이 일었지만 삼키지 않고 참았다. 그녀의 얼굴이 가까웠다. 참 묘한 자세였다. 립스틱을 발라주려면 이렇게 얼굴을 가까이 하고 있어야 하는구나.. 마음만 먹으면 이 여자의 입술을 훔칠 수도 있겠어.. 같은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아무튼, 평소에 나는 립스틱을 바르는 데 한 3초 내지 5초 정도 걸리지만 그녀는 1분이 넘어가도록 정성스레 색을 칠해주었고,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나는 두 색조에 대해 그 어떤 객관적인 평가도 내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백화점 안의 조명이 너무 주황색이었고, 안경은 일 할 때만 쓰기 때문에 거의 앞이 안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자의 육감으로 둘 중 분명히 더 매력적으로 보였던 하나를 골라가지고 쿨하게 집에 왔다. 3.8그램 짜린데, 39천원이었다. 38천원일 수도 있다. 기억이 잘 안 나니까 계산의 편의를 위해 38천원인 걸로 하자. 그러면 이건 1그램에 만원짜리 립스틱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무게의 금값에 비하면 25%도 안 된다. 염가로구나.

 

그런데 놀라운 것은, 12000원짜리 1+1 로드샵 립스틱을 샀을 때보다 훨씬 즐거웠다는 점이다. 나는 정말 즐거웠다. 3.8그램짜리 스틱 한 개를 가방에 넣고서 지하철을 타고 내내 서있었는데, 3.8그램만큼 발이 더 피곤했어야 정상이지만 오히려 몸이 가벼워 날아갈 것 같았다. 보통은 출근 과정을 싫어하지만 빨리 내일 아침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얼른 일어나서, 얼른 화장을 하고 싶어! 노란 조명 때문에 그 색깔조차 명확히 파악할 수 없었던 나의 립스틱은 그처럼 무조건적인 만족감을 나에게 선사해 주었으며, 놀랍게도 일주일 더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자꾸만 립스틱 생각에 즐겁다.

 

나는 이 기이한 만족감의 정체가 궁금했다.

 

평소 명품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데, 왜 이것이 이토록 오랫동안 나를 즐겁게 한단 말인가? 만원 썼으면 만천원정도 즐거운 것이 나의 평범한 소비생활인데, 38천원을 쓰고 380만원만큼 즐거우냔 말이다.

 

 

 

립스틱 효과.

 

경제적 불황기에 나타나는 특이한 소비패턴으로, 소비자 만족도가 높으면서도 가격이 저렴한 사치품의 판매량이 증가하는 현상. 지갑이 얇아진 소비자에게 비용 부담이 적은 사치품 소비는 자기 형편에 맞춘 작은 사치로서 불황기를 극복하는 합리적 소비패턴인 셈이다-라고 네이버에 쳤더니 나왔다. 내가 지금 립스틱 효과에 걸려들었나? 립스틱 1그램에 1만원을 준 것이 아니라, 바비 브라운이라는 브랜드 네임을 38천원에 구매하고서 사은품으로 립스틱까지 받았기 때문에 즐거운 것인가?

 

 

나는 립스틱 효과를 검정해보기로 했다.

 

나의 귀무가설은 이렇다.

 

GDP과 립스틱 매출액 간에 그 어떤 상관관계도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립스틱 매출액과 GDP 자체는 일차적으로 살펴보면 꽤 연관이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계절변동, 추세변동, 불규칙변동을 제외하고 순수한 순환변동만 뽑아보면 별 상관이 없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2004년의 자료부터 이용 가능했기 때문에 관찰치가 부족하기는 하지만 나의 결론은 그러하다. 즉 귀무가설을 기각할 수가 없고, 결국 립스틱 효과는 없는 것 같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그렇다.


(자세한 분석 결과를 아래 첨부한다. 안 읽는 편이 좋다.)

 

접힌 부분 펼치기 ▼

 

0. GDP는 통계청에서립스틱 매출액은 한국보건산업진흥원에서 자료를 얻었으며립스틱 매출액은 립글로즈립밤립라이너와 립스틱을 포함한 매출액이다해당 통계가 2004년부터 나왔다.


1. GDP와 립스틱 매출액(hap으로 표시간의 관계


산점도를 그려보면 위와 같이 두 변수 간에 양의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GDP를 종속변수로립스틱 매출액(HAP)을 결정변수로 두면 위의 결과가 도출된다. F값도 높고 R제곱 값도 높고 P값은 낮고 좋다. HAP이 GDP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가설을 기각할 수 있다. (조금 낮아보이는 DW 통계량은 무시하기로 한다그렇게까지 엄밀하게 분석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AR(1)항을 넣었을 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별로 유의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밝혀둔다)

  

위 두 변수는 계절조정까지만 된 것으로 불규칙변동과 추세변동을 포함하고 있다공통적인 추세를 가지고 있으리란 사실을 감안하면 위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하여 순환변동치만 뽑아서 다시 검정해보기로 한다.


 

2. GDP 순환변동치과 립스틱 매출액 순환변동치간의 관계


2.1) 순환변동치는 각각 HP 필터를 적용하여 뽑아냈으며 람다값은 연간 자료에 공히 추천되는대로 6.25를 사용했다.


2.2) 내용

 


 산점도를 보면 딱 봐도... 별 관계가 없다.


 

 


전혀 뭐라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과가 나왔다.


 

 

그레인저 검정 결과는 위와 같다두 변수가 서로에게 그레인저 인과관계가 없다는 가설을 기각할 수 없다 (둘이서 서로 그레인저 인과관계가 없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확률이 높다)

 

결국 순환변동치만 놓고 보면 참 둘 간에.. 아무런 연관관계도 없어보인다..

 

무슨 상관이라도 있을까 싶어서 로그로그차분 등등 다양한 방법을 시도해보았고 여기에 밝히기까지 할 만큼 흥미로운 결과는 없었다위 두 가지를 명기하는 것은 내가 뭐라도 해봤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지 위 결과가 무슨 엄밀한 정확도라도 있으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사실 GDP는 단위근도 있을 것 같고 엉망진창이다이런 식으로 분석했다가는 보통 큰일이 난다.


 

 

펼친 부분 접기 ▲


 

다만 내가 구할 수 있는 자료는 립스틱 제품군 전체의 판매액이었기 때문에 소위 명품으로 분류되는 브랜드의 판매액만을 가지고 분석을 해보면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립스틱 효과의 방점은 가난한데 립스틱을 갖고 싶었다는 게 아니라 가난한데 명품을 갖고 싶었다는 것에 찍히니까. 이렇게 써 놓고 보니 진정 자료를 구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화장품 회사를 다녀야만 가능한 일일 것 같다....

 

그럼 왜 나는 이 립스틱 하나를 사고 이토록 즐거울까?

립스틱 효과를 부정한다면, 다음의 이유가 가장 강력히 나의 마음에 와 닿는다. 나는 아마도 나의 구매력에 즐거웠던 것 같다. 나는 내가 돈을 번다는 게 좋다. 12000원이 아니라 38000원 짜리 립스틱을 써도 나는 괜찮다. 그 느낌이 즐거웠다. 소비능력이 곧 생존능력이 되는 사회에서 나는 지금 꽤 안정적으로 생존해나갈 수 있다립스틱을 사면서 그것을 확인했고, 립스틱이 눈앞에 보일 때마다, 입술 위에 이물감을 느낄 때마다 다시 상기할 수 있는 것이다. , 역시 인생의 기쁨이란 얼마나 수월하게 생존할 수 있느냐에 있는 것인가..

 

최근 워킹데드를 보고 있다. 좀비가 창궐하는 시대가 도래한다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 굉장히 자주 고민한다. 계산기를 아무리 두드려도 한 분기 이상 건강한 신체를 유지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38천원을 주고 립스틱을 살 수 있는 지금 이 시대에서라면 꽤 생존 가능성이 높다. 나는 드라마에 상당히 몰입하는 편이니까... 아마 생존에 불안감을 느끼다가 립스틱을 통해 안도한 것 같다....라는 가설을 새로이 새워본다. 좀비물이 이렇게 정서에 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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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이트 클럽


파이트 클럽의 주인공 ‘그’는 만들어진 욕구를 가진 자다. 사회에서 주입된 그것, ‘너는 마땅히 이것을 욕망해야한다’라고 강요받은 것들을 집에 차곡차곡 쌓아놓고 산다. 그리고 테일러 더든을 만나면서 파괴를 배운다. 둘은 파이트 클럽을 결성하고, 폭력을 휘두르고, 죽음을 가까이서 느끼고, 규칙을 무너트린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파괴를 파괴한다. 


‘그’는 한껏 공들인 무기력함으로 그의 집을 한 땀 한 땀 채웠다. 재료는 이케아 가구. 그리고 이 집이 통째로 폭발하면서 영화는 본격적인 시작을 맞는다.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성찰하라, 당신은 지금 세뇌 당했다. 영화의 첫 장면, 스쳐지나가는 시뻘건 경고 화면에서 테일러 더든이 전하는 말이다.


자본주의 시대의 소비문화란 인간의 모든 발전과 후퇴가 켜켜이 얽혀있는 복잡한 덩어리다. ‘그’는 이것을 쳐부수고 더 본질적인 욕망으로 다가선다는 의미로서 파이트 클럽을 통해 폭력을 즐기는 것이다. 


나에게 이것은 용기에 대한 영화다. 



2. 포스트 파이트 클럽


나는 파괴에서 출발하여 안정에 도착한 남자를 알고 있다. 


그는 주로 싸우는 꿈을 꾼다. 재미있는 꿈을 꿨어! 하고 신이 나 말할 때면 보통 1 대 17의 호화찬란한 추격전이다. 그가 아직 잃지 못한 과거의 색채다.


그는 나와 아주 다른 종류의 사람이다. 지금 그와 내가 이렇게 잘 지낸다는 것은 생각해보면 수수께끼 같은 일이다. 가끔 그가 지나는 말로 과거사를 하나씩 까발릴 때마다 나는 놀란다. 그의 소년시절을 감싼 까끌까끌함이 모래알 같다. 


내 주위의 남자들이란 하나같이 하얀 살을 가졌다. 볕을 본 적이 없는 깨끗하고 보드라운 피부는 내게 동질감이 된다. 가끔 울룩불룩 근육을 자랑하는 자들이 있기는 해도 그것 역시 실내 농구장에서, 헬스클럽에서 다육 식물 돌보듯 가꿔낸 것이다. 생활의 잔근육, 생존을 위하여 검게 그을린 살을 실제로 본 적이 나는 잘 없다. 내가 가진 터프가이에 대한 로망은 희소한 것에 대한 판타지로 잘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비로소 그를 만나고, 사랑하고. 아마 그렇게 된 셈이다.


그는 복싱을 좋아한다. 그는 그것이 얼마나 효용 있는 스포츠인가를 말하지만 나는 그가 그 때문에 복싱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만히 지켜본 결과 그에게 복싱은 그냥 틀이다. 그에게는 뿌리 깊은 폭력성이 있고 어려서는 그것이 날뛰기도 했었을 것이다. 날카롭고 새파란 폭력성은 그 주인도 찌른다. 복싱이란 정제된 스포츠가 그것의 목줄기를 눌러주었을 때 그는 안도했을 것이다. 강해진 느낌을 받았을 것이나 강함은 원래부터 있던 것이고 다만 그것이 역류하지 않도록 하는 법을 익혔을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와 카페에서 생각 없이 놀다가 차에 탔을 때는 아마도 밤 열 시 쯤이었다. 오늘 같은 날씨였다. 가만히 가을이 오고 있었고 노상에 편 간이 의자 위에 취한 남자들이 흔들거렸다. 그의 차 앞으로 웬 승합차 한 대가 비뚤게 서 있었다. 도저히 차를 뺄 수 없어서 그는 승합차의 운전석 쪽을 가만 살펴보았다. 그러고 있으려니 술에 쩔은 아저씨 하나가 대단한 속도로 갈 지 자를 그리며 “거기 뭐요!” 하고 소리를 질렀다. “차 좀 빼 주세요.” 하고 답하고 도로 차에 올라타는 과정은 여상했으나 그 뒤는 이상했다. 술 취한 이는 시끌시끌 다가와 이미 닫힌 운전석 쪽 문을 여러 차례 흔들었고, 그 기세에 차가 기우뚱 거렸다. 그가 창문을 내리자 취객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지금 뭐라고 했어? 어? 뭐라고 했어?!”


나는 놀랐다. 남자가 그렇게 소리치는 광경을 그런 거리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무서워서 심장이 쿵쾅거렸고, 손가락에서 피가 물러나와 차가워지는 것이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차 좀 빼달라고요.”


평범한 사내가 답했다. 아주 차분한 목소리였다. 취객은 뭔가 머쓱한 표정을 하고서 물러섰다. 폭발할 것 같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그는 조용히 운전을 했고, 집이 가만히 가까워졌다. 그가 그처럼 쉽게 물러났다는 것이 조금 뜻밖이었다. 


-무서웠어?

-응, 엄청.

-왜?

-엄청 크게 소리 질렀잖아.

-진짜 무서운 사람은 소리 지르지 않아. 소리 지르는 건 자기가 겁이 나서 그런 거야.


그는 계속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달랬다. 나는 그것이 정말 의문스러웠다. 어째서 그는 그 취객을 상대로 화내지 않았을까? 소리 지르는 게 겁이 나서 그런 거라면, 그걸 알고 있으면서 왜? 어째서 그는 한 번 화도 내지 않고 다정히 나를 달래는 데만 치중하는 것인가?



3. 2032


그는 나와 아주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처럼 달랐던 사람이 이제와 이렇게나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은 생각해보면 수수께끼 같은 일이다. 그의 청년시절은 드러난 그대로 매끄러운 질감이다. 그 껍질 아래 감추고 있는 불안을 생각하면 그것이야 말로 그의 가장 큰 성취다. 


그는 자주 싸우는 꿈을 꾼다. 이제 돌아갈 수 없는 거칠음에 대하여. 그는 자신이 약해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삶의 대부분을 불안정하게 했던 것을 가지런히 모으고 이미 잔뜩 엉크러진 사회에서 자기만의 자리를 찾아냈다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언제나 가지런한 채로 살았던 나로서는 잘 알 수 없는 지난한 일이었을 것이다. 싸운다는 것, 멋대로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란 얼마나 흥미로운 일일까, 아드레날린이 펑펑 솟구치는 경험을 해 본 사람은 담배를 끊는 것처럼 쉽게 그것을 놓아버리기 어려우리라 생각한다. 마음대로 거칠게 사는 사람도 세상에는 많다. 그리고 자기의 자그만 폭력성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하면서 자랑으로 삼기도 한다. 그것은 알량한 자부심이 되어 자기를 내세울 다른 수 없는 사람을 억지로 일으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지켜야할 것이 생긴 사람, 지켜야 할 것을 스스로 찾아낸 사람은 자발적으로 거친 삶을 포기할 수 있다. 그는 그것을 약해졌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가 복싱을 배운 것이라 말하고 싶다. 자신을 할퀴지 않을 단단한 틀을 만들어 냈다고.


그는 최근 최소 15년을 좌우할 결정을 했다. 먼 미래를 생각한다는 것은 또 한 바퀴 돌아 그만큼 굳어졌다는 뜻일 것이다. 화려하고 뜨거웠던 여름이 닫히고 다음 계절이 오고 있다. 더 많은 것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응원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어쩌면 이것은 또, 터프가이에게 홀랑 빠졌던 과거의 내가 아직 남아있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4. 왜 약해지는 게 좋았느냐면 


테일러 더든은 편의점 소년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살해 협박을 한다. 소소한 클럽 활동의 일환이다. 소년은 울면서 목숨을 구걸한다. 테일러는 너는 꿈이 뭐냐고 묻는다. 아마 수의사가 되고 싶다고 했던가 그랬었다. 테일러는 굉장한 어조로 당장 가서 공부하라고 한다. (나는 찔끔했다) 공부하지 않으면 찾아가서 죽여버리겠다면서. 소년이 도망치고 나서, 테일러는 그가 안락함에 마취되어서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사실 잘 기억이 안 난다) 


파이트 클럽의 ‘그’는 파이트 클럽을 만들면서 강해졌고 비로소 자기의 욕망을 깨닫는다. 규칙처럼 반복되던 소비와 출근을 다 버려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일상이 된 반복은 아무리 싫어도 빠져나오기 쉽지 않다. 회사가 엿 같아도 사표 내기 어려운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그’는 다칠까봐 무서웠고, 굶을까봐 겁났고, 그러나 결국 상사를 찾아가 자해 쇼를 펼치며 빠져나온다. 테일러 더든이 옆에서 그러도록 부추겼다. 또는 그러도록 무엄한 용기를 주었는지도 모른다.


자꾸만 싸우는 꿈을 꾸다가, 이제 꿈속에서도 도망치게 된다고 풀이 죽은 그에게, 나는 그게 좋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에게 폭력이란 익숙하기에 안락했다. 내가 그를 지켜본 수 년 간 그는 마주치는 안락함마다 단호하게 포기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는데, 아마 테일러 더든이라도 그가 그러는 것을 ‘순응’이라 표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앞으로 계속 단단해질 것이다. 나는 바로 그런 의미로 그가 약해지는 것이 좋았다. 



5. 다시, 파이트 클럽


10월 말에 재개봉한다.

아마도 그것이 필요할 사람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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