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식단 일기를 쓰고 있다. 원래의 목적은 다른 것이었지만 쓰다 보니 이 행위가 의외로 몹시 훌륭한 기록 수단이라는 것을 알았다. 일기를 쓰면 뭐가 좋고 뭐가 좋고 하는데 솔직히 종이에 직접 글을 쓰는 것은 수정이 어려워서 정제된 결과물이 나오지도 않고 생각을 문장으로 옮기는 순간 내가 느꼈던 감정이 왜곡되기 때문에 피곤하기만 하고 별로 얻을 것도 없다 생각했다. 


어차피 아무리 인간의 언어가 발달한다 하더라도 개개인이 시시각각 마주치는 사건과 느낌을 있는 그대로 묘사할 수 있는 어휘란 없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감정과 가장 유사한 형태의 단어를 찾아서 이용하고 있을 뿐이고, 우리의 대화는 모두 근사치라는 소리다. 

그런데 이 식단 일기라는 것은, 키워드 몇 개만 적으면 되기 때문에 시간도 얼마 안 들고, 그러니까 귀찮지 않아서 빠트리지 않게 되고, 객관적이고 건조한 사실의 나열이어서 내가 그 순간 고른 어휘에 오염될 일도 없고, 아침 점심 저녁만 적는 게 아니라 간식도 다 적으니까 꽤 촘촘하게 하루를 기록할 수 있어서 좋다. 


무엇보다, 우습게도 인간은 그날 무엇을 먹었는지 알면 그날의 다른 일과도 다 기억이 난다는 점이 신기하다. 나는 이제 2017년 1월 22일 오후 7시쯤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구구절절 적힌 기록이 없어도 그렇다. 그날 입은 옷도, 그날 날씨도 선명히 떠오른다. 어떤 말을 했으며, 그 말을 하기까지 어떤 사고과정을 거쳤는지도 생각난다. 

‘순두부찌개’하고 적힌 글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재생 버튼을 누른 것처럼 머릿속에 필름이 돌아가고, 당시의 나와 동기화가 되는 것이다. ‘어쩐지 울적했다’라고 써있었다면 나는 그 울적함에 대해 상상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순두부찌개’라는 단어는 나를 짐작과 어설픈 이해의 영역으로 이끌지 않는다. 

만약 그런 식으로 세세한 기억과 공감이 가능할 만큼 모든 생각을 문장으로 기록하려고 했다면 하루 종일 일기만 써야 했을 것이지만, 식단 일기는 인간의 기억력과 단어 몇 개만을 활용하여 놀라운 효율성으로 이 같은 일을 가능하게 만든다. 우와!


또 가끔씩 식단 일기를 이틀쯤 밀려 쓰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나는 각 하루가 내 삶에 어느 정도의 임팩트를 가지고 있는지도 간접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틀이나 지난 저녁 식사라도, 그날이 충분히 가치 있었다면 아주 쉽게 생각이 난다. 

그러나 하루쯤 지난 식사라 해도 그 날의 인상 자체가 희미하면 그 식사는 생각해내기 어렵다. 

사실 식단 일기를 쓰면서 딱 한 번 그런 일이 있었는데, 책상에 앉아 한 5분쯤 아무리 애를 써도 정말 그 하루가 깜깜했다. 

그렇다면 나는 그 날을 살지 않았던 것이나 다름없지 않나, 그 하루가 내 인생의 어떤 부분에 어떤 식으로도 기여하지 못했다면 말이다. 


식단일기 좋다,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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