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있어도 등 뒤가 흥건히 젖을 정도로 더웠던 2006년 여름 어느 날, 공익 사무실에서 한 권의 책을 읽고 있었다. 해방 이후 한국 기독교 민주화 운동의 기틀을 다진 여해 강원용 목사가 쓴 역사의 언덕에서』(한길사, 2003)였다. 전체 다섯 권의 시리즈로 구성된 이 책은 강 목사가 일전에 쓴 『빈들에서』(삼성출판사, 1995)를 토대로 살을 붙인 개정증보판이었다. 그가 경험한 기독 학생 운동과 한국 근현대사 정치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여해는 이 책 마지막에 손봉숙 교수와의 짧은 만남을 소개한다. 강 목사는 손 교수가 UN 감독 아래 치러진 동티모르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선거관리위원장으로 일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해방 이후 한국교회 현실 참여는 어떠했는지 궁금해서 펼친 책은 마지막에 다다라서 21세기 최초의 독립국가를 알고 싶은 호기심으로 이끌었다. 주말을 이용해 찾은 학교 도서관에서 『동티모르의 탄생: 나는 한 편의 휴먼 드라마를 보고 왔다』(손봉숙, 답게, 2002), (은자의 나라) 동티모르』(이병주, 한국생산성본부, 2001), (한국군 동티모르 파병과) 띠모르레스떼 탄생』(최용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6) 세 권의 책을 빌려 읽었다. 그 중에서도 『동티모르의 탄생』은 독립 전후 동티모르의 상황과 정치 지형도 민생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동티모르를 향한 따뜻한 시선이 인상 깊었다. 동티모르의 역사와 현실을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하며 언젠가는 동티모르 한 구석에 서 있겠구나어렴풋이 생각했다.

 

2년이 지나고 다시 찾아온 여름. 졸업을 한 학기 앞둔 나는 두려웠다. 아직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때였다. 우석훈과 박권일이 던진 ‘88만 원 세대논란은 청년 대학생에서 짱돌을 드는 용기보다 사라진 미래에 대한 불안을 더했다.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아 길을 찾지 못한 채 주저하고 있었다. 어둠으로 가득 찬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어디에 길이 있는지 스스로 묻고 싶었다. 며칠을 고민하곤 동티모르에서 해답을 찾아보자고 생각했다. 이제 막 시작한 독립국가는 내게 답을 말해줄 것 같았다. 현실의 두려움보다는 아무 것도 모르는 낯선 세계의 모험이 훨씬 쉬워 보이기도 했다. 1 1개월의 선택을 두고 친구들이나 주위에선 대단하다고 치켜 세웠지만, 사실 그건 용기가 아닌 도피였고 탈출이었다.


동티모르에서 활동하는 국내 비영리기관은 2개였다. 한국기독교청년회(YMCA)와 개척자들(동티모르에 도착하고 나서야 남북나눔운동이라는 단체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YMCA는 오리지널로 유명한 동티모르 커피 원두를 수입해 평화커피(peace coffe)’라는 이름으로 공정무역 사업을 하고 있었다. 개척자들은 분쟁지역에서 평화를 전한다는 정체성을 가지고 평화학교, 이산가족 찾아주기 등의 활동을 하고 있었다. 고민 끝에 개척자들에 지원하기로 했다. ‘공동체를 지향한다는 그들의 신조가 가슴을 울렸다. 실제로 그들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네시아(아체) 등에서 마을 주민들과 한데 어울려 살고 있었다.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내적 심리가 작동했지만 나름의 원칙과 기대하는 바를 글로 남겼다. ‘더 나은 나를 갈망하는 여행이었던 셈이다. 또 기독 학생 운동을 해 온 지난 5년여를 돌아보고 새로운 삶을 다짐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차차 밝히겠지만 이 첫걸음이야말로 큰 변화의 시작이었다. 13개월 동안 현실 사회를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졌고, 가치관이 변했다. 평화와 정의라는 추상적 개념이 삶으로 다가온 시간이었다. 이제 이곳에 윤애 누나, 짤레스, 우노, 떼와스, 엠마, 마이클 그리고 동티모르 친구들과의 이야기들을 풀어내 보고자 한다. 정신의 고향 동티모르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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