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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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감상

도서 표백의 표지는 흑과 백으로 이루어져 있는 듯한 얼굴이 대칭되어 있습니다.

삶과 죽음은 백과 흑으로 표현하지만 항상 함께 하듯, 두 얼굴이 서로 같지만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도서는 죽음에 익숙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처음부터 누군가의 죽음을 이야기하며, 그 뒤에도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저자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죽음 그 자체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야기인지 지켜보게 됩니다.

자칫 죽음이라는 주제는 무겁고 어두워 그 호흡을 따라가기 힘들 때가 많습니다.

거기다가 뉴스 기사 형태로 본문이 시작되고, 1인칭 관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어 사실감 있게 느껴집니다.

다행히 숫자로 세부 내용을 나누었고, 엉뚱한 숫자와 소제목으로 이루어진 문서들이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그래서 전체적인 호흡이 짧고 간결하게 느껴져 독서의 어려움이 많이 줄어드는 편입니다.

이 문서들은 때로 표백을 설명하기도 하며, 문체가 달라 본문과 다른 내용을 전개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을 비유하자면 창문 밖에서 어떤 방을 쳐다보는 것 같습니다.

그 방에 있는 물건들을 보다가 손을 뻗어 문을 열고, 문밖의 또 다른 공간을 다시 보는 것 같습니다.

왠지 계속해서 새로운 공간이 나타날 것 같은 묘한 기대감을 갖게 합니다.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그 안에 계속해서 다른 인형을 품고 있는 듯 보입니다.

물론 인형들의 정체는 초반부에 밝혀집니다.

본문과 연결되고 도서 전체를 가로지르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이때부터는 그 죽음에 대한 궁금증과, 죽은 이들에 대한 새로운 비밀이 무엇인지 탐구하게 됩니다.

그 탐구 속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특정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 20분이었습니다.

실제로 읽는 것은 3분 정도도 채 되지 않았겠지만, 마치 실제로 그 시간을 겪은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중요한 약속시간에 다가가게 되면, 초조한 마음으로 시계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점점 다가올수록 시간을 확인하는 빈도가 늘어납니다.

이와 함께 온갖 상상들이 떠오르곤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생각에 매료되고, 시간에 지배됩니다.

그러한 모습을 효과적으로 표현했던 것 같습니다.

전체적인 문체의 느낌을 보자면 아주 냉소적이고 회의적입니다.

그렇지만, 소설을 진행하는 그는 후반부에 변화합니다.

초반의 그는 투정 부리는 고집쟁이 같고, 그 모습을 들키기 싫어 강한척합니다.

그런 그가 성장하고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 어느새 그를 응원하게 됩니다.

소설이 끝나도 그가 계속 싸우기를 바라고, 진정한 싸움꾼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는 몹시 나와 닮았으며, 우리 같았기에 그의 변화가 또 다른 희망을 주는 것 같습니다.

그의 태도는 죽음을 전파한 그녀가 만들어 낸 어떤 의도일지도 모릅니다.

표지의 대칭처럼 그들은 닮았지만 분명 달랐고, 그녀는 사실 그를 부러워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혁명가처럼 보이고, 또 다른 싸움꾼이자 여전사처럼 보였지만, 결국 약한 존재였습니다.

두려워했고, 떨었으며 흔들렸습니다.

물론 그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둘은 엄연히 달랐습니다.

그는 살기를 원했고, 그녀는 죽기를 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사이비 교주 같은 게 아닐까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에게 죽음을 강요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그를 제재하기 위해 그 자리에 있게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여러 시간들을 이겨내고 그녀에게 맞서게 됩니다.

그와 그녀들의 이야기는 마무리됐지만, '사이트 개편 공지'와 함께 새로운 싸움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 사이트는 분명 적그리스도가 만들 사이트와 대척점에 있습니다.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내가 응원하는 쪽이 옳기를 바라봅니다.


총평

무겁고 우울한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짧은 호흡과 중간중간 들어간 문서들이 그 분위기를 조절하게 합니다.

사실적인 표현들과 몰입하게 하는 요소들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어, 읽는 재미가 충분합니다.

다만 하나의 내용임을 인지하기 전까지는 여러 이야기들이 산재되어 있는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완벽해진 세상 속에서 오점이 되지 않기 위한 저항으로 세상의 오점이 되기를 스스로 선택한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반대로, 그들의 대척점에 서기로 한 그의 선택과 또 다른 저항을 준비하는 모습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상세 별점

★ 5개 만점

★★★☆ (주제 8 구성 7 재미 7 재독성 8 평균 7.5)


상세 내용

감상자(鑑賞者)의 감상(리뷰) 블로그

https://blog.naver.com/persimmonbox/223067838814


감상자(鑑賞者)






그런데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왜냐하면 이 책은 나에 관한 것이 아니니까.

이 책은 나의 후배인 세연에 관한 이야기다. - P14

나는 패배자가 되는 게 너무 무서웠고, 지금도 두려워. 내가 받은 교육이라고는 어떻게 하면 패배하지 않느냐에 대한 것뿐이었지. 그래서 승리도 하지 않고 패배도 하지 않는 안전한 방법을 익히고 그대로 살고 있어. - P36

복수와 정복은 결코 완성되어서는 안 되었다. 이뤄지는 순간 그 과제는 곧 거대한 공허로 변해버릴 테니까. 그 목표는 언제나 두어 발 앞에서 빛나고 있어야 했다. 아마 최선은 복수와 세계 정복을 눈앞에 두고 한 개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운명 때문에 좌절하는 것이리라. - P53

조수석에 앉은 추는 흐느적거리며 자기가 집 쓰레기통에서 거미를 기르고 있다는 둥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얘기를 해댔고, 나는 데이비드 린치 영화 속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 P65

한꺼번에 수백 편의 글을 올리는 것보다 매일 꾸준히 서너 편씩 게시물을 올리는 게 홈페이지 방문자 수를 늘리는 데에는 더 도움이 될 터였다.

이런 속도로 글을 올리면 언제쯤 업로드를 마치게 될까? - P242

나는 수면 부족과 만성적인 숙취, 그리고 9월 초의 땡볕 아래 벤치에서 백일몽에 빠졌다. 깨어서 햇볕을 받으며 길을 걷고 있다가 나는 마치 꿈을 꾸듯 공상에 빠졌다. 대학 동창 녀석들이 나타나 "내가 메리다. 너도 이제 슬슬 자살할 준비를 해야지"라고 말했고, 세연이 "사실 그때 연못에서 죽은 건 내가 아니야. 나는 당연히 살아 있었지. 이 모든 일을 뒤에서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이 나 말고 달리 누가 있겠어?"라고 말하기도 했다. 휘영이 "내가 사이트를 운영하면서 기사도 썼어. 뭐가 잘못됐나?"라고 말했고, 추와 병권이 번갈아 나타나 "감쪽같이 속았지? 내가 운영자였어"라며 웃었다. - P263

육체를 의지로 통제하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사형 선고가 죄수들에게 기괴하게 삶에 대한 집착을 부추긴다고 들었다. 우리 모두가 사형 선고를 받고 태어나는 셈인 걸 감안하면 이상한 일이다. 죽을 날을 미리 아는 게 축복이라고 여기며 불치병에 걸려 죽기를 바란 적까지 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의 두려움 역시 수치스럽다.

이번에도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거겠지. - P281

왜 그렇게 안달이냐고?

...

세연이 나를 중요한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아서지.

...

그래서 내가 삐친 거고, 세연이 하려는 일에 재를 뿌려야겠다고 마음먹은 거야. 그런데 나는 제 꾀에 넘어가 처음에 와이두유리브닷컴을 인터넷에 홍보하는 데 큰 공을 세우기도 했지. 그래서 더 삐쳤어. - P300

하지만 너희도 지금 심각한 병에 걸려 있다는 점을 스스로 인정해야 해. 이건 너희가 생각하듯이 멋있는 주장이나 투쟁이 아니야. 그냥 세상을 향한 집단 분풀이일 뿐이야. 정말 위대한 생각은 말이지, 어쩌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무한테도 인정받지 못할 수 있어. 그래도 위대한 정신이라면 그 고독을 견뎌내지. - P320

그녀는 문과대 뒤 학교 연못으로 향하면서 다른 학생들을 마주칠 때마다 속으로 빌었다.

당신들도 나처럼 상처받길 바라요. 당신들도 나처럼 상처받길 바라요. - P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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