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젠더 불평등gender inequality‘이란 두 단어 중 오직 하나만 문제가 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젠더‘는 문제가 아니다. 인종 차별주의에 맞서 싸우기 위해 다른 인종의 사람들에게 서로 비슷한 모습이 되려고 노력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젠더를 없애려고 노력하는 것일까? 결국에는 그런 시도는 더 깊은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한다. 그런 시도를 하는 사람들은 젠더의 존재가 사회의 도덕적, 정치적 문제의 원인이라고 비난한다. (P.84-85) - P84
결과적으로 말하면, 마음의 내용은 조작이 가능하다. 즉, 패턴을 소유하고 있는 주인은 마음속에서 그 패턴을 잘게 부숴 수없이 다양한 패턴들로 새롭게 만들어낼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그 해결 과정에서 마음속으로 패턴들을 잘게 자르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 바로 추론이다. - P60
우리 내부의 이미지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비전형적이다. 이런 이미지들을 만드는 장치들은 우리 몸 안 내부 기관들의 상태를 묘사할 뿐만 아니라, 그 내부 기관들과 연결돼 있다. 이 장치들은 화학적 방식으로 내부 기관들과 매우 정교하게 양방향으로 상호작용한다. 우리가 느낌이라고 부르는 혼합물hybrid은 바로 이 상호작용의 결과물이다. 정상적인 마음은 외부 세계에서 비롯한 전통적인(직접적인) 이미지와 몸 내부의 특별하고 혼합적인 이미지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 P71
그렇다면 느낌의 ‘기능‘은 무엇일까? 문화와 과학의 역사를 살펴볼 때 느낌의 역할은 신비스럽고 이해하기 힘들어 보이지만, 이 의문에 대한 답은 분명하다. 느낌은 생명 조절에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느낌은 기민한 감시병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느낌은 마음이 있는 모든 존재에게 그 마음이 속한 유기체 내부의 생명 상태를 알려준다. 또한 느낌은 그 마음이 느낌의 메시지에 담긴 긍정적 또는 부정적 신호에 따라 행동하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P.118-119) - P118
느낌은 생명체에게 자신만의 삶을 경험하도록 해준다. 특히 느낌은 그 느낌의 주인인 유기체에게 그 유기체가 얼마나 성공적으로 살고 있는지에 대한 상대적인 평가를 할 수 있게 해준다. 유기체가 스스로의 삶이 쾌적한지 불쾌한지, 가벼운지 집중적인지 등의 삶의 질에 대해 자연스럽게 등급을 매길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이는 ‘존재‘ 단계에 머무는 유기체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새롭고 가치 있는 정보다. (P.52-53) - P52
망막, 시각 경로, 시각피질 같은 시각 시스템은 외부 세계의 지도를 만들어내 명시적인 시각 이미지들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 하지만 시각 시스템 자체는 이런 이미지들이 우리 유기체 안에서 나타나는 이미지들이라고 자동적으로 말해주지 않는다. 우리는 이 이미지들과 우리의 존재를 연결시키지 않으며, 이 이미지들을 의식하지도 않는다. 이 이미지들을 우리 유기체와 연관시키고 우리 유기체 안에 위치시키려면, 즉 이 이미지들이 우리 유기체와 연결되려면 존재, 느낌, 앎과 관련된 세가지 과정이 조율되어야먄 한다. - P54
Heimat [‘haima:t] 출처: 독일 브로크하우스 백과사전˝사람이 즉각 친숙한 느낌을 갖게 되는... 상상 속 또는 실제의 풍경이나 지역 개념을 정의하는 용어. 이 경험은... 세대를 가로지르며 가족과 기타 제도, 혹은 정치적 이데올로기들을 통해 전해진다. 일상적 용례에서, 하이마트는 또 한 사람이 태어나 정체성과 성격, 정신구조, 세계관 등을 주로 형성하게 되는 초기 사회화를 경험하는 장소를 지칭한다(또한 풍경으로 인식된다)... 국가사회주의자들은 이 용어를... 침참의 공간, 특히 지나치게 단순화한 본보기를 심리적 지향점으로 삼아 그와 동일시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침잠의 공간과 연관시켜 사용했다.˝ - 본문 中-
페어강엔하이츠베벨티궁Vergangenheitsbewältigung의 의미는 "정치적 과거를 받아들이는 것" 이라고 배웠지만, 왠지 그 진짜 의미는 그걸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과정"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인종을 뜻하는 독일어 단어는 동물 종들을 구별할 때만 써야 하고, 종족은 대량학살이라는 문맥 내에서만 써야 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우리가 받은 교육에는 빈 곳들도 있었다. 우리는 수만 명의 독일인들이 나치 정권에 맞서다 죽었다는 사실은 배우지 못했다. (그랬다간 저항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상대적으로 더욱 떳떳하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 15만명의 유대계 후손들이 독일 국방군에 소속되어 싸웠다는 것도 배우지 않았다. (그들의 참전이 우리 죄의식을 덜어줬을지도 모르니까?) 연합군 폭격이 벌어지는 동안 감내했던 사상과 손실, 1945년 이후 수백만 명의 독일인들이 예전에는 독일의 동부 지역이었던 곳에서 추방된 일에 대해서도 거의 배우지 못했다. (자기 연민은 잘못된 것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현대 유대문화에 대해 전혀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유대인‘이라는 단어는 홀로코스트와만 연관시켰고 그 단어는 쉬쉬하며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