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란의 말 "시인은 오직한 언어로만 시를 쓸 수 있다"는 때때로 인용되는데, 여기서 ‘한 언어‘는 폐쇄적 의미의 독일어를 가리키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첼란의 ‘독일어’에는 프랑스어도 러시아어도들어 있다. 외래어가 들어 있을 뿐 아니라 풍부한 시적 발상이 나오는 그래픽 기반으로서 여러 언어가 그물코처럼 서로 꼬여 있다. 그러므로 ‘한 언어’는 벤야민이 번역이론에서 말한, 번역을 통해 많은 언어가 서로 손을 맞잡고 구성하는 ‘하나의’ 언어로 이미지를 상상하는 것이 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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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오가이에 한하지 않고 오늘날 각국의 여러 연구자와 문학평론가, 번역가가 클라이스트의 문장을 ‘악문‘이라고 젠체하며 비난한다. 그럴 때 나는 너무 화가 나서 클라이스트가 자살한 베를린 반제 호수에 뛰어내려 머리를 식히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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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오가이는 문명개화가 아니라 그저 문화 비교의 가능성 비슷한 것을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결국 소설 주인공은 어느 날 유럽소설에서 코를 후비는 묘사를 발견하고 큰 기쁨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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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품 넘치는 버블 시기에 거품 돈으로 사치하고 즐긴 것은 나도 알지만, 그 사치와 열정에서는 돈으로 원한을 푸는 듯한 공격성이 느껴진다. 그 결과 유럽 중심주의를 없애는 기회를 놓쳤을 뿐만 아니라 유럽 문명을 소비 문명으로만 이해하고 자신들을 그 일부라고 여기는 생각이 일반화됐다. 역사가 지우개 가루가 되어서 책상 밑에 버려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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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언어로 소설을 쓰는 것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다.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언어의 모습을 베끼는 것이 아니다. 그 언어에 잠재하지만 아직 누구도 보지 못한 모습을 끌어내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언어에서 표현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이란 문제에 접근하는 데는 모어의 외부로 나가는것이 하나의 유효한 전략이다. 물론 밖으로 나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며 외국어 안에 들어가보는 것은 그중 하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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