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시인이 온다
월터 브루그만 지음, 김순현 옮김 / 성서유니온선교회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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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브루그만은 별다른 소개할 필요가 없는 세계적 구약학자이다. 그의 명성에 힘입어 그의 책을 소개하는 것은 매우 적절한 전략일 게다. 여기서는 비슷한 소개 행렬에 동참하기보다 차라리 브루그만의 특정한 문제의식에 주목하고자 한다.

 

알다시피 <마침내 시인이 온다>는 설교학 책이다. 설교 분야에서 명성이 높은 라이먼 비처 강좌 원고를 책으로 묶어 펴낸 것이다. 여기서 시인의 자리에 설교자를 얹어놓는다. 성경의 언어가 시인의 언어, 즉 예언자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그분을 따르는 데 있다. 그분을 따르고 싶다면 경청해야 한다. 성경에서 복종은 경청의 형태를 띤다. 복종하는 삶은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귀담아듣고, 그 음성에 주의를 기울이며, 그 음성에 응답하는 삶이다." (124쪽)

 

"폴 리쾨르가 알아챈 대로, 복종은 상상력을 따른다. 우리의 복종은 우리가 상상하는 세계 너머로 나아가는 모험을 하지 않는다. 변화된 복종(즉,좀더 신실하게 응답하는 경첨)을 수행하고 싶다면, 우리는 대안 상상, 곧 세상과 우리 자신을 다르게 상상할 것을 권유받아야 한다. 복종과 상상력의 연결은 불굴의 윤리는 시적이고 예술적인 담화에 달려 있음을 암시한다. 시적이고 예술적인 담화야말로 변화된 경청을 이끌어 내는 최상의 담화다."(129쪽)

 

두 인용문을 결합하면, 설교자가 곧 시인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설교를 통해 교인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시인의 언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인은 곧 예언자다. 모든 시인이 다 예언자는 아니지만, 모든 예언자는 다 시인이다. 예언은 현실 너머를 보여주는 다른 상상을 품고 있다.

 

따라서 설교자가 예언자의 언어, 즉 시인의 언어로 구성된 성경에 대해 시인의 언어로 설교한다면, 회중에게 다른 상상을 위한 공간이 제공된다. 이를 통해 회중의 새로운 경청, 즉 회중의 새로운 순종이 빚어질 것이다.

 

월터 브루그만은 <예언자적 상상력>로부터 줄곧 이어지는 자신의 오랜 문제의식을 여전히 붙잡고 있다. 그는 성경이 품고 있는 예언자의 언어가 우리 시대의 회중에게 그대로 들려주길 바란다. 성경을 예언자의 음성으로 듣게 하는 것이 그의 연구가 지향하는 방향이다. 나는 그의 한결 같음을 높이 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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