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대지 _ 나의 변하지 않는 출발점

  
정혜윤(CBS 라디오 프로듀서) 

 

  동쪽별. 12월 31일 밤에 너는 이대 목동 병원에서 영화를 찍었고 나는 목동의 방송국에서 송년 특집 다큐멘터리를 방송하고 있었구나. 제야의 종이 열두 번 치기 직전 쌩쌩 집으로 뛰어갈 때 목동 병원 쪽을 한 번은 봤다고 장담할 수 있단다. 그것도 상반신이 젖혀질 정도로 크게 고개를 휙 돌려서 말이야.

  뛰어가면서 나는 2010년 한 해 내가 붙잡고 싶은 시간이 무엇이 있었을까, 생각을 해보았단다. 호텔 야외 수영장에서 검은 구름이 빗방울을 막 떨어뜨리고 그것이 내가 읽던 네루다 시집에 툭 떨어지던 때, 남들은 모두 수영장에 뛰어들 때, 검은 구름을 보며 시민 여러분! 저기 구름이 있어요! 이렇게 속으로 외칠 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느끼면서도 모두가 함께하길 원할 때, 그리고 볼라뇨의 『칠레의 밤』을 읽고 충격을 받아서 한밤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을 때, 뜻대로 되지 않는 원고 때문에 밤의 불명예 속에 던져져 있던 때, 그런 것들이 생각났어. 그 밤에 난 붙잡고 싶은 시간의 속성들을 알게 되었던 것도 같아. 그런 시간의 가치란 계산될 수가 없는 것이었어. 그 시간들은 적어도 나에 게 아무런 경제적 이득도 가져다주지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들 속에 강렬하고 뜨거운 긍정들과 배움이 있었어. ‘아 이렇게 살면 되겠구나.’ 이런 느낌 말이야. ‘이럴 때 웃고 이럴 때 슬퍼하고 이럴 때 저항 하면서 이렇게 살면 되겠구나.’ 이런 느낌 말이야.
  만약 붙잡고 싶은 어떤 시간이 있었다면 올 한 해는 그걸 위해 힘들게, 지쳐도 허망하게 느껴져도 무기력하게 느껴져도 힘들게 노력하자, 우리.

  나는 가끔 글 쓰다가 슬퍼질 때가 있어. 오늘 쓴 글이 어제 쓴 글보다도 못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있을 때가 있어.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 그대로이면 어쩌지 하는 슬픔이 있을 때가 있어.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그때마다 내가 하는 것은 나를 돌아보는 건 아니야. 다른 사람들과 그들이 발 딛고 있는 대지를 보는 거야. ‘인간의 대지’ 말이야. 그 이야기가 바로 오늘 소개할 책에 신비롭고 위대하게 나와 있어.

  바로 생텍쥐페리의 『인간의 대지』야. 하늘에서 바라본 인간의 대지에 대한 시선. 그것이 『인간의 대지』가 나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었어. 나는 『인간의 대지』를 읽고 시선을 하늘로 돌릴 수 있게 되었던 것 같아. 어떤 책들은 아주 한참 살아본 다음에야 그 가치를 알게 되는데 『인간의 대지』는 나에게 시작점, 언제나 변하지 않는 출발점인 책이야. 『인간의 대지』 때문에 나는 고귀함, 용기, 별, 동료, 직업의 의미, 돌아옴의 의미, 살아나려 함의 의미,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 불빛의 의미를 아주 크게 받아들이게 되었어. 아! 그 모든 이야기를 너에게 제대로 들려줄 수만 있다면.

  인간의 대지란 무엇일까? 어느 날 생텍쥐페리는 야간 비행 중 길을 잃어. 생텍쥐페리의 표현을 그대로 옮겨보자면.

   
  다가갈 수 없는 100개의 별들 사이에서 단 하나뿐인 진정한 별을, 우리의 별을,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과 우리의 정다운 집과 우리의 애정을 간직하고 있는 그 별을 찾다가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유일하게 그런 것들을 간직하고 있는 별……. 어쩌면 당신에게는 유치하게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그때 내 앞에 나타났던 이미지를 당신에게 말해보려 한다. 서늘한 새벽녘에 카사블랑카에 착륙할 것이다. 그러면 네리와 나는 시내 로 갈 것이다. 새벽녘, 그곳엔 일찌감치 문을 여는 작은 술집들이 있다. 네리와 나는 안도감에 젖어 식탁에 자리를 잡을 것이다. 그리고 뜨거운 크루아상과 카페올레를 앞에 두고 지난밤 일을 웃으며 이야기하겠지. 네리와 나는 생명이라 는 아침 선물을 받을 것이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평온한 목장, 이국적인 농장, 수확물 등과 일체감을 느끼고 그리하여 온 대지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 많은 별들 가운데 우리 손이 미치는 범위에 존재하고 새벽 식사로 맛있는 냄새 가 나는 밥 한 그릇을 차려주는 별은 오직 하나, 지구뿐이다.  
   

  그런데 그 인간의 대지는 따뜻하고 평화로운 곳이기만 할까? 하늘에서 바라본다면 지상의 불빛은 아직도 식지 않는 용암 위에 위태롭게 서 있고 후일 덮쳐 올 눈바람과 모래에 위협을 받고 있고 결국 어떤 인간도 충분히 깊게 안정된 땅에 발 딛고 있지 않아. 하늘에서 지구를 바라본다면 바위와 모래가 차지하는 부분이 너무도 어마어마해서 나무 그늘, 평범한 집의 현관도 행복과 우연의 결합이 아니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을 지경이야. 그래서 생텍쥐페리는 이렇게 묻는 거야. 왜 우리는 타인을 미워하는가? 같은 별에 사는 이웃인데, 이 별 아래서는 단지 양 몇 마리만을 길러내는 순박한 양치기도 하인 이상의 가치를 갖는데, 그는 파수꾼인데, 제국 전체를 책임지는.

  어느 날 생텍쥐페리의 동료 비행사인 기요메는 겨울에 안데스 산맥을 횡단하다가 50시간이나 실종되었어. 생텍쥐페리 일행은 닷새 동안이나 산더미를 뒤졌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어. 그런데 이레째 되는 날 한 사내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말했어.

  “ 기요메가…… 살아 있어!”

  그렇게 해서 기요메는 자신이 어떻게 4500미터의 산을 기어 올라서, 40도의 추위 속에서, 손, 발, 무릎이 피투성이로 변해 가면서, 수없이 넘어지면서, 절대로 잠들지도 정신을 잃지도 않고 살아 돌아왔는지 말하기 시작했어.

   
  이틀, 사흘, 나흘을 걷고 나면 자고 싶은 생각만 간절해지거든. 나도 그랬어. 하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지. 내 아내는 생각하겠지. 만약 내가 살아 있다면 걸을 거라고. 동료들도 내가 걸을 거라고 믿을 거야. 그들은 모두 나를 믿고 있어. 그러니 내가 걷지 않는다면 내가 나쁜 놈인 거야.  
   

  동쪽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어. 나 혼자라면! 나 혼자라면! 많은 것들이 상관없을 거란 걸. 죽음조차도, 최고의 비참함과 고통조차도, 나를 위해 울고 있을 사람, 나 때문에 고통받을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상관없을 수 있다는 걸! 울고 있는 어미나 아이나 연인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나에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아무래도 좋다고 말할 수도 있다는 걸.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 것은 이 세계 속에 나에게 희망을 품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란 걸. 내가 때로는 나의 기쁨이 아니라 너의 기쁨을 더 크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란 걸. 그래서 생텍쥐페리는 기요메의 참된 미덕은 그의 불굴의 용기가 아니라 책임감에 있다고 말해.

   
  그의 위대함은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느낀 데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우편물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 동료들에 대한 책임. 그는 자신의 손안에 그들의 고통, 그들의 기쁨을 쥐고 있다……. 인간이 된다는 것, 그것은 바로 책임을 지는 것이다.  
   

  인간이 된다는 것, 그것은 바로 책임을 지는 것이다! 이 말의 울림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니? 인간이 된다는 것, 그것은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와는 아주 다른 말이겠지? 책임이 우리가 공유 하는 윤리나 인간성과 자발적으로 관련된 부분이라면 의무는 어쩌면 더 사회제도적이고 외부에서 오는 것이고 강제적인 것일 수도 있겠지. 이를테면 우리 아빠가 노벨평화상을 타서 내가 뛸 듯이 기뻐한다면 그건 의무감 때문은 아니겠지? 그래서 생텍쥐페리는 책임을 진다는 것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을 거야.

   
  그것은 자신과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는 비참함 앞에서 부끄러움을 아는 일이다. 그것은 동료들이 거둔 승리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일이다. 그것은 자신의 돌멩이 하나를 놓으면서 세계를 건설하 는 데 일조한다는 것을 느끼는 일이다.  
   

  우편 비행사였던 생텍쥐페리는 한 직업의 위대함은 사람을 다른 사람과 이어주는 것이라고 말했어. 그 이어짐이 우편물을 한 집 우체통에서 다른 집 우체통으로 배달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겠지? 이것이 내가 생텍쥐페리에게 배운 직업윤리고 인간 되기의 중요한 원칙이었던 것 같아. 그런데 기요메 이야기의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해. 그 이야기는 다음 주에 할게. 그런데 너, 아까 내가 네 쪽으로 상반신을 움직여서 고개를 돌렸다고 말했잖아. 고개를 돌리는 동작에 대해 가장 아름답고 숭고하게 묘사된 책이 뭔지 아니? 작별할 때 크게 손을 흔드는 동작의 최고봉이 보르헤스라면 고개 돌리는 동작은 단연 생텍쥐페리야, 내가 알기론. 네가 알면 알려 줘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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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대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윌리엄 리스 해설 / 허희정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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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하나 2011-01-08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셍떽쥐베리머취 >ㅅ <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