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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의 상실
톰 울프 지음, 박순철 옮김 / 아트북스 / 2003년 4월
평점 :
절판
<The Painted Word>는 1975년에 출간되자 마자, 저자(Tom Wolfe)에게 명성을, 그리고 미술계에 논란을 제공한 책이다. 이번에 <현대미술의 상실>이라는 제목으로 아트북스를 통해 역간됐다. 전체 분량이 고작 135쪽에 불과해 완독하는 데에 두 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아니, 빨리 읽으면 한시간에 독파할, 작고 얇은 책이다. 하지만 30여년 전의 미국 미술계에 이 책이 가져다 준 파장은 작지 않았다.
저자, 울프의 논지는 책의 원제가 잘 보여준다: 그려진 말씀(The Painted Word). 이 '말씀'이라는 단어가 지칭하는 것은 평론가들과 작가들이 사용하는 이론이다. 이론을 '말씀'이라고 부름으로써(즉 신학적 은유를 차용함으로써), 저자는 그 이론의 정전화 현상을 꼬집고 있는 듯 하다.
이 책에서 울프는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Seeing is Believing)'는, 자신이 배워오고 믿어온 명제를 거짓된 것, 혹은 잘못된 것으로서 배척하고, 이의 반제, 즉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Believing is Seeing)'라는 명제를 현대미술계에 놓여있는 진실로 제시한다. 이론이 있고 나서, 그림이 있는 것이다. 즉, 현대 미술은 이론을 적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론이 없으면, 그 그림은 이해할 수 없게 된다(이야기와 입체감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회화적인 것, 즉 평면을 추구해야 한다는, 현대 미술의 일관된 정향성을 가리킨다).
책의 뒷부분을 보면, 미래의 어느 전시회에서 커다란 이론설명서가 벽면에 걸려있고, 그 이론에 대한 회화화로서 -엽서 크기로 축소 복사된- 그림(폴록 등이 그린)이 곁에 붙어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한다. 물론 웃기려고 지어낸 것이지만, 아마 가장 정확하게 그의 논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림은 말씀의 회화화(즉, 그려진 말씀)이기에 말씀(즉, 이론)보다 중요하지 않다.
이 책의 현대미술계를 다루는 방식은 <지적 사기>에서 소칼이 수행한 것처럼 과격한 것은 아니다. 저자는 일관되게 미술계(화가/평론가/화랑 등)를 웃음거리로 만든다. 그리고 종종 하나의 대상을 가리키기 위해 대여섯 개의 단어를 병렬, 제시함으로써 누적된 힘으로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사용되는 단어들은 매우 다양한 영역에서 끌어온 은유들의 다발이다. 그러나, 번역의 한계로 그 맛이 잘 살아나지 않는다).
사실 저자는 반드시 현대 미술계를 비판하려는 의도로만 집필한 것 같지는 않다. 이론선행적인 노선으로 치우쳐가는, 그리하여 대중과 분리되고 있는, 현대미술의 암호화 현상의 역사적 맥락을 꼼꼼하게 짚어내는 과정은, 적어도 1974년까지는, 그가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접근했음을 보여준다. 어쩌면 그는 여전히 현대 미술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지도 모른다(이 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미술계에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Seeing is Believing)'는 명제에 충실해주길 바라고 있다(적어도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그의 예언에 따르자면 그렇게 보인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어렵지 않다. 저자, 자신이 현대 미술의 이해에 대한 어려움을 느끼던 차에 신문에서 발견한 하나의 문장(이론이 없으면 그림을 이해할 수 없다는)을 통해 '득도'하고 난 후에, 일반인들에게 -현대미술이 극도로 이론의존적이기에- 그림만 본다고 해서 저절로 그 그림의 의미를 알게되는 것이 아니라는 비밀을 알려주고자 쓴 것이다. 태생적으로 이 책은 쉽게 씌어질 운명을 타고난 것인다. <현대미술의 상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웃게 만들며, 또한 부담 없이 읽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