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부수는 말 - 왜곡되고 둔갑되는 권력의 언어를 해체하기
이라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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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열이 높은 이유는 개인이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오바마 전 대통령까지 배우고자 했다던 한국의 교육열은, 실은 공부 못한 사람으로 멸시당하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다. ‘치맛바람‘이라는 말로 엄마들을 상스럽게 욕하지만 정작 상스러움은 다른 곳에 있다. 고된 노동이 마치 ‘공부 못한 죄‘로 받게 되는 형벌처럼 여겨지는 것이 그것이다.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는 말이 보여주듯 노동환경의 많은 문제점은 사회적 의제가 되기보다 ‘능력 없는‘ 개인이 당연히 짊어져야 할 짐이 되었다. - P34

타인의 고통과 억울함에 대한 공감이 없는 공정은 오직 나의 억울함에 대한 집착으로 향한다. 이 집착은 개인의 억울함을 사회적 의제로 만들기보다 다른 사람에게 분풀이를 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렇게 억울함은 폭력을 낳는다. - P111

언어는 정치의 장이며 정치는 언어의 장이다. 공적 발화를 하는 사람일수록 타인의 억울함을 번역할 권력을 가진다. 그들은 위치에 따라 자신들의 억울함을 ‘공정‘이라는 개념으로 번역하는 동시에 타인의 억울함을 무능력의 대가로 취급한다. - P115

부당한 낙인과 공격은 당사자에게는 존재를 걸고 증명해야 하는 문제가 되지만 공격하는 이들은 ‘아니면 말고‘ 식이다. - P137

피해자는 어떤 존재인가. 피해자는 신뢰받는가. 피해자라는 정체성은 낙인으로 작용하곤 한다. - P147

이처럼 ‘OO세대‘를 가리키는 말은 사실상 계층, 인종, 지역, 젠더를 교차시켜보면 정확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럼에도 마치 보편적인 세대를 아우르는 말처럼 쓰이곤 한다. 주로 중산층 남성의 관점인데, 그 중산층 남성이 ‘보편적 세대‘의 개념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 P161

물론 경제와 시민의 자유는 상관관계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자유의 ‘본질‘은 아니며 경제력이 자유의 절대적인 전제조건이라는 주장이야말로 인권침해적인 위험한 발상이다. 이런 시각이 그동안 국가의 성장과 경제발전을 위해 수많은 개인의 자유를 희생시키는 관행을 합리화해왔다. ‘그래도 경제는 살렸다‘며 독재를 옹호하게 만든다. - P182

공적 영역에 여성의 자리가 없기에 여성들은 ‘엄마‘로서 자리를 구해야 한다. ‘왕자 낳은 후궁‘이든 ‘엄마‘든 재생산을 충실히 수행한 여성만이 권력을 가진다는 암시를 준다. 단지 비난을 위해서는 야망 있는 어머니 (후궁)을 끌어오고, 칭송하기 위해서는 희생하는 어머니를 내세울 뿐이다. - P212

인종주의에 맞서고, 장애인 차별에 맞서는 이들은 꾸준히 동물권 운동에서 연결성을 찾는다 동물이 학대받는 세상에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도 오지 않는다. 인간은 계속해서 ‘동물 같은 인간‘을 찾기 때문이다. - P286

시장은 은폐의 언어를, 운동은 폭로의 언어를 쓴다. 당연히 후자가 더 즉각적 불편함을 안긴다. 이 불편함이 제 안에 침투하기를 꺼려서 적극적으로 외면하다 보면 자연스레 반지성을 향해 간다. 불편하지 않고 알아가는 진실은 없다. 일본이 아무리 방사능 오염수를 처리수라 명명해도 그것은 오염수이다. - P286

연민은 강한 정치적 힘을 만든다. 그럼에도 고통을 재현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따른다. ‘불쌍한 존재‘는 너무도 무력하다. 부당하게 고통받는 존재들은 그저 이 세계의 ‘불쌍한 존재‘라는 틀에 갇힐 뿐이다. 그렇게 연민의 대상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타자의 불쌍함이 나의 사회적 참여의 감정적 원천이 될 때, 이는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에 저항하는 연대 의식으로 향하기보다 불쌍한 대상을 도울 수 있는 나의 대한 우월감으로 빠지기 쉽다. 불쌍한 대상들이 더 이상 불쌍해 보이지 않을 때 순식간에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 P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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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미래는 언젠가 노화하고 취약해지고 병들고 의존하게 될 모든 사람이 마주할 미래이기도 하다.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어떤 시기에는 정상성의 범주에서 밀려난 존재가 된다. 단지 그것을 상상하지 않으려 애쓸 뿐이다. 그래서 나는 장애인 사이보그를 이야기하는 것이나 기술과 취약함, 기술과 의존, 기술과 소외를 살피는 것이 결국 모든 이들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말하고 싶다. 독립적이고 유능한 이상적 인간과 달리, 현실의 우리는 누구도 취약함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 P40

현실에서 기계와 결합한 존재란 아이언 맨 슈트를 입고 하늘을 날거나 온갖 화려한 차종으로 변신하는 모빌리티를 타는 존재가 아니라, 낡은 철제 수동 휠체어를 탄 이들, 오래된 전동 휠체어를 타고 배터리가 방전될까 걱정하는 이들, 3일에 한 번씩 신장 투석기에 접속하고 4시간씩 혈액의 노폐물을 걸러주느라 스케줄 조정에 곤란을 겪는 이들이다. - P63

음성 합성 AI, 웨어러블 로봇, 그리고 보청기를 통해 들려오는 ‘첫 소리‘ 영상들의 연출이 의도하는 바는 일관적이다. 기술은 장애인에게 정상성을 선물하고, 비장애인들은 그 아름다운 순간을 보며 감동을 받고, 장애인들은 희망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연출에는 여러 문제가 있다. 먼저, 장애인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비장애인에게 감동을 주는 구도는 오래전 호주의 코미디언이자 작가인 스텔라 영Stella Young이 비판했던 ‘감동 포르노‘에서 조금도 나아가지 못했다. 미디어에서 거의 유일하게 허락되었던 ‘역경을 극복한 장애인‘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이 이제는 기술의 보조를 받게 되었을 뿐이다. - P70

기술철학자이자 장애학자인 애슐리 슈Ashley Shew는 기술의 발전이 장애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관점을 테크노에이블리즘Technoableism이라고 칭하며 비판한다. 테크노에이블리즘은 기술 낙관론에 기반한 비장애중심주의다. 이러한 관점은 장애를 손상된 몸을 가진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고, 그 개인에게 기술적 지원이나 교정을 통해 장애를 제거할 것을 혹은 정상적인 기능을 회복할 것을 요구한다. - P86

왜 휠체어를 위해 경사로를 설치하는 것보다 로봇 외골격이 더 주목과 찬사를 받을까? 이동 보조기기를 이용하는 것보다는 ‘걷는‘ 것이 더 정상성에 가깝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소리를 더 잘 듣게 하는 기술보다 수어나 문자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로봇 외골격보다 휠체어가 더 적합할 수 있다. 장애인의 몸은 설령 가능 유형의 장애라 해도 규격화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며, 사람마다 서로 다른 상황에 처한다. - P87

사이보그를 상상하는 사람들이 그리는 세련되고 효율적인 삶 속에는 기계를 유지하고 보수하는 일상의 불편함이 제거되어 있다. 사이보그 신화는 사이보그의 현실이 기계와의 불완전한 동거, 즉 불화에 가깝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 P138

플라스틱 빨대를 둘러싼 일련의 논쟁은 기술과 장애의 관계가 대단히 복잡하다는 것, 더불어 특정한 진보적 가치를 위한 운동이 다른 권리운동과 충돌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환자와 장애인을 위해 개발된 주름 빨대는 주류화되어 어디서나 구할 수 있게 되었지만, 다른 한편 그 주류화를 통해 원래의 목적이 잊히고 말았다. 장애 접근성 이슈에서는 이처럼 자원 사용이나 환경 문제와 관련된 또 다른 충돌이 생길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어떤 충돌 지점에서는 결국 격렬한 논쟁이 필요하다. - P210

어쩌면 미래의 기술, 미래의 과학은 장애인들에게 지금보다 더 많은 선택지를 제공해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발전은 분명히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장애의 종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결함 없는 완전한 기술을 거머쥘 수 없고, 불멸에 도달할 수도 없다. 대신 우리는 다른 대안을 생각해볼 수 있다. 바로 능력차별주의를 끝내는 것. 그것은 손상과 취약함, 의존에 대한 우리의 근본적인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 P278

몸의 위계, 능력의 위계가 사라진 세계를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다. 부적절한 신체를 가진 사람들이 차별에서 자유로울 세계를 그려보는 것조차 막연하고 어렵다. 차라리 인간이 죽음, 노화,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세계를 묘사하는 것이 더 쉬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설령 그것이 아주 어려운 상상이라고 해도 나는 모든 사람이 ‘유능한‘ 세계보다 취약한 사람들이 편안하게 제 자신으로 존재하는 미래가 더 해방적이라고 믿는다. (P.281-282) - P281

<사이보그가 되다>를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 내가 반복해서 떠올린 이미지는 블록버스터 영화 속 사이보그들이다. 그들은 매끈한 팔다리를 휘두르며 스크린 속을 날아다닌다. 이런 사이보그들은 내가 선뜻 이입할 수 없는, 감히 이입할 엄두도 내지못하는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사이보그들은 내 옆에 와 지친 표정을 지으며 앉는다. 보철 다리를 분리해서 손에 들고 사실은 이거 좀 걸리적거렸어, 하면서 투덜거린다. 결함을 가진, 그것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넘어서려고 하지만 실패하고, 결국은 그 텅 빈 구멍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사이보그들을 상상한다. - P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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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이 지나고 무선 이어폰이 등장하자, 그 디자인을 두고 ‘보청기 같다‘며 비웃는 말들이 흔히 보였다. 그런 일들은 모두 장애의 낙인과 연관되어 있었지만, 나는오랜 시간 ‘보청기는 부끄러운 물건인가? 아니면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일인가?‘라는 질문과 씨름해야 했다. 보청기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단지 당사자들의 콤플렉스라고 말하기에는 이 작은 기계에 부여된 어떤 사회적 이미지가 점차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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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것들의 목록 - 소멸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들
유디트 샬란스키 지음, 박경희 옮김 / 뮤진트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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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이나 내용이 너무 좋음에도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어서 평점은 4점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인상 깊었던 부분을 적다보니 별 다섯개로도 모자랄 것 같다. 서문부터 좋았다. 서문을 이렇게 공들여 읽었던 적이 있었던가(있었을테지만). 언젠가 다시 읽어도 분명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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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을 어떤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이라 칭함으로써 그 슬픔이 두 배 또는 절반이 되기도 한다는 것은 죽음과 삶에 깃든 숱한 역설 중 하나에 속한다. 그와 달리 신원확인이 불가능하거나 실종자를 둔 가족들은 불안한 희망과 허용되지 않는 애도로 말미암아 혼란한 악몽에 갇혀 불행의 마무리는 물론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마저도 저지당한다.
살아있다는 것은 상실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될 것인가, 라는 질문은 인류 자체만큼이나 오래된 것이지만 불안하고 대체 불가능한 미래의 속성 또한 포함하고 있다. - P15

인류가 잃은 훌륭한 사상과 감동적인 예술품, 혁명적인 업적들이 실제로 얼마나 되는지, 그런 것들이 누군가의 악의로 파괴되었는지, 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유실되었는지 일일이 파악하지 못하는 것을 어쩌면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모른다. 미지의 것은 누구에게도 괴로움을 주지 않을테니까. 놀랍게도 적지 않은 근대 유럽의 사상가들은 문화의 주기적인 몰락을 납득할 만한 현상 또는 심리적 치유의 과정이라고까지 보았다. 그들은 마치 문화적 기억이라는 것이 원활한 신진대사 - 새로운 음식을 섭취하기에 앞서 이전 것의 소화와 배설을 마치는 - 를 통해 생명을 유지하는 세계유기체라도 된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그들은 이렇게 좁고 자아도취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유럽이 아닌 낯선 지역에 대해 거리낌 없는 점령•약탈•군림•노예화•살인을 자행하고, 그들이 경시하는 그 문화가 소멸하는 것을 자연스러운 과정이라 이해하며,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는 자의적인 진화론의 공식을 따르는 범죄를 정당화한다. (P.18-19) - P18

모든 독재자는 시대를 초월해 신들에게조차 허용되지 않는 것을 늘 새로이 욕망하는 듯하다. 그들의 파괴적인 설계 의지는 자신을 현재에 새기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미래를 통제하려는 자는 과거를 말살해야 한다. 자신을 새로운 왕조의 조상, 모든 진실의 근원으로 일컫는 자는 앞선 사람의 생각을 소멸하고 모든 비판적인 사고를 금지해야 한다. - P20

진화의 법칙은 어떤 개체가 특정 시간 동안 살아남는 것이 우연과 적응의 혼란스럽고 복잡한 상호 작용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계몽주의적인 진보의 믿음이 거의 깨지지 않고 계속 영향을 미치는 것은 전진하는 역사 연표의 단순한 매력과 이에 상응하는 서구문화권의 선형적 사고관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런 경향 때문에 신법神法이 의미를 상실한 시대에 이르러서도 사람들은 주어진 모든 일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의도와 (그럴 만한) 의미가 포함되었다는 자연주의의 그릇된 결론에 너무 쉽게 굴복하게 된다. - P24

마지막으로 다시 내 시선은 창백한 푸른빛의 지구본으로 향했다. 나는 재빨리 그 위치를 찾았다. 바로 그곳, 적도의 남쪽 흩어져 있는 섬들 사이에 이 완벽한 땅이 있었다. 세계의 외딴곳에. 그곳에 대해 한때 알았던 모든 것은 잊혔다. 그러나 세상은 알고 있던 것만을 애도하며 그 더없이 작은 섬이 사라짐으로써 대체 무엇을 잃어버린 것인지 짐작도 하지 못한다. 지구가 이 사라진 조그만 땅에 자신의 배꼽이 될 것을 허락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하여 무역과 전쟁이라는 단단한 삭구가 아니라 비할 데 없이 가느다란 꿈의 실로 묶여있었다 하더라도. 신화란 모든 실제 중에 가장 높은 실제이기에 나는 잠시 도서관을 세계사의 참된 무대로 생각했다. - P52

우리는 아포시오페시스, 즉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전에 말을 끊는 그 기법이 수사학적 제스처라는 것을 안다. 위-롱기누스 역시 숭고함에 대한 그의 저작에서 분명히 이에 대해 다뤘지만, 사서와 제본사 들의 부주의로 사라졌다. 말을 멈추는 사람, 말을 더듬고 머뭇거리기 시작하거나 심지어 침묵하는 사람은 압도적으로 밀려드는 감정 앞에서 반드시 말의 패배를 체험하게 된다. 생략부호는 모든 텍스트에,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나 기존의 단어에 투항하지 않는 감정들에, 규정되지 않은 거대한 감정의 왕국을 열어준다. (P.154-155) - P154

우리는 단어들의 의미가 기호처럼 바뀌는 것을 알고 있다. 오랫동안 점 세 개의 말줄임표(...)는 잃어버린 것과 미지의 것을, 언제부터인가 말해지지 않은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사라짐과 끝 저편의 열린 가능성까지를 표시하게 되었다. 그렇게 점 세 개는 그것이 암시하는 것들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끝까지 밀어붙여 보기를 독려하고, 생략된 것들을 상상하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묵살된 것들, 불쾌하고 외설적인 것들, 지탄의 대상과 사변적인 것들, 누락된 것들의 특별한 변주라는 근본적인 것을 표시하게 되었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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