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리영희, 헨리 데이비드 소로

  
정혜윤(CBS 라디오 프로듀서) 

 

 동쪽별. 영화 촬영 막바지겠구나. 그렇다면 이제 다음 주면 너의 글을 읽겠구나! 얼씨구절씨구. 그런데 지금은 웃고 있지만 실은 난 이번주 좀 심각했었어. 지난 토요일에 박완서 선생이 돌아가셨지. 나에겐 이런 기억이 있어. 그때가 언제였을까? 내가 아침 9시 프로그램을 할 때였는데 하루는 박완서 선생의 아차산 밑 댁으로 생방송 연결을 하러 가게 되었어. 중계차를 타고 가면서 좀 졸았었던 게 기억나. 새벽에 일어났기 때문이겠지. 퍼뜩 정신을 차렸더니 아차산이야. 난 그때 아차산을 처음 봤었어. 선생님의 소설 제목처럼 나목이 서 있었어. 나목이 서 있는 그 길가는 무척 정갈하고 고요했었어. 누군가 새벽에 일어나서 빗질을 한 게 틀림없었어.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앉아 있다가 나목 뒤로 날아오르는데 그때 새의 얼굴이 보였어. 웃는 낯빛이었어. 우리 눈으론 볼 수 없는 벌레 한 마리를 본 것 같았어. 선생님 집에 도착해서 엔지니어는 방송 중계 라인을 깔고 난 선생님과 새 이야기 를 나눴어. 선생님은 산 밑에 사는 즐거움을 이야기하셨었지. 그때가 대략 아침 여덟 시경이야. 갑자기 선생님이 내게 이렇게 말하셨어.

 “술은 좀 하시나?”

 물론 난 뜨끔했지. 혹시 지난밤에 내가 한 일을 알고 있다는 말일까? 난 나도 모르게 동화 속 입 큰 개구리처럼 입을 최대한 쪼그맣게 축소시키고 있더라고. 그런데 뜻밖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야.

 “술을 좀 하면 지금 한잔할까?”

 물론, 내가 좀 방탕한 피디긴 했지만 그래도 그때까진 방송 직전에 출연자와 술을 마시는 경지에까진 오르지 못했었어. 그래서 나는 “아니요. 방송 전이라서요.”라고 대답했다, 라기보다는 “네, 어떤 술로 할까요?”라고 말해 버렸지. 오토매틱하게 움직이는 내 입을 틀어막고 싶었어. 그때 선생님의 큰따님이 옆에 계셨는데 흘깃 봤더니 날 아주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시는 것 같지는 않았어. 선생님은 손수 일어나서 잔 두 개랑 소주를 가져오셨어.(어쩌면 소주가 아닐지도 몰라. 하여간 투명하고 독했어.) 선생님은 먼저 한잔 들이켜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어.

 “난 아침 공복에 술을 한잔할 때 술이 내 혈관을 타고 내려가는 느낌이 좋아. 술이 이렇게 내 몸을 흐를 때 모세혈관의 지도가, 손가락 끝에 있는 혈관까지 구석구석 마치 생물 시간에 본 것처럼 쫙 그려지거든.”

 그러면서 선생님이 가슴이랑 팔을 이렇게 펼쳐보이던 동작을 난 잊을 수가 없어. 천진난만했고 장난스러웠고 살아 있음이 생생했어. 어쨌든 그때도 선생님은 할머니였으니까 난 그 표정과 몸짓이 젊은 것에 놀랐어. 내 손등의 정맥도 같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어. 나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아! 저것이 바로 나무구나!’라고 생각했었어. 그리고 얼굴은 아까 나무 뒤로 올라간 새의 얼굴과도 같구나! 란 생각도 했고. 아침 술 한잔에도 온몸 구석구석 생생함을 포착해 내던 선생님에게 죽음은 어쩌면 또 다른 초월일지 모르겠어. 난 선생님의 부음을 듣고 무심코 열 손가락 끝을 내려다봤어. 그 손가락 끝에 그날 아침의 독주처럼 뭔가 뜨겁고 애타는 것이 혈관들을 타고 내려가는 것만같이 느껴졌어. 그런데 선생님이 돌아가시던 날은 리영희 선생님이 돌아가신 지 49일 되는 날이었어. 난 그날 오후에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리영희 산문집 『희망』을 읽었어. 『희망』에는 이런 구절이 나와.

   
  나의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누어야 할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이다.  
   

 바로 이 맥락에서 박완서, 리영희,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한 몸 안의 핏줄들처럼 서로 연결돼.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 진리의 추구, 그리고 그것을 나누기 위한 끝없는 자기 실험.

『월든』은 많은 부분 시적으로 아름답지만 그렇다고 낭만적이거나 목가적이라고 할 수는 없어. 소로가 자연을 유달리 찬양하는 이유는 공기가 맑아서이거나 보기에 아름다워서가 아니야. 그가 족제비, 도요새, 부엉이, 올빼미, 개미, 기러기, 청새치, 개구리, 다람쥐, 토끼, 월든 호수, 나무, 모래, 얼음을 관찰하는 이유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

   
  우리는 진정으로 무엇이든 탐험하고 배울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자연의 지칠 줄 모르는 활력과 광활하고 거대한 모습을 보고, 또 난파선의 잔해가 널려 있는 해안을 보고 원기를 회복해야 한다 . 살아 있는 나무와 죽어서 썩어가는 나무의 거친 야생을 느끼고 비구름이 울리는 천둥소리를 듣고 삼 주 동안 퍼부어 홍수를 일으키는 비를 겪고 원기를 회복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고 우리가 근접하지 못할 곳에서 여유롭게 풀을 뜯는 생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목격해야 한다. …… 기러기는 우리보다 훨씬 세상 경험이 많다. 기러기는 캐나다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오하이오에서 점심을 들고 남부 지역의 어느 강어귀에서 깃털을 접고 밤을 보낸다. 들소조차도 계절의 변화와 추이에 발맞추어 콜로라도 강의 풀을 뜯다가 옐로스톤 강에서 그를 기다리는 더 푸르고 달콤한 초원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우리는 나무 울타리를 헐고 농장 주위에 돌벽을 쌓으며 우리 삶의 주위에 경계가 만들어지고 운명이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소로는 “나는 이제 월든 호수를 떠난다!”라고 말한 뒤 우리에게 우리도 탐험가가 될 것을, 자기 내면의 탐험가가 될 것을, 자기 자신의 가장 높은 고지대를 탐험하는 탐험가가 될 것을, 새로운 상품이 아니라 새로운 사상이 흘러갈 수로를 여는 콜럼버스가 될 것을 끝없이 촉구해.

   
  너의 시선을 내면으로 향하라.
그러면 너의 마음속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수천 개의 지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리라.
그 지역들을 여행하고 자신의 세계에 통달한
전문가가 되어라.
 
   

 이 시는 윌리엄 해빙턴이란 사람의 시에서 소로가 인용한 거야. 난 이 시를 보자 저 위대한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한 말이 생각났어.

   
  당신들은 자신의 내면에 그것을 지니지 않았기 때문에
절대로 새로운 땅을 찾아내지 못합니다.
새로운 땅이란 우선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서 탄생하고
그런 다음에야 바다에서 솟아오릅니다.

……밤과 낮의 꿈을 그대로 간직하고
꿈을 행동으로 옮기려고 투쟁하는 자로 하여금
존재하게 해주십시오, 나의 여왕이시여.
이것이 젊음이 의미하는 바요, 신념의 의미입니다.
오직 이것만이 세계가 성장하는 길입니다.

                          『카잔차키스의 편지』 중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여기서 우리를 가끔 현혹시키는 자기 계발이란 말의 의미가 완전히 뒤집히겠지. 그러니 그는 자기 계발을 하겠다고 온갖 것에 솔깃하지 말라고 말할 수 있어. 우리는,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가끔 자괴감에 젖어 용기를 내지 못하기도 하지. 그는 이렇게 말해. “자기가 피그미족이라고 해서 가장 몸집이 큰 피그미가 되지 못한다고 해서 목을 매달아야 하는가? 우리 모두 각자 자기 일에나 관여하고 자기가 가진 재능이나 발휘하려고 애쓰도록 하자.”

 난 철이 자석에 끌려 자기도 모르는 춤을 추듯 나도 그와 함께 질문 대답의 춤을 춰.  


 그에게 인간의 결함, 그것은 무엇일까?
 - 결함은 어떤 상황을 설정하고 그 상황에 자신을 놓아두는 것이다.

 그에게 진실, 그것은 무엇일까?
 - 그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줘. 땜장이 톰 하이드는 교수대에 서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라는 요청에 “바느질을 할 때는 첫 땀을 뜨기 전에 잊지 말고 실의 매듭을 지으라고 재단사들에게 전해 주세요.”라고 죽어. 그것이 진실이다 .

 그에게 자기도취와 오만, 그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우리 대신 사람을 고용해 감자밭을 일구게 한다. 그리고 오후에는 미리 계획한 대로 기독교적인 온순함과 자선을 실천하러 간다.”

 그는 상황을 가정하지 말고 상황에 직면하라고 말해. 그는 삶을 탓하지 말라고 해. 삶을 탓하기만 할 때 삶보다 형편없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일 거야. 그는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야말로 편의적인 발상이고 진부하기 짝이 없는 것이라고 해. 난 이것이 용기일 거라고 생각해.

   
  올해는 수위가 과거 어느 때보다 높아져 메마르고 갈라진 고지대를 물에 잠기게 하고 사향뒤쥐를 모두 익사시키는 다사다난한 해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늘 뭍이었 던 것은 아니다.  
   

『월든』 중에서 내가 언제나 잊지 않고 손가락 끝에 붙이고 다니는 신비로운 이야기를 하나 들려줄게. 난 이 이야기를 생각할 때마다 손가락 끝에 반딧불이 하나 앉은 기분이 들어. 소로 시절에 떠돌던 이야기야. 어느 농부의 집 부엌에 사과나무 탁자가 60년 동안 놓여 있었어. 오래전에 탁자가 탁자가 아니고 나무였을 때 어떤 벌레가 싱싱한 잎사귀를 골라 알을 낳았어. 그런데 나무가 탁자가 되는 바람에 그 알은 부화하지 못하고 메마른 나이테 속에 묻혀 버렸어. 그런데 어느 날 그 탁자에 누군가 (아마도 그 농부의 아내겠지.) 따뜻한 단지를 올려놓았어. 그 바람에 알이 부화되었어. 농부의 가족들은 탁자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어. 뭔가가 나무를 갉아대는 소리였어. 소로는 이렇게 말해.

   
  그리고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온 애벌레는 날개 달린 아름다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났으리라. 메마른 인간 사회에서도 가장 볼품없고 아무도 원치 않는 가구에서 뜻하지 않게 날개 달린 아름다운 생명이 탄생해 마침내 황홀한 여름을 누리게 될지 누가 아는가!  
   

『월든』에서 하지 못한 이야기가 또 많지만 이 말만은 하고 싶어. 소로는 인간조차도 자연이 임무를 행할 때 따르는 보편적인 기본 원칙이 발현된 것으로 생각해. 난 지난 토요일에 살아 있기 때문에 도톰하고 혈색 도는 내 손가락들을 보면서 소로가 말한 것처럼 손은 정맥을 갖춘, 펼쳐진 종려나무 잎사귀, 귀는 머리 옆에 달린 이끼, 턱은 얼굴 위로 흘러내린 물방울이 모여 만들어진 것, 뺨은 눈썹에서 시작해 광대뼈라는 장애물을 만나고 얼굴의 계곡으로 흘러내린 비탈길이란 걸 느꼈어. 난 더 뻗어나갈 나무들, 더 멀리 흐를 강물들을 생각해. 자연이 그 임무를 행하는 이 하루에, 나 살아 있는 동안에, 나의 임무, 나의 의무는 무엇인가? 내가 추구할 진리는 무엇인 가? 이 동쪽별 빛나는 지구에서 눈 뜨고 동트는 걸 지켜보는 아침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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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 / 홍지수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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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독 속의 끝없는 대화

  
정혜윤(CBS 라디오 프로듀서) 

 

동쪽별! 안녕. 난 오늘 늦게 퇴근했어. 퇴근하면서 보니까 가로등 위로 보름달이 떠 있고 바로 그 사이로 눈이 조금 날리더라. 가로등 위에 보름달 그 사이로 날리는 눈. 내일 아침에 눈 뜨면 누군가 싱그러운 얼굴로 내게 달려올 것 같은 이 미신적인 기분은 다 뭐람!

너는 올해 들어 들었던 제일 좋은 소리가 뭐였니? 한번 눈을 감고 떠올려봐. 누군가의 심장 소리였을까? 나무에서 쿵 눈 떨어지는 소리였을까? 혹시 눈 밟는 소리? 나는 겨울 산에 간 적이 있어. 오대산이었는데 월정사 앞 계곡이 다 얼어 붙었어. 꽁꽁 얼어서, 걸어서 개울을 건널 수도 있었어. 물론 언제나 부주의한 나는 얼음 위로 돌진했지. 얼음은 그렇게나 두꺼워 보였어. 그런데 멀리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거야. 점점 더 또렷하게, 또렷하게,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무슨 소리였을 것 같니? 바로 얼음 밑 저 깊은 곳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온 거야. 얼음 밑의 물소리. 마치 물속에 수없이 많은 고드름이 파이프 오르간처럼 서 있고 물살이 그것을 더듬어 은은하고 성스러운 소리를 내는 것 같았어. 그 맑고 깨끗한 느낌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나로선 너무나 그리운 희망이 웃음소리를 내는 것이라고밖엔 달리 말을 못 하겠어. 이 글을 쓰기 전에 나는 잠깐 또 그 소리를 생각해 봤어. 왜냐면 오늘 소개할 책은 바로 그 소리랑 너무나 어울리거든. 바로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이야. 난 소로를 만나면 “저 선생님, 얼음 밑에 물 흐르는 소리 들어봤어요?”라고 다짜고짜 물을 것 같아. 소로라면 예전부터 맘속에 품었던 생각이 얼음 속의 물 흐르듯 그렇게 흐르며 내는 소리라고 대답할 것 같아. 왜냐하면 소로는 호수를 스치는 한줄기 바람을 느낄 때 바람도 바람이지만 바람보다도 포착하기 어려운 영혼이 지나간 게 아닐까 상상하는 사람이니까.

소로는 1845년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 날 펄럭펄럭 휘날리는 성조기를 뒤로하고 간단히 짐을 싸서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 월든 호숫가로 이사가. 그리고 그곳에서 2년 2개월을 보내. 그렇다면 그는 왜 그랬을까? 귀농이었을까? 은둔이 었을까? 둘 다 아니야. 그가 호숫가에 들어간 이유는 ‘진리를 실험해 보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너는 네가 믿는 어떤 진리를 실험해 본 적 있니? (내가 알기론 용감한 자가 미인을 차지한다는 진리를 실험해 볼까 말까 망설인 적은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어떤 진리를 실험해 봤을까? 피는 물보다 진하다를 실험해 보려다가 손가락이 잘릴 뻔한 적이 있고 내 장례식 때 누가 제일 슬퍼하나 보려고 가짜로 죽은 척한 적이 있고(죽을 때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자는 잘못 산 것이라는 엄청난 진리를 듣고는 수도 없이 내 장례식을 상상하다가 드디어 결행. 그 실험 결과는? 언제 눈을 떠야 할지 몰라 허클베리 핀과 가출한 톰 소여보다 더 진땀을 뺀 것도 문제였지만 누워서 내 죽음을 상상해 보니 그동안의 불효가 사무치고 부모의 고통이 너무나 크게 와 닿아 눈물을 흘렸던 게 더 큰 문제였어. 상상 해 봐.무슨 시체가 눈물을 흘리겠니? 그래서 간지럽힘당한 뒤에 눈을 떴을 땐 극적인 부활의 기쁨과 포옹이 아니라 화살처럼 쏟아지는 비난만이 나를 맞이했어. 차갑게.) 최근엔 고전 읽기 진리 실험 중이야. 고전을 쭉 읽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내가 좀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을까? 2년 2개월을 넘어선 이 시점에서 생각해 보면 고전 읽기를 통한 진리 실험 결과는 소로의 월든 진리 실험 결과와 거의 일치해. 특히 고독에 대한 부분, 영원과 현재에 대한 부분, 자기 객관 화에 대한 부분, 탐험에 대한 부분은 나도 소로와 생각이 같아.(그리고 또 하나의 진리 실험이 있긴 해. 기쁨에 관한 건데, 그러니까 기쁨은 어떻게 오는 건가? 하는 건데 그 이야긴 나중에 다시 할게.) 그렇다면 소로는 호숫가에 외따로 사는 형식의 진리 실험을 왜 했을까?

   
  내가 숲속으로 들어간 이유는 깨어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였다. 삶의 본질적인 사실만을 직면하고 그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는지 알아보고 내가 숨을 거둘 때 깨어 있는 삶을 살지 않았다고 후 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삶이 아닌 삶은 살고 싶지 않았다. 삶은 정말 소중하다. 나는 깊이 있는 삶을 통해 삶의 정수를 모두 빨아들이고 굵직한 낫으로 삶이 아닌 모든 것들은 짧게 베어버리고 삶을 극한으로 몰아세워 최소 한의 조건만 갖춘 강인한 스파르타식 삶을 살고 싶었다.  
   

소로는 이런저런 번잡스러운 교제를 싹둑 잘라버리고(그는 심지어 도움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해. ‘나에게 베푸는 호의를 조금이라도 받는 것이 부담스럽다.’ 이건 그가 유달리 까다로운 결 벽증의 소유자라서 한 말이 아니겠지? 도움이란 말은 우리 시대엔 더 세속화되었어. 이제 도움이란 말에는 도와주는 사람의 자기 과시와 자기기만뿐만 아니라 훗날의 이해관계가 섞여 들어가.) 숲 속으로 들어가.

누군가 소로에게 물어.

“그곳에 살면 외롭지 않소?”

소로는 이런 식으로 대답해. 사교는 쓸데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는 고독을 즐긴다. 당신 주위에 가장 가까이 두고자 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혹은 무엇인가? 모든 사물에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 그것을 존재하게 하는 힘이다. 우리 바 로 곁에 있는 존재는 우리가 고용하고 더불어 대화를 나누는 일꾼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창조하는 명공이다.

소로는 외롭지 않냐는 질문에 고독을 즐긴다고 대답했어. 그리고 이어서 가까이 있는 것이 나를 창조한다고 말해. 그렇다면 고독할 때조차 그의 옆에 뭔가 있긴 있다는 말인 걸까? 애교 떠는 거미줄이나 말하는 개똥지빠귀 새 같은 것?

그런데 실은 나도 고전 읽기를 통해서 외로움과 고독을 구별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외로움은 이 거대한 소비 사회의 다수 대중의 한사람으로서의 우리가 겪고 있는 일종의 편집증 같은 것이야. 낮에는 직장인, 밤에는 소비자로서 도시의 뒷골목을 걸을 때 느끼는 감정이야. 이를테면 도스토옙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에 나오는 주인공이 “나는 혼자인데 너희들은 모두 한통속이구나.”라고 절규하며 방에서 괴로워할 때, 혹은 우리들이 ‘나 빼고 너희들 모두 행복하고 시름이 없구나, 내가 죽어 사라져도 지구는 아무 일 없겠구나?’라고 생각할 때, 그게 바로 외로움이야. 외로움은 언제나 자기 자신과만 대화를 나누는 거야. 외로움은 넓은 길, 서로 닮은 거대한 길 속에서 갈 곳을 잃는 것과도 같아. 하지만 고독이라면 어렴풋한 빛 속에 일부러 홀로 떨어져 길을 걷는 것과도 같아. 소로는 이런 표현을 써.

   
  나의 경험이 아무리 강렬하다 해도 나는 나의 어떤 일부가 존재하고 비판한다는 사실을 의식한다. 이 비판하는 존재는 더 이상 나의 일부가 아니며 관객이며 나와 함께 경험하지 않고 나의 경험 을 예의 주시한다. 그 존재는 내가 아니다.  
   

가끔 그럴 때 없니? 마음속에 두 줄기 물줄기가 흐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없니? 혹은 내가 행동을 하는데 그 행동을 지켜보고 질문을 던지고 의심하는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있는 기분 들 때 없니 ? 그때 행동하는 나와 질문하는 나 사이의 대화는 내 몸에서 이뤄져도 엄밀히 말하면 나 홀로 하는 대화가 아니야.

   
 

모든 사유는 엄격히 말해서 고독 속에서 행해지며 나와 나 자신 사이의 대화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하나 속의 둘의 대화는 나의 동료 인간들의 세계와의 접점을 상실하지 않는다. 그들은 내가 그들과 함께 사고의 대화를 이끄는 나 자신 속에 재현되기 때문이다. 고독의 문제는 이러한 하나 속의 둘의 대화가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해서 타자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 나는 나의 정체를 확정하기 위해서 전적으로 다른 사람들 에게 의존한다.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바로 이런 것이 ‘자아 성찰’이 아닐까? 이런 것이 바로 ‘자기 객관화’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돼. 그리고 이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도 생각해 봐. 이 불안한 사회에서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만이 휩쓸리지 않고 두려움 없이 삶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기 때문에 고독 속의 끝없는 대화는 너무나 중요해.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 자신을 신뢰하는 과정이랑 같이 갈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야. 그때 꼭 필요 한 것이 고독 속의 대화일 거야. 자기 연민, 자기 비하 혹은 나르시시즘에 가까운 자기애는 자기 자신도 세상도 신뢰하지 못하게 해. 우리는 대면하는 대신 피하거나 화부터 내려 들 거야. 고독한 소로는 윌든 호숫가의 모든 것과 대화를 나눠. 그에겐 연민도 비하도 피해 의식도 없어. 대신 사색과 신념이 있지. 어쩌면 소로가 그렇게 하고 있는 동안 나는 고전과 그런 일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 질문하고 또 질문하고. 그의 진리 실험 결과는 어땠을까? 고독 속에서 그는 뭘 발견했을까? 하지만 우린 다음 주에 만나야 해. 궁금해? 그래도 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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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 / 홍지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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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하나 2011-01-21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월든 책 소개 부분이 인상적입니다. 저는 가을에 읽어서인지 월든을 문득 떠올리자면 높-은 하늘과 낙엽타는 냄새. 가만히 가만히 물결치는 호숫가. 이렇게 떠오르는데 말이죠 +ㅅ+

언제나 좋은 글 감사드려요.
그런데 민규동감독님은 언제 나타나십니까 ㅋㅋㅋ
 

 

  하늘에서 바라본 시선과 대지의 책임감

  
정혜윤(CBS 라디오 프로듀서) 

 

  동쪽별. 난 어쩐지 머리가 좀 아파. 나 감기 걸릴 것 같니? 그런데 너 눈 구경은 했니? 난 취재 다녀오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서 이정표도 가로등도 없는 공사 중인 구간에서 눈을 만났어. 길이 어디서 뚝 끊어질지 알 수가 없었어. 평소라면 눈이다! 좋아했을 텐데 무서우니까 눈이 꼭 변기통의 화장지 빨려 들어가듯 내리는구나! 이렇게 생각될 정도로 심통이 났지. 어둠과 펄펄 날리며 덤벼드는 눈 속의 파헤쳐진 길을 최대한 느리게 가다 보니까 마침내 환한 불빛이 나타났어. 너무 반가워서 간판을 봤어. 글씨가 아주 선명하게 써 있었어. 장. 례. 식. 장!

  생텍쥐페리와 동료 프레보는 사하라 추막에서 추락해. 시속 200킬로미터의 속도로 땅을 들이받지. 살아났다는 게 불가사의할 정도의 추락이었어. 아! 왔던 곳으로 돌아가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프레보가 울어. 생텍쥐페리는 어깨를 두드리며 이렇게 말해. “끝장난 거면 별수 없지, 뭐.” 그러자 프레보가 대답해. “내가 우는 게 나 때문인 줄 아나…….”
생텍쥐페리는 그 말을 이해해. 그는 아내의 눈을, 동료의 눈을 생각해. “나를 기다리는 눈들이 보일 때마다 나는 불에 덴 듯 고통스럽다.”

  마실 물 한 방울 없이 이슬만이 희망인 사막 한가운데 생텍쥐페리는 자신이 조난자가 아니라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조난자라고 생각해. 이 관점은 생텍쥐페리가 구조되는 그 순간까지 일관되게 유지돼. 조난자는 내가 아니다. 조난자는 우리의 실수로, 우리의 부재로, 우리의 침묵으로 위협받으며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생텍쥐페리는 이렇게 외쳐. “침묵의 순간에 일 초씩 흐를 때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씩 죽어간다. 조금만 참아다오! 우리가 간다! 우리가 구해 주겠다!” 그리고 생텍쥐페리는 지난주에 말한 것처럼 다시 책임감에 대해 생각해. “애수는 사회적인 관계 안에서만 발생한다. 우리가 책임져야 할 이들을 안심시켜 주지 못하는 우리의 무력함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책임을 지기 위해, 돌아가기 위해 생텍쥐페리는 피로와 갈증 속에서도 길을 나서. 그리고 인간의 발자국은 발견하지 못하지만 사막여우의 굴을 발견해.   “내 작은 여우야. 나는 지금 절망적이란다.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절망적인데도 네가 어떤 성격일지 관심이 생기니 말이야.” 이 장면은 내가 아주 좋아하는 부분이지만 지금은 건너뛸게. 생텍쥐페리는 추락 후 사흘이 지나자 신기루를 보고 탈수 증세로 온몸을 벌벌 떨기 시작해. 곧 죽을 거라고 느껴지는 순간 다시 이런 생각을 해. “그대들의 고통을 제외하면 나는 아무것도 후회스럽지 않아……. 만일 내가 돌아갈 수 있다면 이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것이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돌아가려고 무진 애를 써.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돌아가려 한 것은 아니야. 그럼 누구에게일까? 

  “나와 동류인 모든 인간들에게.”

  그리고 마침내 발자국 하나를 발견해. 모래 위에 찍힌 기적과도 같은 인간의 발자국 하나를. 또 환영일까? 이번엔 아니었어. 정말로 저기 언덕 위에 베두인족 한명이 낙타를 가고 있었어. 하지만 생텍쥐페리와 프레보의 성대는 말 라버렸어.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어. 베두인족은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어. 잔인한 악마가 그들에게 베두인족이자 인간인 그를 보여 주고는 소리 없이 다시 데려가려고 하고 있었어. 베두인족은 아주 천천히 멀어져 가지만 생텍쥐페리는 달릴 수도 없었어. 또 다른 아랍인의 실루엣이 보였어. 둘은 팔을 마구 휘저어. 그 팔짓은 세계 전체를, 허공 전부를 휘저을 수 있어야 했어. 하지만 그러지 못했지. 그래서 그 베두인족은 여전히 오른쪽만 바라보고 있어. 그러다가……

   
  마침내 천천히 그가 4분의 1쯤 몸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가 우리를 바라보는 순간, 그는 이미 우리 몸에서 갈증도 죽음도 신기루도 지우고 있을 것이다. 그가 4분의 1쯤 몸을 돌리기 시작했다. 벌 써 세상이 변하고 있다. 그는 단지 상반신만을 움직임으로써, 단지 시선을 옮기는 것만으로 생명을 창조한다. 그가 나에게는 신처럼 보인다. 이것은 기적이다. 그는 바다 위를 걷는 신처럼 모래 위를 걸어 우리에게로 온다.  
   

  이것이 내가 지난주에 말한 상반신과 고개를 돌리는 세계 문학사상 최고의 명장면이야. 난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한숨을 쉴 수밖에 없어. 안도감 때문일까? 뭐라고 표현하든 누군가 나를 본다는 것의 의미의 거대함에 대해서 일단은 한숨을 쉬고 볼 수밖에 없어. 누군가 나를 본다는 것은 생텍쥐페리의 말처럼 기적 아닐까? 보는 사람과 보길 원하는 사람 사이에 오고 가는 시선의 왕복 운동의 의미에 대해서 우리가 뭐 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생텍쥐페리는 이렇게 생각해.

   
  리비아의 베두인족이여! 우리를 구해 준 당신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의 구세주였음에도 당신은 내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나는 당신의 얼굴을 영영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인간이 다. 그래서 나에게는 당신이 모든 사람의 얼굴과 동시에 나타난다. 당신은 단 한 번도 우리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본 적이 없는데도 진즉부터 우리를 알아보았다. 당신은 가장 사랑하는 형제다. 그러니 때가 되면 이번에는 내가 당신을 모든 사람들 속에서 알아볼 것이다. 당신은 고귀하고 친절한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내 모든 친구들, 내 모든 적들이 당신을 통해 나에게로 걸어온다. 그러니 이제 세상에 적은 단 한 명도 없다.  
   

  이 부분, 바로 이 부분 말이야. 나라면 이렇게 인사했을지도 몰라.

  “(돈이 있을 경우) 베두인족이여. 감사합니다. 언젠가 당신의 댁을 방문해 낙타를 몇 마리 선물하겠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비행기 내 옆자리에 특별히 태워드리겠습니다.”
  “(돈이 없을 경우) 베두인족이여. 감사합니다. 당신의 마룻바닥을 일주일 동안 닦아드리고 낙타를 일주일 동안 목욕시켜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생텍쥐페리는 결코 이렇게 말하지 않았어. 대신 그는 “세상 모든 인간의 얼굴을 통해 당신의 얼굴이 나타납니다.”라고 했어. 이젠 생텍쥐페리가 이 글을 쓴 이유가 명백해졌어. 그러니까 생텍쥐페리는 이 글을 몇몇 사람의 빼어난 용기와 고귀함을 칭찬하려고, 혹은 비행사로서의 특이한 경험을 감동적으로 전해 주려고 쓴 것이 아닌 거야.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바로 이거였어.

   
  그러나 하늘에서의 밤, 사막에서의 밤, 이런 것들은 몇몇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드문 기회다. 하지만 그 상황이 다가오면 다 똑같은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다.  
   

  같은 상황이 되면 너도 그렇게 행동할 것이다!란 이 말의 의미를 한번 생각해 봐. 나도 누군가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될 것이다,라는 말이잖아. 나도 미처 파악 못 하고 지금은 그저 잠만 자고 있지만 때만 만나면 훨씬 더 고결하고 위대하고 인간적인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이잖아. 이 부분은 내겐 예수가 메마르고 지친, 가난한 군중을 앞에 두고 한 산상수훈만큼의 충격을 내게 줘. 그래서 스피노자가 예수를 두고 한 말이 지금 이 순간 생각나.

  “그는 법에 예속된 제자들을 법으로부터 해방한 대신 그들이 마음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 영원히 예속토록 만들었다.”

  난 이것이 생텍쥐페리가 말한 책임감이라고 생각해. 끝없는 선택의 순간마다, 책임을 져야하는 순간마다 다른 무엇이 아닌 마음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 예속되어 선택하는 것 말이야. 이런 예속이라면 예속이 아니라 인간 해방이고 사랑일 거야. 이것이 내가 생텍쥐페리에게 배운 하늘에서 본 시선이야.

  지구 밖 어딘가에는 어린아이들이 놀고 있는 방으로 가득 찬 별이 있다고 들었어. 생텍쥐페리도 그 소문을 혹시 들었을까? 그렇다면 그는 이 지구를 바로 그런 방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믿었고 그렇게 하려고 했던 것 같아. 그의 용기, 그의 책임감, 그의 인간과 지구에 대한 신뢰, 그의 행동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니? 『인간의 대지』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프랑스에서 해고되어 폴란드로 돌아가는 노동자 무리를 만나. 그들 중에는 완전히 지쳐빠져 잠든 부부 가 있었는데 그 사이에 끼어 잠들어 있는 것은 황금 사과처럼 예쁜 어린아이였어. 생텍쥐페리는 그것을 절대 놓치지 않아. 그리고 우리 인간들이 비참과 나태함과 무관심에 절대로 안주하지 않기를, 저 황금 사과 같은 아기를 구해 내기를 , 그래서 우리 모두 저마다 새로운 인간을 창조해 내길 바라. 그는 지구가 황량한 곳이고 위험한 곳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는데도 말이야.

  그러니 동쪽별, 나도 너를 상반신을 돌려 고개를 돌려 본다. 본다. 그리고 그날 밤의 장례식장 불빛 말이야. 그 불빛이 한번 나타나자 그다음부터는 많은 빛들이 차례로 나타났단다. 난 무사히 돌아와서 이렇게 글을 쓴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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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대지> 

  생텍쥐페리 / 윌리엄 리스 해설 / 허희정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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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대지 _ 나의 변하지 않는 출발점

  
정혜윤(CBS 라디오 프로듀서) 

 

  동쪽별. 12월 31일 밤에 너는 이대 목동 병원에서 영화를 찍었고 나는 목동의 방송국에서 송년 특집 다큐멘터리를 방송하고 있었구나. 제야의 종이 열두 번 치기 직전 쌩쌩 집으로 뛰어갈 때 목동 병원 쪽을 한 번은 봤다고 장담할 수 있단다. 그것도 상반신이 젖혀질 정도로 크게 고개를 휙 돌려서 말이야.

  뛰어가면서 나는 2010년 한 해 내가 붙잡고 싶은 시간이 무엇이 있었을까, 생각을 해보았단다. 호텔 야외 수영장에서 검은 구름이 빗방울을 막 떨어뜨리고 그것이 내가 읽던 네루다 시집에 툭 떨어지던 때, 남들은 모두 수영장에 뛰어들 때, 검은 구름을 보며 시민 여러분! 저기 구름이 있어요! 이렇게 속으로 외칠 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느끼면서도 모두가 함께하길 원할 때, 그리고 볼라뇨의 『칠레의 밤』을 읽고 충격을 받아서 한밤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을 때, 뜻대로 되지 않는 원고 때문에 밤의 불명예 속에 던져져 있던 때, 그런 것들이 생각났어. 그 밤에 난 붙잡고 싶은 시간의 속성들을 알게 되었던 것도 같아. 그런 시간의 가치란 계산될 수가 없는 것이었어. 그 시간들은 적어도 나에 게 아무런 경제적 이득도 가져다주지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들 속에 강렬하고 뜨거운 긍정들과 배움이 있었어. ‘아 이렇게 살면 되겠구나.’ 이런 느낌 말이야. ‘이럴 때 웃고 이럴 때 슬퍼하고 이럴 때 저항 하면서 이렇게 살면 되겠구나.’ 이런 느낌 말이야.
  만약 붙잡고 싶은 어떤 시간이 있었다면 올 한 해는 그걸 위해 힘들게, 지쳐도 허망하게 느껴져도 무기력하게 느껴져도 힘들게 노력하자, 우리.

  나는 가끔 글 쓰다가 슬퍼질 때가 있어. 오늘 쓴 글이 어제 쓴 글보다도 못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있을 때가 있어.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 그대로이면 어쩌지 하는 슬픔이 있을 때가 있어.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그때마다 내가 하는 것은 나를 돌아보는 건 아니야. 다른 사람들과 그들이 발 딛고 있는 대지를 보는 거야. ‘인간의 대지’ 말이야. 그 이야기가 바로 오늘 소개할 책에 신비롭고 위대하게 나와 있어.

  바로 생텍쥐페리의 『인간의 대지』야. 하늘에서 바라본 인간의 대지에 대한 시선. 그것이 『인간의 대지』가 나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었어. 나는 『인간의 대지』를 읽고 시선을 하늘로 돌릴 수 있게 되었던 것 같아. 어떤 책들은 아주 한참 살아본 다음에야 그 가치를 알게 되는데 『인간의 대지』는 나에게 시작점, 언제나 변하지 않는 출발점인 책이야. 『인간의 대지』 때문에 나는 고귀함, 용기, 별, 동료, 직업의 의미, 돌아옴의 의미, 살아나려 함의 의미,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 불빛의 의미를 아주 크게 받아들이게 되었어. 아! 그 모든 이야기를 너에게 제대로 들려줄 수만 있다면.

  인간의 대지란 무엇일까? 어느 날 생텍쥐페리는 야간 비행 중 길을 잃어. 생텍쥐페리의 표현을 그대로 옮겨보자면.

   
  다가갈 수 없는 100개의 별들 사이에서 단 하나뿐인 진정한 별을, 우리의 별을,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과 우리의 정다운 집과 우리의 애정을 간직하고 있는 그 별을 찾다가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유일하게 그런 것들을 간직하고 있는 별……. 어쩌면 당신에게는 유치하게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그때 내 앞에 나타났던 이미지를 당신에게 말해보려 한다. 서늘한 새벽녘에 카사블랑카에 착륙할 것이다. 그러면 네리와 나는 시내 로 갈 것이다. 새벽녘, 그곳엔 일찌감치 문을 여는 작은 술집들이 있다. 네리와 나는 안도감에 젖어 식탁에 자리를 잡을 것이다. 그리고 뜨거운 크루아상과 카페올레를 앞에 두고 지난밤 일을 웃으며 이야기하겠지. 네리와 나는 생명이라 는 아침 선물을 받을 것이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평온한 목장, 이국적인 농장, 수확물 등과 일체감을 느끼고 그리하여 온 대지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 많은 별들 가운데 우리 손이 미치는 범위에 존재하고 새벽 식사로 맛있는 냄새 가 나는 밥 한 그릇을 차려주는 별은 오직 하나, 지구뿐이다.  
   

  그런데 그 인간의 대지는 따뜻하고 평화로운 곳이기만 할까? 하늘에서 바라본다면 지상의 불빛은 아직도 식지 않는 용암 위에 위태롭게 서 있고 후일 덮쳐 올 눈바람과 모래에 위협을 받고 있고 결국 어떤 인간도 충분히 깊게 안정된 땅에 발 딛고 있지 않아. 하늘에서 지구를 바라본다면 바위와 모래가 차지하는 부분이 너무도 어마어마해서 나무 그늘, 평범한 집의 현관도 행복과 우연의 결합이 아니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을 지경이야. 그래서 생텍쥐페리는 이렇게 묻는 거야. 왜 우리는 타인을 미워하는가? 같은 별에 사는 이웃인데, 이 별 아래서는 단지 양 몇 마리만을 길러내는 순박한 양치기도 하인 이상의 가치를 갖는데, 그는 파수꾼인데, 제국 전체를 책임지는.

  어느 날 생텍쥐페리의 동료 비행사인 기요메는 겨울에 안데스 산맥을 횡단하다가 50시간이나 실종되었어. 생텍쥐페리 일행은 닷새 동안이나 산더미를 뒤졌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어. 그런데 이레째 되는 날 한 사내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말했어.

  “ 기요메가…… 살아 있어!”

  그렇게 해서 기요메는 자신이 어떻게 4500미터의 산을 기어 올라서, 40도의 추위 속에서, 손, 발, 무릎이 피투성이로 변해 가면서, 수없이 넘어지면서, 절대로 잠들지도 정신을 잃지도 않고 살아 돌아왔는지 말하기 시작했어.

   
  이틀, 사흘, 나흘을 걷고 나면 자고 싶은 생각만 간절해지거든. 나도 그랬어. 하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지. 내 아내는 생각하겠지. 만약 내가 살아 있다면 걸을 거라고. 동료들도 내가 걸을 거라고 믿을 거야. 그들은 모두 나를 믿고 있어. 그러니 내가 걷지 않는다면 내가 나쁜 놈인 거야.  
   

  동쪽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어. 나 혼자라면! 나 혼자라면! 많은 것들이 상관없을 거란 걸. 죽음조차도, 최고의 비참함과 고통조차도, 나를 위해 울고 있을 사람, 나 때문에 고통받을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상관없을 수 있다는 걸! 울고 있는 어미나 아이나 연인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나에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아무래도 좋다고 말할 수도 있다는 걸.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 것은 이 세계 속에 나에게 희망을 품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란 걸. 내가 때로는 나의 기쁨이 아니라 너의 기쁨을 더 크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란 걸. 그래서 생텍쥐페리는 기요메의 참된 미덕은 그의 불굴의 용기가 아니라 책임감에 있다고 말해.

   
  그의 위대함은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느낀 데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우편물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 동료들에 대한 책임. 그는 자신의 손안에 그들의 고통, 그들의 기쁨을 쥐고 있다……. 인간이 된다는 것, 그것은 바로 책임을 지는 것이다.  
   

  인간이 된다는 것, 그것은 바로 책임을 지는 것이다! 이 말의 울림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니? 인간이 된다는 것, 그것은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와는 아주 다른 말이겠지? 책임이 우리가 공유 하는 윤리나 인간성과 자발적으로 관련된 부분이라면 의무는 어쩌면 더 사회제도적이고 외부에서 오는 것이고 강제적인 것일 수도 있겠지. 이를테면 우리 아빠가 노벨평화상을 타서 내가 뛸 듯이 기뻐한다면 그건 의무감 때문은 아니겠지? 그래서 생텍쥐페리는 책임을 진다는 것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을 거야.

   
  그것은 자신과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는 비참함 앞에서 부끄러움을 아는 일이다. 그것은 동료들이 거둔 승리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일이다. 그것은 자신의 돌멩이 하나를 놓으면서 세계를 건설하 는 데 일조한다는 것을 느끼는 일이다.  
   

  우편 비행사였던 생텍쥐페리는 한 직업의 위대함은 사람을 다른 사람과 이어주는 것이라고 말했어. 그 이어짐이 우편물을 한 집 우체통에서 다른 집 우체통으로 배달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겠지? 이것이 내가 생텍쥐페리에게 배운 직업윤리고 인간 되기의 중요한 원칙이었던 것 같아. 그런데 기요메 이야기의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해. 그 이야기는 다음 주에 할게. 그런데 너, 아까 내가 네 쪽으로 상반신을 움직여서 고개를 돌렸다고 말했잖아. 고개를 돌리는 동작에 대해 가장 아름답고 숭고하게 묘사된 책이 뭔지 아니? 작별할 때 크게 손을 흔드는 동작의 최고봉이 보르헤스라면 고개 돌리는 동작은 단연 생텍쥐페리야, 내가 알기론. 네가 알면 알려 줘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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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대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윌리엄 리스 해설 / 허희정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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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하나 2011-01-08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셍떽쥐베리머취 >ㅅ <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
 

 

  해피 뉴 이어! <크리스마스 캐럴> 마지막 이야기

  
정혜윤(CBS 라디오 프로듀서) 

 

  안녕. 동쪽별. 이제 곧 한 해가 가네. 올해는 어땠니? 이런 생각할 겨를 없이 바쁜 거니? 언제나처럼 조금 슬프게 조금 썰렁하게 조금 유머러스하게 자학 유머를 구사할 거니? 쓸쓸한 미소와 함께.

  난 며칠 전에 엄마랑 통화했던 걸 자꾸자꾸 생각하게 돼. 우리 엄마가 계신 농장엔 펑펑 함박눈이 내렸다고 해. 우리 엄마는 소를 많이 기르기 때문에 구제역이 염려되어서 농장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절대로 밖에 나가지 않는대. 펑펑 쏟아지는 눈 한 번 보고 소 눈망울 한 번 보고 특히 임신해서 배가 볼록한 소 한 번 보고 일주일 전에 태어난 송아지 한 번 보고 나면 이 세상에 아직도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지켜야 할 것들이 많은 것처럼 느껴진다는 거야. 그리고 소들은 엄청난 덕성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침착할 수 있다는 거지. 나는 엄마가 눈을 실어 나르는 공기에게 이렇게 말하는 게 상상이 되었어.
  ‘뱃속에 아기가 들어있단 걸 잊지 마세요.’

  소들이 엄청난 덕성의 소유자일 수는 있지만 그래도 죽어야 할 이유까지는 모르겠지? 나는 농장 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 우리 엄마와 아빠가 소들의 마을 입구에 서 있는 한 쌍의 슬픈 천하대장군같이 느껴졌어. 눈은 어디서 떨어 지는 걸까? 하늘에 올라간 소의 눈망울에서? 지상의 우리는 그 눈을 맞으며 삶을 계속하겠지. 앙드레 지드 자서전의 제목이 갑자기 생각나네. ‘과일이 죽지 않으면 홀로 남는다’ 이 눈은 오늘 밤 내게 어떤 말을 걸고 있는 걸까?
  그러나 우선 우리는 이제 『크리스마스 캐럴』 이야기를 마무리할 수밖에 없구나.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스크루지 영감은 유령의 옷자락인줄 알고 붙잡고 늘어진 것이 침대 기둥이었단 걸 알자 크게 기뻐하지. ‘오! 악몽이었어!’라거나 ‘오! 개꿈이었어!’라고 하지 않았어. 그는 지금껏 살면서 저질러온 잘못을 바로잡을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을 가장 기뻐해. (지난주에 말한 것처럼) 여태까지 살아온 모든 날은 꿈이었고 꿈에서 깨어난 바로 이 순간부터 꿈속의 엄중 경고를 잊지 않고 살기로 맘먹은 사람처럼 말이야. 스크루지의 기쁨은 나에게 도 고스란히 전해져. 내가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도 바로 이 부분이지. ‘내 잘못을 바로잡을 시간이 있어!’ 이런 외침이 귀에서 쟁쟁 울리는 것 같아서 나도 덩달아 마음이 바빠져. 스크루지는 살아 있는 동안 남에게 많은 선물을 베푸는 사람이었고 두 번 다시 유령을 만나진 못했어. 누구든 스크루지로 불리기를! 그것이 찰스 디킨스가 우리에게 주는 크리스마스의 축복이었어. 그런데 너 혹시 스크루지의 유령들이 너무 교훈적이고 유머 감각이 떨어져 서 좀 심심하다고 생각하는 것 아니니? 하지만 스크루지의 유령은 우주가 계속되는 한 결코 변함없는 진리를 우직하게 말하고 있어. 살아 있는 한 우린 다른 사람의 영혼에 선하게 개입해서 같이 모험을 떠나야 한다는 것 말이야.

  그런데 이 지점에서 나는 자꾸 한 가지 고민을 하긴 해. 강철 같은 의지의 소유자라고 해도 자신의 다짐이 현실과 만나는 수많은 날 내내,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려 한 마음속 최초의 환희를 그대로 유지하며 살 수 있을까 하는 점 말이야. 이를테면 스크루지가 사기꾼이나 끝없이 다른 사람의 선의를 이용이나 하려 드는 정치인들을 만났다고 상상해 봐. 그는 기껏해야 속여 먹기 쉬운 사람 정도로 취급되어 오히려 누군가의 탐욕의 대상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 서 몹시 상심한 다음에 다시 예전의 스크루지로 돌아갈 수도 있는 것 아닐까?
  난 이 고민에 관한 한 안나 카레니나의 레빈에 감정이입해. 레빈은 난 도대체 이 세상에 무엇을 하러 태어났나 끝없이 고민하는 사람이야. 소설의 마지막에서 레빈은 한 농부와 이야기 하다가 영혼을 가진 농부에 대해 듣게 돼. 그때 그는 문득 큰 깨달음을 얻어. 그리고 그는 선(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해. 만약 선이 원인을 갖는다면 그것은 이미 선이 아니다. 만약 선이 결과를, 보수를 바란다면 그것 역시 선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선은 원인과 결과의 밖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생각해.
  (레빈을 세계에 대해 좀 더 고민하는 참여적이자 철학적인 스크루지라고 상상하고 들어봐.)

   
  민중 전체의 행복을 형성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고 알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민중 전체의 행복에 다다르려면 그저 각자에게 제시되어 있는 선의 법칙을 엄격하게 이행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것만은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깨달음이 있었다고 해도 그 깨달음이 갈등 없이 현실과 만나진 못해. 그것을 레빈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어. 그래서 나는 안나 카레니나의 마지막 문장을 너에게 들려주고 싶어.

   
  이 새로운 감정은 내가 공상했던 것처럼 나를 변화시키지도, 행복하게 만들지도, 갑자기 밝게 해주지도 않았다. 꼭 내 아들에 대한 감정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경이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신 앙인지 신앙이 아닌지 뭐가 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아무튼 이 감정은 내가 괴로워하고 있는 동안 어느 틈에 내 영혼 속으로 들어와서 거기에 든든하게 뿌리를 박아버린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역시 마부 이반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논 쟁을 하기도 하고 부적절할 때에 내 사상을 드러내기도 할 것이다. 여전히 내 영혼의 지극히 거룩한 곳과 남들의 영혼 사이에는, 심지어 아내의 영혼과도 장벽은 쌓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야 내 삶은, 내 온 삶은 나에게 일어날 수 있 는 모든 것을 초월할 것이다. 그리고 삶의 모든 순간은 이전처럼 무의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나의 삶에 부여하는 의심할 나위 없는 선의 의미를 지니게 되리라.  
   

  나는 그 감정을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원한다면』 에필로그에 썼어.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 에필로그를 쓸 때의 감정이 떠오르기 때문에 부끄러워도 인용할게.

   
  헤르만 브로흐는 우리 일생을 닫힌 고리, 그리고 완성을 향한 무한한 노정이라고 표현했다. 닫힌 고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성을 향해 나가는 그 길 사이에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원하는 우리 의 마음이 하나의 동경으로, 하나의 풍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다시 헤르만 브로흐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은총의 예감도 은총이라고 했다. 은총의 예감도 은총이라면, 세계가 두 번 진행될 수 있다는 예감도 세계를 두 번 진행시키는 힘이 될 수 있다. 지금보다 고귀한 어떤 다른 차원의 삶을 그리워하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그리워하는 그 그리움이 삶을 변형시킬 수도 있다.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꿈꾸는 동안에도 여전히 똑같은 일상을 사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우리 맘속의 어느 부분은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저마다의 가치를 향해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마음의 근원을 이룰 것이다.  
   

  동쪽별! 스크루지 영감은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은총을 받았을까? 나는 그가 무척 부럽고 그의 이야기를 잊고 싶지 않아. 우리 모두가 함께 믿고 기뻐할 만한 이야기로 영원히 기억할 거야. 만약 이런 이야기들을 믿는 마음이 우리에게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면 우리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슬픈 이야기에 따라서만 살려고 들 거야. 그리고 동시에 레빈의 이야기도 잊고 싶지 않아. 떨면서 가장 멀리 날아가려고 한밤중에 세상 위를 나는 새들의 이야기로 말이야.

  그런데 너 이런 비유 들어봤니? ‘가능성의 밤에서 현실성의 낮으로 옮겨가는 존재.’ 이 표현이야말로 새로운 인간이 세상 속에 탄생되어 가는 과정을 너무나 아름답게 보여 주지 않니?
  이 글을 쓰는 지금 내 책상 뒤편 하늘에도 눈이 내려. 난 이 눈을 올 한 해 우리에게 있었던 일들에 대한 경고이자 새로운 지혜의 눈으로 받아들이고 싶어. 지금은 깊고 고요한 가능성의 밤이구나! 혹시 은총은 아니더라도 은총의 예감이 밀려들고 있지 않니? 해피 뉴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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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마스 캐럴> 

   찰스 디킨스 / 이은정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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