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파이트 클럽
파이트 클럽의 주인공 ‘그’는 만들어진 욕구를 가진 자다. 사회에서 주입된 그것, ‘너는 마땅히 이것을 욕망해야한다’라고 강요받은 것들을 집에 차곡차곡 쌓아놓고 산다. 그리고 테일러 더든을 만나면서 파괴를 배운다. 둘은 파이트 클럽을 결성하고, 폭력을 휘두르고, 죽음을 가까이서 느끼고, 규칙을 무너트린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파괴를 파괴한다.
‘그’는 한껏 공들인 무기력함으로 그의 집을 한 땀 한 땀 채웠다. 재료는 이케아 가구. 그리고 이 집이 통째로 폭발하면서 영화는 본격적인 시작을 맞는다.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성찰하라, 당신은 지금 세뇌 당했다. 영화의 첫 장면, 스쳐지나가는 시뻘건 경고 화면에서 테일러 더든이 전하는 말이다.
자본주의 시대의 소비문화란 인간의 모든 발전과 후퇴가 켜켜이 얽혀있는 복잡한 덩어리다. ‘그’는 이것을 쳐부수고 더 본질적인 욕망으로 다가선다는 의미로서 파이트 클럽을 통해 폭력을 즐기는 것이다.
나에게 이것은 용기에 대한 영화다.
2. 포스트 파이트 클럽
나는 파괴에서 출발하여 안정에 도착한 남자를 알고 있다.
그는 주로 싸우는 꿈을 꾼다. 재미있는 꿈을 꿨어! 하고 신이 나 말할 때면 보통 1 대 17의 호화찬란한 추격전이다. 그가 아직 잃지 못한 과거의 색채다.
그는 나와 아주 다른 종류의 사람이다. 지금 그와 내가 이렇게 잘 지낸다는 것은 생각해보면 수수께끼 같은 일이다. 가끔 그가 지나는 말로 과거사를 하나씩 까발릴 때마다 나는 놀란다. 그의 소년시절을 감싼 까끌까끌함이 모래알 같다.
내 주위의 남자들이란 하나같이 하얀 살을 가졌다. 볕을 본 적이 없는 깨끗하고 보드라운 피부는 내게 동질감이 된다. 가끔 울룩불룩 근육을 자랑하는 자들이 있기는 해도 그것 역시 실내 농구장에서, 헬스클럽에서 다육 식물 돌보듯 가꿔낸 것이다. 생활의 잔근육, 생존을 위하여 검게 그을린 살을 실제로 본 적이 나는 잘 없다. 내가 가진 터프가이에 대한 로망은 희소한 것에 대한 판타지로 잘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비로소 그를 만나고, 사랑하고. 아마 그렇게 된 셈이다.
그는 복싱을 좋아한다. 그는 그것이 얼마나 효용 있는 스포츠인가를 말하지만 나는 그가 그 때문에 복싱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만히 지켜본 결과 그에게 복싱은 그냥 틀이다. 그에게는 뿌리 깊은 폭력성이 있고 어려서는 그것이 날뛰기도 했었을 것이다. 날카롭고 새파란 폭력성은 그 주인도 찌른다. 복싱이란 정제된 스포츠가 그것의 목줄기를 눌러주었을 때 그는 안도했을 것이다. 강해진 느낌을 받았을 것이나 강함은 원래부터 있던 것이고 다만 그것이 역류하지 않도록 하는 법을 익혔을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와 카페에서 생각 없이 놀다가 차에 탔을 때는 아마도 밤 열 시 쯤이었다. 오늘 같은 날씨였다. 가만히 가을이 오고 있었고 노상에 편 간이 의자 위에 취한 남자들이 흔들거렸다. 그의 차 앞으로 웬 승합차 한 대가 비뚤게 서 있었다. 도저히 차를 뺄 수 없어서 그는 승합차의 운전석 쪽을 가만 살펴보았다. 그러고 있으려니 술에 쩔은 아저씨 하나가 대단한 속도로 갈 지 자를 그리며 “거기 뭐요!” 하고 소리를 질렀다. “차 좀 빼 주세요.” 하고 답하고 도로 차에 올라타는 과정은 여상했으나 그 뒤는 이상했다. 술 취한 이는 시끌시끌 다가와 이미 닫힌 운전석 쪽 문을 여러 차례 흔들었고, 그 기세에 차가 기우뚱 거렸다. 그가 창문을 내리자 취객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지금 뭐라고 했어? 어? 뭐라고 했어?!”
나는 놀랐다. 남자가 그렇게 소리치는 광경을 그런 거리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무서워서 심장이 쿵쾅거렸고, 손가락에서 피가 물러나와 차가워지는 것이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차 좀 빼달라고요.”
평범한 사내가 답했다. 아주 차분한 목소리였다. 취객은 뭔가 머쓱한 표정을 하고서 물러섰다. 폭발할 것 같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그는 조용히 운전을 했고, 집이 가만히 가까워졌다. 그가 그처럼 쉽게 물러났다는 것이 조금 뜻밖이었다.
-무서웠어?
-응, 엄청.
-왜?
-엄청 크게 소리 질렀잖아.
-진짜 무서운 사람은 소리 지르지 않아. 소리 지르는 건 자기가 겁이 나서 그런 거야.
그는 계속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달랬다. 나는 그것이 정말 의문스러웠다. 어째서 그는 그 취객을 상대로 화내지 않았을까? 소리 지르는 게 겁이 나서 그런 거라면, 그걸 알고 있으면서 왜? 어째서 그는 한 번 화도 내지 않고 다정히 나를 달래는 데만 치중하는 것인가?
3. 2032
그는 나와 아주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처럼 달랐던 사람이 이제와 이렇게나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은 생각해보면 수수께끼 같은 일이다. 그의 청년시절은 드러난 그대로 매끄러운 질감이다. 그 껍질 아래 감추고 있는 불안을 생각하면 그것이야 말로 그의 가장 큰 성취다.
그는 자주 싸우는 꿈을 꾼다. 이제 돌아갈 수 없는 거칠음에 대하여. 그는 자신이 약해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삶의 대부분을 불안정하게 했던 것을 가지런히 모으고 이미 잔뜩 엉크러진 사회에서 자기만의 자리를 찾아냈다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언제나 가지런한 채로 살았던 나로서는 잘 알 수 없는 지난한 일이었을 것이다. 싸운다는 것, 멋대로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란 얼마나 흥미로운 일일까, 아드레날린이 펑펑 솟구치는 경험을 해 본 사람은 담배를 끊는 것처럼 쉽게 그것을 놓아버리기 어려우리라 생각한다. 마음대로 거칠게 사는 사람도 세상에는 많다. 그리고 자기의 자그만 폭력성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하면서 자랑으로 삼기도 한다. 그것은 알량한 자부심이 되어 자기를 내세울 다른 수 없는 사람을 억지로 일으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지켜야할 것이 생긴 사람, 지켜야 할 것을 스스로 찾아낸 사람은 자발적으로 거친 삶을 포기할 수 있다. 그는 그것을 약해졌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가 복싱을 배운 것이라 말하고 싶다. 자신을 할퀴지 않을 단단한 틀을 만들어 냈다고.
그는 최근 최소 15년을 좌우할 결정을 했다. 먼 미래를 생각한다는 것은 또 한 바퀴 돌아 그만큼 굳어졌다는 뜻일 것이다. 화려하고 뜨거웠던 여름이 닫히고 다음 계절이 오고 있다. 더 많은 것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응원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어쩌면 이것은 또, 터프가이에게 홀랑 빠졌던 과거의 내가 아직 남아있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4. 왜 약해지는 게 좋았느냐면
테일러 더든은 편의점 소년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살해 협박을 한다. 소소한 클럽 활동의 일환이다. 소년은 울면서 목숨을 구걸한다. 테일러는 너는 꿈이 뭐냐고 묻는다. 아마 수의사가 되고 싶다고 했던가 그랬었다. 테일러는 굉장한 어조로 당장 가서 공부하라고 한다. (나는 찔끔했다) 공부하지 않으면 찾아가서 죽여버리겠다면서. 소년이 도망치고 나서, 테일러는 그가 안락함에 마취되어서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사실 잘 기억이 안 난다)
파이트 클럽의 ‘그’는 파이트 클럽을 만들면서 강해졌고 비로소 자기의 욕망을 깨닫는다. 규칙처럼 반복되던 소비와 출근을 다 버려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일상이 된 반복은 아무리 싫어도 빠져나오기 쉽지 않다. 회사가 엿 같아도 사표 내기 어려운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그’는 다칠까봐 무서웠고, 굶을까봐 겁났고, 그러나 결국 상사를 찾아가 자해 쇼를 펼치며 빠져나온다. 테일러 더든이 옆에서 그러도록 부추겼다. 또는 그러도록 무엄한 용기를 주었는지도 모른다.
자꾸만 싸우는 꿈을 꾸다가, 이제 꿈속에서도 도망치게 된다고 풀이 죽은 그에게, 나는 그게 좋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에게 폭력이란 익숙하기에 안락했다. 내가 그를 지켜본 수 년 간 그는 마주치는 안락함마다 단호하게 포기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는데, 아마 테일러 더든이라도 그가 그러는 것을 ‘순응’이라 표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앞으로 계속 단단해질 것이다. 나는 바로 그런 의미로 그가 약해지는 것이 좋았다.
5. 다시, 파이트 클럽
10월 말에 재개봉한다.
아마도 그것이 필요할 사람들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