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 속의 끝없는 대화

  
정혜윤(CBS 라디오 프로듀서) 

 

동쪽별! 안녕. 난 오늘 늦게 퇴근했어. 퇴근하면서 보니까 가로등 위로 보름달이 떠 있고 바로 그 사이로 눈이 조금 날리더라. 가로등 위에 보름달 그 사이로 날리는 눈. 내일 아침에 눈 뜨면 누군가 싱그러운 얼굴로 내게 달려올 것 같은 이 미신적인 기분은 다 뭐람!

너는 올해 들어 들었던 제일 좋은 소리가 뭐였니? 한번 눈을 감고 떠올려봐. 누군가의 심장 소리였을까? 나무에서 쿵 눈 떨어지는 소리였을까? 혹시 눈 밟는 소리? 나는 겨울 산에 간 적이 있어. 오대산이었는데 월정사 앞 계곡이 다 얼어 붙었어. 꽁꽁 얼어서, 걸어서 개울을 건널 수도 있었어. 물론 언제나 부주의한 나는 얼음 위로 돌진했지. 얼음은 그렇게나 두꺼워 보였어. 그런데 멀리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거야. 점점 더 또렷하게, 또렷하게,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무슨 소리였을 것 같니? 바로 얼음 밑 저 깊은 곳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온 거야. 얼음 밑의 물소리. 마치 물속에 수없이 많은 고드름이 파이프 오르간처럼 서 있고 물살이 그것을 더듬어 은은하고 성스러운 소리를 내는 것 같았어. 그 맑고 깨끗한 느낌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나로선 너무나 그리운 희망이 웃음소리를 내는 것이라고밖엔 달리 말을 못 하겠어. 이 글을 쓰기 전에 나는 잠깐 또 그 소리를 생각해 봤어. 왜냐면 오늘 소개할 책은 바로 그 소리랑 너무나 어울리거든. 바로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이야. 난 소로를 만나면 “저 선생님, 얼음 밑에 물 흐르는 소리 들어봤어요?”라고 다짜고짜 물을 것 같아. 소로라면 예전부터 맘속에 품었던 생각이 얼음 속의 물 흐르듯 그렇게 흐르며 내는 소리라고 대답할 것 같아. 왜냐하면 소로는 호수를 스치는 한줄기 바람을 느낄 때 바람도 바람이지만 바람보다도 포착하기 어려운 영혼이 지나간 게 아닐까 상상하는 사람이니까.

소로는 1845년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 날 펄럭펄럭 휘날리는 성조기를 뒤로하고 간단히 짐을 싸서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 월든 호숫가로 이사가. 그리고 그곳에서 2년 2개월을 보내. 그렇다면 그는 왜 그랬을까? 귀농이었을까? 은둔이 었을까? 둘 다 아니야. 그가 호숫가에 들어간 이유는 ‘진리를 실험해 보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너는 네가 믿는 어떤 진리를 실험해 본 적 있니? (내가 알기론 용감한 자가 미인을 차지한다는 진리를 실험해 볼까 말까 망설인 적은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어떤 진리를 실험해 봤을까? 피는 물보다 진하다를 실험해 보려다가 손가락이 잘릴 뻔한 적이 있고 내 장례식 때 누가 제일 슬퍼하나 보려고 가짜로 죽은 척한 적이 있고(죽을 때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자는 잘못 산 것이라는 엄청난 진리를 듣고는 수도 없이 내 장례식을 상상하다가 드디어 결행. 그 실험 결과는? 언제 눈을 떠야 할지 몰라 허클베리 핀과 가출한 톰 소여보다 더 진땀을 뺀 것도 문제였지만 누워서 내 죽음을 상상해 보니 그동안의 불효가 사무치고 부모의 고통이 너무나 크게 와 닿아 눈물을 흘렸던 게 더 큰 문제였어. 상상 해 봐.무슨 시체가 눈물을 흘리겠니? 그래서 간지럽힘당한 뒤에 눈을 떴을 땐 극적인 부활의 기쁨과 포옹이 아니라 화살처럼 쏟아지는 비난만이 나를 맞이했어. 차갑게.) 최근엔 고전 읽기 진리 실험 중이야. 고전을 쭉 읽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내가 좀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을까? 2년 2개월을 넘어선 이 시점에서 생각해 보면 고전 읽기를 통한 진리 실험 결과는 소로의 월든 진리 실험 결과와 거의 일치해. 특히 고독에 대한 부분, 영원과 현재에 대한 부분, 자기 객관 화에 대한 부분, 탐험에 대한 부분은 나도 소로와 생각이 같아.(그리고 또 하나의 진리 실험이 있긴 해. 기쁨에 관한 건데, 그러니까 기쁨은 어떻게 오는 건가? 하는 건데 그 이야긴 나중에 다시 할게.) 그렇다면 소로는 호숫가에 외따로 사는 형식의 진리 실험을 왜 했을까?

   
  내가 숲속으로 들어간 이유는 깨어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였다. 삶의 본질적인 사실만을 직면하고 그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는지 알아보고 내가 숨을 거둘 때 깨어 있는 삶을 살지 않았다고 후 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삶이 아닌 삶은 살고 싶지 않았다. 삶은 정말 소중하다. 나는 깊이 있는 삶을 통해 삶의 정수를 모두 빨아들이고 굵직한 낫으로 삶이 아닌 모든 것들은 짧게 베어버리고 삶을 극한으로 몰아세워 최소 한의 조건만 갖춘 강인한 스파르타식 삶을 살고 싶었다.  
   

소로는 이런저런 번잡스러운 교제를 싹둑 잘라버리고(그는 심지어 도움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해. ‘나에게 베푸는 호의를 조금이라도 받는 것이 부담스럽다.’ 이건 그가 유달리 까다로운 결 벽증의 소유자라서 한 말이 아니겠지? 도움이란 말은 우리 시대엔 더 세속화되었어. 이제 도움이란 말에는 도와주는 사람의 자기 과시와 자기기만뿐만 아니라 훗날의 이해관계가 섞여 들어가.) 숲 속으로 들어가.

누군가 소로에게 물어.

“그곳에 살면 외롭지 않소?”

소로는 이런 식으로 대답해. 사교는 쓸데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는 고독을 즐긴다. 당신 주위에 가장 가까이 두고자 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혹은 무엇인가? 모든 사물에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 그것을 존재하게 하는 힘이다. 우리 바 로 곁에 있는 존재는 우리가 고용하고 더불어 대화를 나누는 일꾼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창조하는 명공이다.

소로는 외롭지 않냐는 질문에 고독을 즐긴다고 대답했어. 그리고 이어서 가까이 있는 것이 나를 창조한다고 말해. 그렇다면 고독할 때조차 그의 옆에 뭔가 있긴 있다는 말인 걸까? 애교 떠는 거미줄이나 말하는 개똥지빠귀 새 같은 것?

그런데 실은 나도 고전 읽기를 통해서 외로움과 고독을 구별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외로움은 이 거대한 소비 사회의 다수 대중의 한사람으로서의 우리가 겪고 있는 일종의 편집증 같은 것이야. 낮에는 직장인, 밤에는 소비자로서 도시의 뒷골목을 걸을 때 느끼는 감정이야. 이를테면 도스토옙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에 나오는 주인공이 “나는 혼자인데 너희들은 모두 한통속이구나.”라고 절규하며 방에서 괴로워할 때, 혹은 우리들이 ‘나 빼고 너희들 모두 행복하고 시름이 없구나, 내가 죽어 사라져도 지구는 아무 일 없겠구나?’라고 생각할 때, 그게 바로 외로움이야. 외로움은 언제나 자기 자신과만 대화를 나누는 거야. 외로움은 넓은 길, 서로 닮은 거대한 길 속에서 갈 곳을 잃는 것과도 같아. 하지만 고독이라면 어렴풋한 빛 속에 일부러 홀로 떨어져 길을 걷는 것과도 같아. 소로는 이런 표현을 써.

   
  나의 경험이 아무리 강렬하다 해도 나는 나의 어떤 일부가 존재하고 비판한다는 사실을 의식한다. 이 비판하는 존재는 더 이상 나의 일부가 아니며 관객이며 나와 함께 경험하지 않고 나의 경험 을 예의 주시한다. 그 존재는 내가 아니다.  
   

가끔 그럴 때 없니? 마음속에 두 줄기 물줄기가 흐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없니? 혹은 내가 행동을 하는데 그 행동을 지켜보고 질문을 던지고 의심하는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있는 기분 들 때 없니 ? 그때 행동하는 나와 질문하는 나 사이의 대화는 내 몸에서 이뤄져도 엄밀히 말하면 나 홀로 하는 대화가 아니야.

   
 

모든 사유는 엄격히 말해서 고독 속에서 행해지며 나와 나 자신 사이의 대화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하나 속의 둘의 대화는 나의 동료 인간들의 세계와의 접점을 상실하지 않는다. 그들은 내가 그들과 함께 사고의 대화를 이끄는 나 자신 속에 재현되기 때문이다. 고독의 문제는 이러한 하나 속의 둘의 대화가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해서 타자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 나는 나의 정체를 확정하기 위해서 전적으로 다른 사람들 에게 의존한다.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바로 이런 것이 ‘자아 성찰’이 아닐까? 이런 것이 바로 ‘자기 객관화’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돼. 그리고 이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도 생각해 봐. 이 불안한 사회에서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만이 휩쓸리지 않고 두려움 없이 삶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기 때문에 고독 속의 끝없는 대화는 너무나 중요해.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 자신을 신뢰하는 과정이랑 같이 갈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야. 그때 꼭 필요 한 것이 고독 속의 대화일 거야. 자기 연민, 자기 비하 혹은 나르시시즘에 가까운 자기애는 자기 자신도 세상도 신뢰하지 못하게 해. 우리는 대면하는 대신 피하거나 화부터 내려 들 거야. 고독한 소로는 윌든 호숫가의 모든 것과 대화를 나눠. 그에겐 연민도 비하도 피해 의식도 없어. 대신 사색과 신념이 있지. 어쩌면 소로가 그렇게 하고 있는 동안 나는 고전과 그런 일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 질문하고 또 질문하고. 그의 진리 실험 결과는 어땠을까? 고독 속에서 그는 뭘 발견했을까? 하지만 우린 다음 주에 만나야 해. 궁금해? 그래도 참아.

 --------------------------------------------------------------------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 / 홍지수 옮김


댓글(1)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삽하나 2011-01-21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월든 책 소개 부분이 인상적입니다. 저는 가을에 읽어서인지 월든을 문득 떠올리자면 높-은 하늘과 낙엽타는 냄새. 가만히 가만히 물결치는 호숫가. 이렇게 떠오르는데 말이죠 +ㅅ+

언제나 좋은 글 감사드려요.
그런데 민규동감독님은 언제 나타나십니까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