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잔을 빼다’란 말은 우아하고 고상한 것과는 전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기만적인 허세에 불과해. ‘고급 하숙’이라고 쓰여 있는 간판이 혼고 주변에 자주 눈에 띄지만, 실제로 화족*이라는 사람들 대부분은 고급 거지라고나 부를 만한 사람들이야. - P6

아아, 돈이 없다는 것은 뭐라 표현해야 좋을지 모를 두려운, 비참한, 살아날 구멍 없는 지옥 같다는 걸 태어나 처음으로 깨닫고는 가슴속에서 뜨거움이 복받친다. 속이 꽉 메어와 울고 싶어도,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인생의 쓴맛이란 이런 느낌을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천장을 바라보며 누운 나는 빳빳이 굳어 그대로 돌이 되어버렸다. - P23

요즘엔 이미 황족도, 화족도 대단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차피 영락해갈 존재라면 화려하게 사라지고 싶다. 온 마을에 불이나 내고 그 죗값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다니,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야 한다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거다. 아무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한다. - P39

이 세상에 불량하지 않은 인간이 있을까, 라는 말이 그 노트에 적혀 있었지만 그 말을 듣고 보니 나도 불량하고 외삼촌도 불량하고 어머니조차 불량한 것 같다.
불량하다는 건 다정다감한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 P83

나는 확신하고 싶다.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살아왔다고. - P120

생각해보면, 결국 나의 죽음은 자연사야. 인간은 사상만으로 죽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 P175

희생자. 도덕적 과도기의 희생자. 당신도 나도 분명히 거기 해당하겠지요.
혁명은 대체 어디서 일어나고 있는 걸까요. 적어도 우리 주위에는 낡은 도덕이 여전히, 구태의연하게 우리의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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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신빙성과는 무관하게, 이처럼 불명확한 경우에 표절과 예상 표절을 단정 짓는 다른 방법이 있다. 그것은 어느 것이 더 중요한 텍스트이며 어느 것이 부차적인 텍스트인지, 또는 어느 것이 주主 텍스트이며 어느 것이 눈에 띄지 않고 영감을 받은 부副 텍스트인지를 생각해보는 방법이다. - P55

우리 소유의 것과 타인에게 속하는 것에 관한 문제는 작가가 자신의 것이 되었다고 간주한 아이디어들을 도둑맞는 고전적 표절의 경우에도 이미 중요했다. 타우스크와 프로이트의 관계에서 이 문제는 한층 더 까다롭다. 왜냐하면 프로이트가 도둑맞은 아이디어들은 그것의 소유권을 합법적으로 주장할 권리가 있을지는 몰라도 아직 딱히 그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듯 그는 모든 창작자가 그렇듯이 자신 안의 타인과,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의 부재와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정신병의 영역에 속하는 경험을 생각하게 하는 대면이다. 왜냐하면 내가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아이디어들이 내 것이 아니라면, 내가 생각하는 것, 혹은 내가 생각한다고 믿는 것이 다른 사람의 것이기도 하다면, 내 안에는 낯선 요소들밖에 남지 않으며, 그 낯선 요소들 가운데서 나의 정체성과 내 창작의 독자성을 간직하기 위한 길을 개척하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 P99

우리가 보듯이, 예상 표절을 해명하기 위한 이 첫 번째 모델은 ‘아이디어‘라는 개념을 변화시킨다. 여기서는 텍스트만이 유동적인 것이 아니라 아이디어도 자체도 유동적이다. 아이디어가, 확실한 경계를 가진 내용이라는 형태의 생각이 아니라, 만져지지 않는 과정과 같은 것이 되면서 아이디어에 대한 소유의 문제는, 도용의 문제가 그렇듯이, 다르게, 그리고 한결 열린 방식으로 제기된다. - P102

이렇듯 영원 회귀에 대한 니체의 생각에도 공감하지 않고, 진짜건 가짜건 주어진 이런저런 표상에도 공감하지 않더라도 앞으로가 아니라 뒤로 향함으로써 니체가 프로이트를 표절했다고 상상해볼 수 있다.
왜냐하면 영원 회귀라는 개념은 형이상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결코 확실성을 갖지 못하지만 반면에 큰 미학적 타당성은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과 예술과 사상의 역사는 반드시 선형적이지 않다. 그것은 순환적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어느 정도 긴 간격을 두고 동일한 테마, 동일한 형태, 동일한 직관이 다시 나타난다. 그것들은 때로 새로움의 후광을 두르고 있지만 역사를 깊이 안다면 그 새로움은 부인된다. 이렇듯, 사람들은 니체처럼 전대의 사람들을 베낌으로써 후대의 사람들을 표절하는 데 꽤 긴 시간이 흐르기에 대략 안심한다. (P.116-117) - P116

묘사적이고 설명적인, 순환적 시간개념은 창작을 부추기기도 한다. 그것은 마치 자연의 흐름처럼, 동일한 형태와 테마가 문학과 예술사에서 정기적으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면서 미래로부터 멀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욱 빨리 미래에 도달하기 위해서 미래의 발명에 가담할 수 있을 미학적 요소들을 과거로 찾아 나설 것을 부추기는 것이다. - P118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폴록의 등장이 막대한 수의 오브제들을 예술 작품으로 변모시키는지 시간을 거슬러 확인한다. 예술 작품이 될 자질을 갖지 못했던 오브제들은 뒤늦게 그 능력을 획득하게 된다. 그런데 예상 표절의 개념만이 이 시간을 거스른 예술 작품 영역의 확장을 가능하게 해준다. 왜냐하면 이 개념이야말로 작품들을 예술의 예측 불가능한 숱한 변화에 적응할 수 있게 무한히 유동적으로 만듦으로써 소급해서 그들을 예술 작품으로 만드는 진짜 기계장치이기 때문이다. (P.172-173) - P172

회화의 예는 등한시할 수 없는 마지막 이점을 제시해준다. 예상 표절이 반드시 말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단순히 시각적인 직감만으로도 실현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이점이다. 회화에서 폴록이 하게 될 일을 예감한 프라 안젤리코의 경우는 아이디어 도용이 어떻게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도 이루어질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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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에서 선생님이 가르쳐 준 포크볼의 비밀.
그때 선생님이 말하고 싶었던 것.
"포크볼이란 거, 거의 떨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
"포크볼, 떨어지지 않는다고요!"
휭휭거리는 바람소리에 지지 않으려고 목청을 높인다.
"떨어질 텐데!"
"떨어지지만, 떨어지지 않는 겁니다!"
그것은 자연낙하에 가까운 것이라고 한다. 물론 조금은 떨어지지만, 그 궤적은 지극히 평범한 포물선에 가깝다. 한편 직구는 강한 상향 회전이 걸리므로 거의 떨어지지 않고 뻗어간다. 그 직구와 비교하게 되므로 도리어 포크볼이 뚝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직구야말로 변화구라는 거죠!"
선생님이 실제로 무슨 생각으로 그것을 내게 말했는지 알 수 없다. 우연히 기억이 나서 말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방금 니시키모 씨가 말한 그대로. 아무 일도 없는 인생이―힘들고 슬픈 일이 전혀 없는 인생이 오히려 더 특별한 것임을.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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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디 에센셜 버지니아 울프 디 에센셜 에디션 2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 민음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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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리지가 언급한 양성적 마음이란 타인의 마음에 열려 있고 공명하며,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감정을 전달할 수 있고, 본래 창조적이고 빛을 발하며 분열되지 않은 것이라는 뜻이었을 겁니다. (자기만의 방 中) - P245

어쨌거나 책에 관한 한, 책의 장점을 기록한 꼬리표를 떨어지지 않게끔 붙이기가 어렵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현대 문학에 대한 평론들이 판단의 어려움을 끝없이 예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동일한 책이 ‘이 위대한 책’ 또는 ‘이 무가치한 책’이라는 두 이름으로 불립니다. 칭찬은 비난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아니, 가치를 측정하는 것이 아무리 즐거운 소일거리라 하더라도 그것은 더없이 무익한 일이며, 가치를 측정하는 사람들의 규정에 복종하는 것은 가장 굴욕적인 태도입니다. 여러분이 쓰고 싶은 것을 쓰는 것, 그것만이 중요한 일입니다. (자기만의 방 中) - P260

지적 자유는 물질적인 것들에 달려 있습니다. 시는 지적 자유에 달려 있지요. 그리고 여성은 그저 이백 년 동안이 아니라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언제나 가난했습니다. 여성은 아테네 노예의 아들보다도 지적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여성에게는 시를 쓸 수 있는 일말의 기회도 없었던 거지요. 이러한 이유로 나는 돈과 자기만의 방을 그토록 강조한 것입니다. (자기만의 방 中) - P263

이 강연의 중간에서 셰익스피어에게 누이가 있었다고 여러분에게 말했지요. 그러나 시드니 리 경의 시인전(傳)에서 그녀를 찾지 마십시오. 그녀는 젊어서 죽었고, 슬프게도 글 한 줄 쓰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지금 엘리펀트 앤 캐슬 맞은편 버스가 정류하는 곳에 묻혀 있지요. 이제 나의 신념은 글 한 줄 쓰지 못한 채 교차로에 묻힌 이 시인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여러분 속에 그리고 내 속에, 또 오늘 밤 설거지하고 아이들을 재우느라 이곳에 오지 못한 많은 여성들 속에 살아 있습니다. 그녀는 살아 있지요. 위대한 시인은 죽지 않으니까요. 그들은 계속되는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우리 속으로 걸어 들어와 육체를 갖게 될 기회를 필요로 할 뿐입니다. (자기만의 방 中) - 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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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순결이란, 지금도 거의 마찬가지이지만, 여자들의 생활에서 종교적인 중요성을 가진 것이었고 여성의 신경과 본능을 휘감았으므로 그것을 자유로이 절단해 한낮의 햇빛에 노출하려면 극히 드문 용기가 필요했을 겁니다. (자기만의 방 中)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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